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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소리 쓸쓸한 풍소헌(風蕭軒)
나는 …비를 좋아해서 한밤중에라도 비가 내리면 그 냄새를 맡고 일어났고, 눈 내리는 걸 좋아해서 눈 내리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바람을 좋아해서 바람을 타고 걷는 걸 좋아했고,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바람이 불면 길 위를 무작정 걸었다. 이 비와 바람과 눈을 따라 언젠가 세상의 끝에 가보리라 마음먹고 7살에 첫 가출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볕 좋은 가을, 코스모스가 피어있는 길을 따라 계속해서 걸었는데, 그 무렵 살았던 곳은 구파발. 구파발 길 위에 ‘통일로’라고 커다란 돌비석이 있던 2차선 신작로를 따라 무작정 걸어갔다. 아름다운 길이었다. 아무도 같이 놀아주는 사람이 없던 나는 외롭고 고독했고, 가을해는 하루가 짧다. 세상의 끝에 가기 위해 서둘러 출발한 길이었지만 아무 준비가 없던 내게 그 길은 곧 핸젤과 그레텔이 걸었던 숲길처럼 무서운 길이 되었다. 어둠 속에서 길 위를 내달리는 군용 트럭의 헤드라이트 불빛과 먼지는 나를 집어 삼키기 위해 달려드는, 불 뿜는 괴물처럼 느껴졌다. 그때, 오토바이 한 대가 나를 스칠 듯 지나갔고, 잠시 후 그 오토바이는 방향을 틀어 다시 내 앞으로 왔다. 내가 좋아하는 큰 삼촌, 작은 아버지였다. 집 나간 일곱 살짜리 조카, 분명히 나는 모험을 떠난 것이었는데, 어른들은 분명 내가 길을 잃어버린 것이라 생각했다. 그 덕분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야단을 맞는 대신 늦었지만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할머니는 슬하에 7남매를 두었다. 그 장남이 내 아버지였지만, 결혼 생활에 실패한 장남 때문에 할머니는 집나간 어미를 대신해 어린 손녀와 손자 둘까지 맡아서 키워야 했다. 그 어린 손자가 나다. 지금은 빽빽한 수풀처럼 높다란 아파트가 줄지어 섰지만, 1970년대 무렵만 해도 그곳엔 아이들이 놀고자 하면 신나게 뛰놀 수 있는 공터가 많았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잘 놀 줄 모르는 수줍은 아이다. 놀 줄 모르는 아이도 놀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다행히 나는 조금 일찍 글을 떼었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신문을 비롯해, 집안에 있는, 읽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섭렵했다. 심지어 가정의학백과 같은 것들까지. 불행히도 집에는 읽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먹을거리를 찾아 배회하는 하이에나처럼 할머니를 따라 동네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당시만 해도 내 곁에 친구라 불릴 만한 이는 없었지만, 이웃한 이들의 집은 즐거운 사냥터였다. 그 시절 『바벨2세』, 『철인 캉타우』 같은 만화들을 읽었던 것 같다. 걸어서 세상 끝까지 갈 수는 없었지만, 책상 위에서 나는 세상의 끝을 맘껏 상상할 수 있었다. 성냥팔이 소녀에게 한 개비의 성냥이 그러했듯 나에게 책은 ‘개밥의 도토리’ 같이 보잘 것 없는 나를 잠시 잊을 수 있는 환상과 위안의 세계였다. 나는 돈을 많이 벌거나, 좋은 음식을 먹거나, 이름 얻는 일에 별로 욕심, 아니 관심이 없는 사람이지만, 내 주변에 항상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멋지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았으면,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많았으면 하는 욕심이 있다. 누군가 내게 허벅지를, 어깨를 허락해주고 그 곁에 뉘어주고 가끔 머리카락을 간질여주며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겠다. 엄청난 욕심쟁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없었기에 스스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책을 내게 되었다. 글을 쓰면 새로운 사람이 다가오고, 책을 내면 새로운 세상이 다가온다. 사실, 이번 책을 내고 리뷰가 없다고 투덜대긴 하지만, 실은 엄청난 일들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사람들이 내 책(이야기)을 읽고 들려주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보여주는 반응 하나하나를 통해 나는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세계를 거울 저 편에서 새롭게 읽고 알아가게 된다. 이야기를 주고받는다는 것은 그런 경험이다. 낯선 세계를 만날 기회일 뿐만 아니라 이미 알았던 사람도 새롭게 알게 해주는 환기(換氣)의 힘, 그냥 막 살아버리기엔 너무나 긴 시절을 잠시 잊게 해주는 위로. 추운 겨울을 맞이한 원시인들이 기나긴 어둠 속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나눈 이야기도 그런 것이었으리라 생각한다. 1년 365일의 이야기를 썼더니 1년 365일의 이야기를 새롭게 들려주는 친구들이 생겼다. 그 덕분에 나는 요즘 매일 아침이 즐겁고 행복하다. 리뷰가 없는 게 아니라 매일 올라오고 있는 중이니까. 매일매일 셰헤라자데의 이야기에 취해 사람 죽이는 일조차 잊은 샤흐리야르 왕처럼 나는 이야기의 힘으로 살았다. 어쩌면 그 날, 소년은 신탁(神託)을 받았는지 모른다. 홀로 길 위의 모험을 떠나기로 결심했던 어린 소년은 본래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사람의 운명을 타고난 것인지도. 늦은 밤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소년을 찾아다니다 마침내 나를 발견해준 사람이 이번에 펴낸 『하루교양공부』의 서문 마지막에 등장하는 돌아가신 나의 작은 아버지다.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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