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월급날, 당신의 통장에는 일정한 금액의 월급이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숫자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 숫자에서 또 일정한 금액들이 이런저런 곳으로 빠져나간다. 카드 값, 공과금, 보험비 등등. 몇 푼의 금액-숫자가 통장에 남을 수도 있고 다 빠져나간 채 통장은 텅장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통장에 들어왔던 것은 돈인가? 숫자인가? ATM 기기 앞에 서서 은행에서 발급받은 카드를 넣고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몇 장의 지폐를 출력해서 손에 넣어보지 않는 한, 그것은 영원히 숫자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돈-월급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그것으로 또 이런저런 곳에 돈을 지불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돈은 과연 어디에서 실재했는가? 이것은 하나의 관념일 뿐이지 않은가?
<바라모>의 주인공 ‘바라모’ 또한 그날, 월급을 받는다. 그는 그래도 이 월급을 단지 숫자-기호로만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눈앞에 존재하는 물질로서 종잇조각으로서 월급을 받는다. 손에 넣는다. 잡는다. 만진다. 그것은 엄연히 100페소짜리 지폐 두 장, 200폐소이다. 그런데 이것은 통장에 찍히는 숫자로서 존재하는 월급보다 현실성-실재성-존재로서의 가치는 명확하지만 단지 기호로 존재하는 월급보다 사용 가치는 떨어진다. 왜일까? 그가 월급으로 받은 지폐 두 장은 위조지폐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사실을 급여를 손에 쥐는 그 순간 인식했다. 위조지폐로구나! 한데 그는 지폐를 받아든 그때, 위조지폐임을 알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저 받아들일 뿐.
왜일까? 바라모가 사는 이곳은 1923년 파나마의 한 도시 콜론. 이 도시는 관료적 사고가 팽배한 곳으로 공무원 바라모조차 바로 그 돈을 받아들이는 순간에도 관료적 사고방식에 젖어 관습적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이제 이 쓸모없는 돈을, 덧없는 월급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의 머릿속에는 이런저런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그래, 아무렇지 않게 모르는 척하고 이 돈을 진짜 화폐로 바꾸는 거야! 이 생각은 자연스럽다, 그 오래전 톨스토이의 <위조지폐>에도 이런 생각을 하고 실행에 옮기는 자가 등장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바라모는 주춤한다. 위조지폐를 쓰는 순간 바로 감옥행이 예정되어 있는 것만 같다. 아니,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이곳은 다름 아닌 1923년의 파나마이기 때문이다.
바라모는 그때까지 파나마에서, 이 나라에서 위조지폐가 유통되고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이 위조지폐를 사용한다면, 바로 그 순간 새로운 범죄-이 나라, 이 도시의 첫 번째 유형의 범죄자가 될 것이며 그러므로 사법체계도 상상력을 발휘해 그에게 이때까지 한 번도 집행되지 않았던 처벌을 감행할 것이다. 무기징역 또는 사형이면 어떡하지? 그렇기에 그는 이런 두려움, 공포 앞에서 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지폐-위조된 ‘가짜’ 돈을 들고 정부 청사를 나온다. 그는 생각한다. 이 불법 지폐들에 ‘암묵적인 침묵과 신중하게 처신하라는 명령이 담긴 듯’하다고.
거리, 광장에서는 국기 하강식이 치러지고 있다. 바라모는 그때 울려 퍼지는 군악대의 음악 소리에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주머니 속 이 저주받은 돈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때마침 차에서 내려 한 남자가 다가온다. 운전기사이다. 월급이 들어오면 여기저기서 돈을 빼가듯이 그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는가 보다. 그도 생각한다. 도박빚을 받아가려는 것인가! 이런 제길 운도 지지리도 없구나.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웬 행운인가? 바라모의 어머니가 도박에서 딴 돈을 그를 통해 돌려주려는 것이다. 어머니는 사실 노련한 도박꾼이다. 바라모는 그렇게 운전기사로부터 어머니에게 전달할 돈을 받아 넣는다. 그 와중에도 머릿속에는 여전히 이 쓸모없는 지폐 두 장을 어떻게 한담? 전전긍긍이다. 이 두 장을 다른 지폐로 바꾸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이지만 계획을 세우지는 못하고 있다. 그저 단지 이 벌어진 상황에 당황해하고 있을 뿐이다.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곤혹스러움의 연속. 그는 당이라도 채우고자 광장 근처에서 젤리 파는 원주민 여자로부터 빨간 주사위 모양의 젤리를 사먹기로 한다. 어머니에게 전해야 할 돈 중 1페소를 지불하는데, 여자는 당황한다. 그 돈은 너무 커요! 거스름돈을 구하기 어려워요! 이때 갑자기 등장한 신체 불구의 한 신사가 다리를 끌고 나타나 자신이 직접 거스름돈을 구해다 주겠노라 한다. 그의 수고로움에 미안해하며 죄송스러워하는 바라모에게 신사는 말한다. “잘못은 화폐를 제대로 발행하지 않아서 액면가가 낮을수록 일반 대중에게 더욱 희귀해지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야기한 통화 당국에 있다.”
