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열렬히 믿는 사람을 보면 신기하다. 어떻게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을 수 있을까. 때로는 그런 굳건한 믿음이 부럽기도 하다. 믿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흔들리더라도 믿는 것인가. 신이 존재하는가? 나는 답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적어도 그런 얼굴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땅에서 말하는 신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종교를 가져본 적도 없고 가질 생각도 없지만(그 무엇 하나 장담할 수 없는 인생이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나 스스로 장담할 수 있다. 나는 죽는 순간까지 그 어떤 종교도 갖지 않을 것이라고, 가질 수 없는 인간이라고…), 그럼에도 궁금하다. 저토록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신을 믿는 것일까. 그들이 믿고 기대고 의지하는 신은 과연 어떤 신인가.
요즘 손석춘의 <교양으로 읽는 기독교>를 읽고 있다. ‘기독교를 바로 알기 위한 12개의 인문학적 통찰’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데, 기독교 2천년의 역사를 훑어보면서 그 안에서 신과 예수의 참된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저자는 기독교 목회자도 신학자도 아니다. 기자 시절 국내 성직자들과 로마를 비롯한 유럽, 미국, 러시아의 기독교인들을 취재하며 기사와 칼럼을 썼고, 대학으로 옮긴 후에는 ‘종교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하고 가르치며 종교인들과의 대화를 책으로 펴내왔다. 이런 점들이 나 같은 독자, 즉 ‘교양’으로서 기독교를 공부해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이 책을 두 범주의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썼노라고 밝힌다. 첫째는 “기독교를 ‘개독교’로 낮춰 보는 사람”이다. “지하철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부르대는 사람이나 망언과 성 추문으로 종종 지탄받는 목사들을 보며 기독교란 으레 그런 종교로 치부하는 사람들” “개중에는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에 적대적인 사람”- 이 첫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 바로 나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확신하는 사람” “더러는 모태 신앙, 더러는 기독교가 세운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부터 교회를 나간 사람” “개중에는 방언을 하는 사람”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았거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사람”- 이 두 범주 가운데 하나라면, 꼭 이 책을 정독하길 바란다고 저자는 당부한다. 전자라면 기독교를 더 넓게 이해할 필요가 있고, 후자라면 더 깊게 파고들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그러면서 이어 말한다. “자신이 주님의 뜻을 확신하는 ‘얕은 예단’은 기독교를 ‘예수만 믿으면 천국 간다고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종교’라고 보는 ‘좁은 속단’ 못지않게 잘못되고 위험한 믿음”이라고. 이런 말만으로도 어쩐지 속이 시원해진다.
그러니까 나는 철저히 첫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다. 심지어 두 번째 부류에 속한다고 자부하는 사람을 좀처럼 좋아할 수 없는 편협한 인간이기도 하다. 자신의 신앙을 열렬히 간증하며 강요하는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어려울 것 같다. 연인이 될 수 있을까? 그건 더더욱 어려울 것 같다(가치관이 맞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기독교인이었던 사람을 만난 적은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 결국 이런저런 모순, 서로 결코 화할 수 없는 지점을 맞닥뜨릴 수밖에 없더라.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며 예수만 믿으면 이 현세에서 어떤 짓을 저질러도 천국에 갈 수 있노라 자만하는 자들이 싫다. 신을, 하나님을, 예수를 입에 담으면서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이용하는, 또 때로는 성적으로 착취하는 신을 대리한다는 자들, 목사들, 그리고 그들의 종교가 싫다. 간음하지 말라 부르짖으면서 정작 자신의 일상에서는 부정부패를 일삼고 다들 그렇게 산다고 자위하는 자들이 싫다. 그런데도 자신은 하나님을, 예수를 믿기에, 교회에 나가서 헌금을 하기에 천국에 간다고 자부하는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직간접적으로 마주친 이 땅의 대다수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그랬다. 당신 주변의 그들은 좀 나은가? 게다가 이제 그들은 정치 세력에 빌붙어서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이름만 대면 다들 알기 마련인 대형 교회들은 어떻게 저렇게 세를 불릴 수 있었을까. 일종의 종교 사업이다. 신을 믿고 예수를 믿노라 성경 구절을 설파하면서 그렇게 막대하게 쌓은 부를 세습하면서까지 내려놓지 못하는가? 그들이 그토록 맹신하는 성경에서 이르길 “부자가 천국에 들어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데도. 