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부 작가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름이 몇몇 있다. 마크 트웨인으로 시작해 윌리엄 포크너, 플래너리 오코너, 카슨 매컬러스, 유도라 웰티, 테네시 윌리엄스, 트루먼 카포티, 하퍼 리, 코맥 매카시…. 남부 문학을 남부 고딕 문학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주로 정신적이나 신체적으로 문제를 지닌 인물들이 등장해 초자연적이고 신비스러운 분위기에서 폭력적이며 그로스테스크한 일들이 일어나고 이를 통해 인종차별이나 빈곤, 계급 문제 등 사회의 어두운 면을 고발/ 폭로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남부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토니 모리슨의 문학도 이 계보를 잇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나는 이런 특징들-그러니까 흑백 인종차별, 초자연적이고(토니 모리슨의 마술적리얼리즘), 폭력적인 분위기 등의 이유 때문에 남부 고딕 문학을 딱히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런 중에도 카슨 매컬러스나 테네시 윌리엄스, 트루먼 카포티는 격하게 애정하는 편인데 그 이유는 바로 이들의 작품에는 여타 남부 작가들과는 좀 다른 ‘낭만’과 서정성이 짙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다들 극찬해마지 않는, ‘작가들의 작가’라 칭송받는 플래너리 오코너는 그 차가운 그로테스크함, 종교적 광기/광신자들을 모아놓은 분위기 때문에 아무래도 좋아지지는 않더라(<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현대문학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집>, <현명한 피> 등).
그러나 카슨 매컬러스를 보라(<슬픈 카페의 노래>,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등), 어딘가 온전치 못하고 병든 자들, 사회에서 이른바 비정상인들이라 여겨지는 인물들이 등장해 절절한 고독을 호소하다 서로 의지하면서 기어이 살아내는 모습들을 지켜보노라면 산다는 것의 비장함, 숭고함 때문에 가슴 한쪽이 뭉클해지면서 마침내 묵직한 감동이 차오른다. 게다가 그 섬세한 문장이란! 카포티는 또 어떤가(<차가운 벽>, <다른 목소리 다른 방>, <풀잎 하프> 등) 동성애자나 몰락한 남부 귀족 등을 주요 인물로 내세워 펼쳐나가는 그로테스크한 이야기들 속에서 빛나는 서정성과 낭만, 연민과 따뜻함은 카포티를 따를 자가 없지 않을까. 테네시 윌리엄스 또한 거의 모든 작품에서 비극적인 서정미(특히<유리 동물원>!!!!!!!)가 절절하게 흐른다. 그러니까 나는 주로 미국 남부 작가들의 작품을 딱히 즐겨 읽지는 않으면서도 이 세 사람, 카슨 매컬러스, 트루먼 카포티, 테네시 윌리엄스는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면 닥치는 대로 모조리 찾아 읽으면서 애정해마지 않는 작가로 꼽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윌리엄 포크너는 어디에 속했느냐 하면, 그런 것이다. 수능 준비를 하려면 국/영/수는 필수과목 아닌가. 그래서 꼭 공부해야만 하는데 어렵고 난해하고 재미까지 없어서 왠지 피하고만 싶었던 과목. 그러니까 내게 포크너는 수학 같은 존재였다. 그렇지만 그래도 수학처럼 포기는 하고 싶지 않은.... 왜냐하면 미국 문학에서 포크너를 제외하고 넘어가면 과연 미국 문학을 제대로 읽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런 마음이 늘 들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읽은 포크너는 <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이다. 분량이 그리 부담스럽지 않아서 도전했던 것 같다. 나쁘지 않았다. 오호라, 시점을 이렇게 달리 쓸 수 있구나 신선했다. 그래서 또 도전했던 작품이 <성역>............ 아, 진짜 이거 읽고 나가 떨어져버렸다. 포크너 작품을 한동안 읽을 수가 없었다. 이 작품의 소개 문구를 보자. “미국 사디즘의 최고의 예” 이런 평을 받으며 충격과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품. 돌이켜보니 아마도 저 문구에 혹해서 읽었던 것 같다(소싯적에도 그래서 <소돔 120일> 읽었다가 나가 떨어졌었지... 그런데도 또 혹했구먼...). <성역>은 읽기 난해한 게 아니라 심적으로 힘들다. 이 작품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옥수수대로...강간하는 장면. -_-;;;; 그러니까 이 작품은 성불구자가 한 소녀를 강간하는데 그는 성불구자라 강냉이대로 강간하는 것이다. 이런 제기랄.... 인간의 비뚤어진 성적 욕망, 관음증, 강간 등 극단적인 폭력을 통해 그 시절 미국의 타락상을 폭로하는 <성역>(<성욕>아님)- 작품의 의의는 나름 있겠지만 저런 장면들이 너무 불쾌하고 충격적이어서 난 이 작가 더는 못 읽겠다 싶어서(그 시절 순진하고 꽃다웠던 30대 초반의 자냥 ㅋㅋㅋㅋ). 그 이후로 포크너는 좀 멀리 했었다. 그런데도 속 시원히 버리지는 못하고 그의 책이 출간되어 나오면 <포크너 단편선>(현대문학), <소리와 분노>. <곰>(문학동네) 등등 사두긴 했단 말이지..... 그렇지만 역시 쉽게 손이 가지 않는 포크너여.

