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책을 읽어왔다를 읽은 후에 리뷰를 쓰지 않은 이유는
인간 백과사전이 되고 싶어하는 다치바나의
효율성을 중심에 둔, 논픽션을 중심으로
책을 읽을때 왼쪽 위부터 사선으로 오른쪽 아래까지 훑어보면서 눈에 걸리는 단어를 중심으로
이런 방식으로 책을 읽는것은
책 읽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책읽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방식의 책일기를 소개할 수도 있고
자기는 그런 방식의 책읽기를 선호한다고 말할수도 있지만
다치바나의 말투는 백과사전의 되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나에게도 강요하는듯이 느껴져서
불쾌했거든
다치바나의 책읽는 방식과 그가 읽은 책에 대한 자랑이 내게는 편협하게 느껴졌다.
맞다. 책을 읽을때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대각선 방향으로 걸리는 단어를 중심으로 읽어도 된다.
그런대 그렇게 포식하듯이 확장한 지식이 도대체 어디에, 어떻게 쓸모가 있다는 걸까.
레이먼드 챈들러를 읽을때 나는 천천히 읽는다.
단어와 문장을 읽을 뿐 아니라 문장 사이의 행간에 어떤때는 안개가 차갑고
어떤때는 햇살이 반짝인다.
친구를 만날때 효용성을 중심으로 만나지는 않는다.
인연이 된다면 공감하고 지지하고, 끌리고, 코드가 맞고, 눈빛이 마음에 들어서
친구를 만나듯이 책을 읽는 사람에게 효율을 앞세운 독서론은 불쾌하다.
물론 나도 모든 책을 느리게 읽지는 않는다.
효율적으로 씌어진 문장이 매력적일 때도 많다.
심농의 문장은 헤밍웨이를 닮았다.
짧고 경제적인 기자들의 문장
그렇지만 건조하지도, 지루하지도 않다.
효율적인 문장에 감성은 오히려 뜨겁다.
최근의 작가들에게서는 볼수없는 적당한 중편이
더욱 천천히
단어를 입안에서 굴리면서 맛보게 한다.
챈들러의 충실한 후계자 코넬리를 읽을때는 소름이 끼칠때가 있고
마이클 코넬리를 모르고 죽었더라면 얼마나 억울했겠는가.
에드 맥베인의 문장과 캐릭터는 최고다.
다음 87분서가 언제 번역되어 출간될 것인지
목 빠지게 기다린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공감하는 재미를 뒤로하고
책을 읽으며 어떤 효율이 더 있어야 하는 걸까.
다치바나의 깔끔하게 경제적인 독서론을 읽은후
리뷰를 쓰지 않은채
언제든 한마디 해주어야겠다, 생각하다가
데빌스 스타를 너무너무 맛있게
넋이 나갈정도로 정신없이 후루룩 읽고 나니
다치바나가 나의 벗들을 손가락질하며 흉본듯이
억울한 마음이 들어서,
아마도 다치바나를 읽은지 10년은 된것같은대,
아직도 마음에 남아
마치 콘메어 벨트에서 상품을 생산하듯
벽돌을 찍어내는 것처럼 논픽션들을 읽는것이 좋으면 그렇게 하면 되지만
천천히 두고두고 반복해서 읽고 싶은 사랑하는 책들이 있어
삶이 풍요로워 지는것을 모르고 사는 것은 불쌍하다고
알려주고 싶은 책들이야 헤아릴수 없어도
페니를 빼먹을 수는 없고, 다른 작가의 작품이 생각나기 전에 마무리 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