그들은 예수천국이라 천국행이 언제든 가능한 것인가? 쓴웃음이 절로 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아나키스트인 미하일 바쿠닌이 말하는 신은, 종교는 내가 미워하는 신, 내가 혐오하는 종교의 모습과 닮았다. 바쿠닌은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를 폐지해야 한다.” (미하일 바쿠닌, <신과 국가>, p,45) 단언한다. 그에게 신은, 종교는, 그리고 그런 신과 종교를 앞세우는 국가는 자유로운 인간을 억압하고 그렇게 길들여 착취하기 때문이다. 바쿠닌이 말하는 신의 모습은 야비하다. “그는 수십억에 이르는 가련한 인간들의 삶을 고통 속에 몰아넣고 그들을 영원한 지옥에 던져 넣은 다음에야 비로소 남은 자들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리고 이 신성하고 영원한 사랑을, 마찬가지로 신성하고 영원한 분노와 조화시키기 위해 다시 말해 늘 피와 희생을 갈망하는 자기 분노를 달래기 위해 그는 자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속죄의 제물로 보낸다.” 그리고 신의 아들인 “그리스도가 약속한 천국에는 오직 극소수의 선택받은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 나머지, 즉 오늘날과 미래 세대의 압도적 다수는 영원한 지옥 불에 타게 될 것이다.” 바쿠닌은 이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들과 괴물 같은 교리들을 (그가 살았던) 19세기의 한복판에도 여전히 유럽 전역의 모든 공립학교에서 정부의 명령에 따라 공공연히 말해지고 가르쳐지고 있다”고 분노한다. 그가 보기에 이런 정부야말로 “조직적으로 인민 대중을 독살하고, 고의적으로 어리석게 만들며 자기 이익을 위해 그들을 우민화하는 주범들”(같은 책, p,30~31)이다.
바쿠닌이 보는 신과 종교의 폐단은 명확하다. “종교는 인간 해방의 가장 중요한 도구인 이성을 민중 안에서 말살하고 민중을 어리석음에 빠뜨림으로써 노예 상태의 필수 조건을 만들어낸다. 종교는 인간 노동의 존엄을 훼손하고 인간의 노동을 굴욕과 예속의 징표이자 근원으로 만든다. 종교는 인간 정의에 대한 개념과 감각을 파괴하며, 항상 그 저울추를 승리한 악당들 쪽으로 기울게 만든다. 그들은 신의 은총을 입은 특권적 존재로 간주된다. 종교는 인간의 자긍심과 존엄을 죽이고 오직 굽실거리는 자들과 비천한 자들만을 보호한다. 종교는 민중의 가슴속에서 인간적 형제애의 감정을 질식시키고, 그 자리를 잔혹함으로 채운다.”(같은 책, p.42)
인간은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즉 불복종과 지식이라는 행위 다시 말해 반항과 사유를 통해 자신의 역사, 즉 인간 고유의 발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신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전혀 갖지 못하도록, 영원히 짐승처럼 무지한 존재로, 그리하여 자신이 인간의 창조주이자 주인이 되어 노예처럼 부려야 하기에 인간이 사유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바쿠닌이 보기에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당연히 영원하고 절대적이며 최고 권위를 가진 주인일 것이고 그런 주인이 존재한다면 인간은 영원히 노예이다. 인간이 노예라면, 정의도, 평등도, 형제애도, 번영도 불가능하다. 바쿠닌은 인간의 자유를 사랑하고 열망하며 인간의 그 자유가 인류 안에서 우리가 경배하고 존중하는 모든 것의 절대적 조건이라 믿기에 마침내 이렇게 선언한다.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은 노예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으며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책, p.41)
아나키스트이므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두 가지 권위로서 신과 국가를 고발하는 미하일 바쿠닌. 그에게 이 두 축은 인간 해방을 위해 반드시 부정되어야 할 권위이다. 초월자인 신, 그리고 종교는 쉽게 독단으로 타락할 수 있고, 국가는 쉽게 폭력으로 타락하며, 교육은 종종 교화로 변질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바쿠닌이 말하는 신과 종교는 그것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도구화하면서 잘못 사용했기에 타락한 것은 아닌가? 손석춘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종교의 폐단을 언급한다. “공산주의자들에게 기독교는 ‘지배계급이 민중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기독교 성직자들은 대다수 민중에게 법과 질서를 잘 지키고 착하게 살면 죽은 뒤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설교하는데, 그 법과 질서는 지배계급이 만든 것으로 그들의 재산과 이권을 수호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레닌-스탈린 체제 러시아에서는 기독교(정교회)가 위와 같은 관점에서 체제의 적이자, 억압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때로는 체제 내 결속을 위해 통제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런 억압 속에서도 러시아인 대다수는 정교회를 버리지 못했는데, 왜 그렇게 집착하느냐는 질문에 한 러시아인은 이렇게 말한다. “절망하지 않고 살아가는 데 힘을 주니까요.” 이 소박하한 대답에서 나는 인간이 신을 믿는, 종교에 의지하는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손석춘 또한 이 대답에서, 자신의 오랜 의문이 풀렸노라 밝힌다. 비단 러시아인들만이 아니라, 한 인간이 인생에서 절망을 느끼거나 삶의 방향을 잃었을 때,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는 힘을 줄 수 있다고.