내가 갖고 있는 포크너.... <성역>은 읽고 팔아버린 모양...ㅋㅋㅋㅋㅋㅋ
그러다 내 이제 돌아와 다시 포크너 앞에 서게 되었으니.... 그것은 <야생 종려나무> 때문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어라?! 포크너도 서정적이네?! 아니 문장, 왜 이렇게 잘 써?!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내가 포크너를 잘못 읽은 것인가, 아니면 그 사이에 내가 책 읽는 폭이 좀 더 깊고 넓어진 것인가(!ㅋㅋ) 포크너를 제대로, 이제야 드디어 마침내 제대로 다시 읽어야겠다 싶어졌다. <야생 종려나무> 이후 올해 두 번째로 집어든 포크너는 <팔월의 빛>- 이 책도 사둔 지 얼마나 오래되었느냐면.... 그새 개정판이 새로 나왔다(출판사도 역자도 똑같은 걸 보니 거의 표지만 바꾼 판본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그래서 그 옛날 사둔 구판으로 <팔월의 빛>을 읽다가 정말 속된 말로 뻑이 가버리고 말았다. 이제 나는 미국 남부 문학 좋아하는 작가 F4를 꼽아보라면 카슨 매컬러스, 카포티, 테네시 윌리엄스에 윌리엄 포크너를 넣겠다.......(어머나! 2카 2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오늘의 본론은(엥?! 이제야 본론?!) <팔월의 빛>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작품도 <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처럼 다중 시점이다. 화자가 여러 번 바뀌고 그에 따라 시점도 관점도 달라진다. 그래서 독자는 각 인물마다 그 내면의 고통을 깊게 헤아릴 수 있다. 이 작품의 주요 인물들을 살펴보자면 미혼모 ‘리나 그로브’, 자신이 백인인지 흑인인지 자기조차 헷갈리는 ‘조 크리스마스’, 오쟁이 진 목사 ‘하이타워’, 남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에게 결국 반해버리는 바보 같은 남자 ‘바이런 번치’, 리나가 애 아범을 찾아 길 떠나게 만든 장본인 ‘루커스 버치(조 브라운)’ 등이다.
7월 중순의 뜨거운 태양 아래, 리나는 잔뜩 부푼 배를 안고 길을 떠난다. 앨라배마에서 미시시피주의 제퍼슨까지 그냥 무작정 걷는 것이다. 여자 혼자 길을 떠나도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데 이 여자는 심지어 만삭의 몸이다. 그러므로 그녀를 우연이라도 마주치거나 보게 되는 사람들은 도대체 그녀가 어디서부터 걸어오는 것이며, 왜 그런 몸으로 길을 떠났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담담하게 말한다. 배 속의 아이 아버지가 일자리를 알아보고 집을 장만한 다음 자기에게 사람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노라고. 그러나 출산이 임박해도, 남자는 무엇을 하는지 소식이 감감. 그래서 여자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맨발로 길을 떠났노라 말한다. 이곳저곳에서 마치를 얻어 타고 만나는 사람마다 루커스 버치를 아느냐고 물어가면서 마침내 여기까지 온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누군가가 루커스 버치라는 사람이 제퍼슨의 제재소에서 일하고 있다고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다행일까? 리나의 사연을 지켜보는 독자는 알고 있다. 루커스 버치라는 작자가 리나가 그렇게 믿을 만한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면, 그런 남자였다면 임신한 여자를 두고 달아나듯 떠나버리지는 않았으리라. 사실 리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조차 남자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도망쳤구나, 감지한다. 심지어 ‘루커스 버치’라는 이름이 과연 진짜일까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왜 아니겠는가. 여자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반반하게 생긴 말만 번드르르한 한량 같은 놈인데 이 여자 저 여자 집적거리면서 결국 원하는 바를 이루면 달아나는 게 일상인 놈이 아닐까,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기에 이 여자, 리나가 안쓰럽고 안타깝기만 하다. 그런데도 리나는 묵묵히 걸어, 드디어 여기, 제퍼슨의 제재소에 도착한다.
“루커스 버치”라는 사람을 찾는다는 말에 제재소 안에서 나오는 한 남자. 그는 정말 리나에게 사랑을 속삭이며 집을 장만하고 당신을 부르겠노라 약속한 루커스 버치일까? 그런데 밖으로 나온 남자도, 리나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제가 번치입니다만... 그렇다. 그의 이름은 ‘바이런 번치’- ‘버치’가 아니라 ‘번치’였다. 이름을 헷갈린 사람들이 버치가 그 번치려니 하고 이곳을 알려준 것이다. 리나는 루커스 버치라는 사람이 이곳에서 일하지 않느냐고, 혹은 제퍼슨에 다른 제재소가 또 있는 것은 아니냐며 묻는다. 그러나 번치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절망적이다. 그런 사람은 없노라고, 게다가 제퍼슨에 제재소는 이곳 한 곳 뿐이라고. 리나는 절망해야 마땅한데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면 또 찾아봐야죠, 담담하기만 하다. 번치는 생각한다. 어쩌면 이 여자도 길을 떠나기 전에 이미 루커스 버치의 약속을 믿지 않은 건 아닐까.....? 이 묵묵하고 선량한 남자는 만삭의 여자를 외면할 수 없어서 그녀가 아이 아버지를 찾는 데 도움을 주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이 여자, 리나에게 반하고 만다. 이 두 사람은 어찌 될 것인가.
리나의 입으로 그려지는 ‘루커스 버치’의 모습을 듣다가 바이런은 어떤 인물을 떠올린다. ‘조 브라운’이라고 어느 날 이 제퍼슨에 나타난 젊은 남자. 가볍고 농담을 좋아하고 잘생겼지만 어딘가 한량 같은 놈팽이. 브라운은 마찬가지로 어느 날 이 마을에 나타난 남자 ‘조 크리스마스’와 함께 위스키를 남몰래 판매하는 일을 하고 있다. 바이런은 직감적으로 이 두 남자 중 한 사람이 리나의 연인임을 알아차린다. <팔월의 빛>은 이때부터 이 두 명의 ‘조’- ‘브라운’과 ‘크리스마스’의 이야기도 펼쳐지는데, 그중 특히 ‘조 크리스마스’의 살아온 생을 지켜보면서 독자는 리나와 함께 크리스마스가 이 작품의 주인공이려니 짐작하게 된다.
‘조 크리스마스’가 ‘크리스마스’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얻게 된 계기는 단순하다. 그는 갓난아기 시절 멤피스의 한 고아원 문 앞에 버려졌는데 그날이 마침 크리스마스였기 때문이다. 아이를 발견한 고아원 원장은 아~~무 생각 없이 ‘조 크리스마스’라 이름 붙여준 것이다. 고아원에 버려진 이 아이는, 자신의 부모가 누군지 당연히 알지 못한 채 자라난다. 그런데 어느 날 고아원에서 보면 안 될 것을 보게 되면서 영문도 모른 채 쫓겨난다. 운이 좋아 백인 가정에 입양 가게 되지만 그게 과연 행운이라고 할 수 있을지…. 조는 집안의 강압적인 환경 속에서 종교적/성적으로 억압받으며 자라나고(거의 학대 수준), 마침내 집을 탈출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그는 늘 자신이 백인의 피부를 지녔지만 흑인의 피가 흐른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망상일까 진실일까? 그리고 이렇게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크리스마스는 급기야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되는데........