손석춘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 인구가 급성장한 까닭은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를 국시처럼 삼았으며 미군이 38선 남쪽에 진주했고,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미국 개신교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영향력이 지대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교회를 나가면, 작게는 초콜릿을 얻어먹을 수 있었고, 크게는 미국 유학의 길이 열렸다. 유학을 다녀온 뒤에 개신교의 ‘인맥’은 ‘입신양명’의 튼튼한 ‘줄’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기독교를 믿는다고 말하는 인구가 절반 아래로 줄었고(약 48%), 기독교인조차도 기독교인을 믿지 못한다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다.
손석춘은 묻는다. “구성원들이 성경을 많이 사랑하는 사회가 도덕적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빈곤을 사실상 퇴치한 사회가 도덕적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많은 구성원이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사회가 윤리적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어린이와 노인, 고아의 복지를 위해 전문적인 보살핌을 제공해주는 사회가 윤리적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또 그는 이렇게 말한다. “개신교인 루터교의 전통 속에서 오래 살아왔던 대다수 북유럽 사람들은 성경이 신의 말씀을 그대로 적은 책이라거나, 예수가 처녀에게 태어났고 죽은 뒤 부활했다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더는 믿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을 돌보고 착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일, 그것이 북유럽 사람들이 말하는 기독교의 고갱이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을 돌보고 착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일, 이것은 예수가 말한 마태의 기록에 정확히 언급되어 있다.”
“똑똑히 들어라.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마태복음 25:31~46)
내가 처음 신의 존재를, 예수라는 사람을 진심으로 궁금해 하기 시작했던 것은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기독교인 때문도 아니고 같이 교회를 가자고, 성당을 가자고 권유 또는 강요했던 주변 인물 때문도 아니었다. 오래전 읽은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에는 신을 양파라고 부르는 ‘오쓰’라는 인물이 나온다. 그는 말한다. “신이란 당신들처럼 인간 밖에 있어 우러러보는 게 아니라고”, “그것은 인간 안에 있으며, 더구나 인간을 감싸고 수목을 감싸고 화초도 감싸는 저 거대한 생명”(엔도 슈사쿠, <깊은 강>, p.177)이라고. 오쓰는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는 거창하고 절대적인 신이 아닌, 껍질을 벗겨내도 끝내 눈물을 자아내는 양파야말로 예수의 참모습이라고 말한다. 양파 같은 신은 권위적이지 않으며 인간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자기를 내어주는 존재이다. “신은 존재라기보다 손길입니다. 양파는 사랑을 베푸는 덩어리입니다.”(같은 책, p.94)
손석춘은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예수와의 커뮤니케이션은 자기 성숙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하면서 성경에서 예수가 지상에서 가르친 고갱이는 다른 그 무엇도 아닌 바로 “사랑”임을 거듭 강조한다. 오쓰의 양파 이론과 맞닿는 지점이다.
신은 사랑이다. 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신 안에 살며 신도 그 사람 안에 살고 있다.(God is love. Whoever lives in love lives in God, and God in him.)(요한1서 4:16)
바쿠닌은 “흔들리고 흐릿한 불빛은 아예 없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그런 빛은 뒤따르는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이끌기 마련이기 때문이다.”(<신과 국가>,p.99)라고 말했다. 지금 여기 이 땅의 신은, 기독교는 흔들리고 흐릿한 불빛은 아닐까. 나는 그 흔들리는 불빛만을 보고 신을 안다고 예수를 안다고 말했던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