<팔월의 빛>은 리나, 조 크리스마스, 바이런 번치, 루카스 버치(조 브라운). 하이타워 목사 이 다섯 인물과 그들과 얽힌 여러 사람들의 절절한 사연이 펼쳐지면서 남부 문학 특유의 문제들-흑백 인종 차별과 편견, 광기와도 가까운 종교, 왜곡된 성(性), 그리고 그 끝에 질문하는 인간의 존엄성 등을 정교하게 그려나간다.
“자넨 나에게 사랑을 막 배웠다고 말하고 싶을 거야. 하지만 난 자네가 희망을 막 배웠다고 말하고 싶군. 그래 그거야. 그것이 희망이야. 희망의 대상은 문제가 되지 않아. 희망 자체에게도, 자네 자신에게도 말이야....” (p.457)
‘사람이란 무슨 일이든 견딜 수 있는 것 같군. 하기야 사람은 전혀 해보지 않은 일조차 견딜 수 있지. 사람은 견딜 수 있는 것 이상이라고 생각되는 일도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어. 소리 내어 엉엉 울 수도 있는 상황도 능히 참을 수 있지.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견딜 수 있어. 뒤를 돌아보든 아니든 상황이 나아질 게 없다는 것을 알 때는 특히 그렇지.’ (p.618)
리나는 조 브라운에게 버림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조 크리스마스는 태어났을 때부터 여러 차례 버림받는다. 게다가 그는 과연 흑인인가 백인인가? 겉모습은 누구나가 다 인정하듯이 백인 그 자체이다. 그런데 단 한 방울의 흑인 피만 섞여도 흑인으로 치부되던 그 시절 미국의 남부. 흑인들로부터는 백인 취급을, 백인으로부터는 검둥이 취급을 받는 조 크리스마스의 생은 만삭의 미혼모 리나의 삶과 마찬가지로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달파 보인다. 게다가, 목사답지 않은 행동 때문에 마을 사람들로부터 냉대 속에 버림받고도 제퍼슨을 떠나지 못하는 남자, 하이타워와 남의 아내나 마찬가지인 리나를, 하필이면 그 리나를 사랑하게 되는 바이런 번치. 이 남자들의 고통 또한 가벼워 보이지 않는다. 이들의 삶에도 과연 빛이 스며들까? 포크너는 그럴 수 있노라고 감히 말한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의 삶이 그래서 감동이라고 말한다.
<팔월의 빛 Light in August, 1932>은 <소리와 분노 The Sound and the Fury, 1929), <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 As I Lay Dying, 1930>, <압살롬, 압살롬! Absalom, Absalom!, 1936>과 함께 포크너의 4대 장편으로 꼽힌다. <성역 Sanctuary, 1931>은 그 외 문제작으로, <야생 종려나무 The Wild Palms, 1939>는 후기작이자 실험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그 밖에 주요 단편으로 <에밀리를 위한 장미 A Rose for Emily, 1930>와 <헛간 타오르다 Barn Burning, 1939>가 있으며 과거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곰 The Bear, 1942>은 올해 새로 나온 연작 소설집 <내려가라, 모세여 Go Down, Moses, 1942>의 핵심 중편으로 이 책에도 실려 있다. <에밀리>와 <헛간 타오르다>는 현대문학 단편선에서 읽었고.... <소리와 분노>, <압살롬, 압살롬> <내려가라, 모세여>까지는 꼭 읽어야겠다. <성역>도 다시 한 번 읽어볼까.....? 으, 옥수수여....=_=

Publicity photographs of Faulkner, summer 1924
글 잘 쓰니까 잘생겨 보이기까지 함....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