바라모는 아무에게나 자기한테 빚졌다고 우기며 돈을 뜯어내는 정신 나간 노인을 만나 돈을 뜯기기도 하고, 원주민 여자한테 산 젤리를 오른손에 들고 있어서 손을 자유롭지 사용하지 못하던 중에 문득 광장에 휴지통이 없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면서 “당국의 또 다른 실책 때문에 그의 호주머니는 쓸모없는 종이쪼가리들로 가득 차”게 되기도 한다. 이런 사실을 깨달았을 때 우연히 키 큰 관목 옆에서 있었던 그는 그 가지 끝에 젤리를 꽂는다. 이 젤리는 형체 없이 살집이 통통한 꽃처럼 보인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뻗어버린 바라모에게 어머니의 고함소리가 들려온다. 어머니는 익명의 누군가로부터 편지를 받고 분노 중인데, 편지 내용은 “네 남편이 너를 속이고 있다.” “폭탄을 설치할 것이다.” “네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등등 진부한 경고 문구로 누구에게나 모두에게나 아무에게나 해당될 내용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종이쪽지의 뒷면을 살펴보니 이것은 매트리스 영수증이 아닌가! 언젠가 어머니가 매트리스를 산 후 영수증이 아닌 종이쪼가리를 매장에 가져가 실랑이를 벌이다 겨우 매트리스를 바라모와 함께 끌고 온 후 끝내 나오지 않았던 그 영수증이 이제 그렇게 섬뜩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한편 어머니는 정신이 오락가락한지 망상인지 자신은 아이를 낳은 적이 없는데 아이-그러니까 바라모-가 있다고 말한다. 어느 날 누군가가 나타나 자기에게 이 아이-바라모를 맡겼다나. 바라모는 어머니의 친자인가 양자인가? 하긴 그녀에겐 남편이 없다. 그런데도 아이-바라모는 이렇게 존재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중국인, 바라모도 중국인, 두 사람이 친자 관계일 확률이 더 높다. 이 모든 혼돈 속에서 그는 자신만의 안식이 되는 유일한 취미인 작은 동물 박제에 몰두해보려고 한다. 오늘 그가 시도하려는 작품은 ‘피아노를 치는 물고기’. 그런데 아뿔싸. 그는 파나마에서 피아노를 실제로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손이 없는 물고기가 피아노를 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 작품은 과연 완성할 수 있을까?
연줄로 간신히 일자리를 얻어 근근이 살아가며 어머니 집에 들어앉아 혼자 가족도 없이 살고 있는 바라모. 정부의 말단 공무원인 바라모는 이렇게 호주머니에 위조지폐라는 독을 담고서는 정부 청사-광장-집-카페 등을 전전하며 대략 열 시간에서 열 두 시간에 걸쳐 긴 시 한편을 쓴다. 그날 오후의 퇴근길에서부터 주머니 속에 차곡차곡 모아 둔 종이쪼가리들을 그대로 베껴 적은 것 뿐. 마침표도 문단 나누기도 없이 오로지 종이 쪼가리가 쌓인 순서대로 불규칙하게 널어놓았을 뿐 모든 것을 우연의 순서에 맡긴 기나긴 시를….
바로 그 결과물이 현대 라틴아메리카 시의 걸작으로 찬사 받는 <아기 예수의 노래>이다. 자, 이쯤에서 눈치챘는가? <바라모>는 ‘바라모’가 위조지폐라는 ‘구체적이고 환원 불가능한 물질성을 지닌’, ‘다른 돈으로 교환될 수 없고 관념적인 수치로 환원 되지도 않았으며 체제 속에 녹아들지도 못’하는 독과 같은 물질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열두 시간 동안 쓴 기나긴 한 편의 서사시이다. 그 이름은 <아기 예수의 노래>라고 불리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를 낳은 적 없는데 바라모라는 아들과 함께 사는 바라모의 어머니가 마리아라면, 바라모가 아기 예수가 아니고 그 누구이랴! 이 순간 이 기막힌 상징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바라모는 반세기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시를 쓴 적이 없었다. 시를 쓸 이유도 없었고 그 이후로 다시는 시를 쓰지 않았다. 그는 위조지폐라는 위험한 물질이 손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냥 살았다. 파나마에서 태어나 그런 사회에 젖어 한 번도 이사하지(장소를 옮기지) 않은 채 관습적으로 살아갔다. 그러나 이 피할 수 없는 골칫거리를 마주하고 나서야 그런 현실을 발판 삼아 시-문학-예술을 창조한다. 그전까지 그는 단지 살아가기만 했다. 바라모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늘 궁금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제는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은 위조지폐를 어떻게 바꿔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냥 살고 있는 것이었다.”고. 그러나 그는 이 골칫덩이, 문젯거리를 마주하자마자 고민하게 되고 그 고민에서 창작의 재료를 구한 것이다. “저 멍청한 위조지폐들. 그건 아무것도 아니고 실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끝날 수도 있다. 끊임없이 이어져 있는 세상 현실에서.” 그러나 이 두 장의 위조지폐는 새로운 이질성을 부여하기 위해 바라모 앞에 도래했고 이렇게 시로, 예술로 재탄생한 것이다. 곤경, 고통에서 예술은 꽃을 피우지 않는가. 그 꽃은 검붉은 색이기도 하고, 바라모의 <아기 예수의 탄생> 또는 <바라모>처럼 아방가르드한 무채색이기도 하리라.
바라모는 위조지폐가 주머니에 들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경찰을 마주하고서 공포를 느끼고, 거리의 여러 사람-원주민 여자, 정신 나간 노인, 운전기사, 불구 신사, 공고라 집안 여자들, 출판업자 등등을 만나면서 파나마의 숨 막힐 듯한 현실(‘정속 경주’ ‘골프채 밀수’ 등등으로 상징되는)을 맞닥뜨리며 깨닫는다. 그날 바라모가 위조지폐 문제로 깨달았듯이, “악몽을 꾸기 위해 꼭 악몽을 꿀 필요는 없다. 단지 어떤 상황에 놓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그런 부패한 현실(파나마 콜론은 해적판 출판의 역사적 중심지라는 아이러니!)에서 <아기 예수의 노래> 또는 <바라모>라는 거대한 한 편의 서사시가 탄생하는 것이다. “환상을 빚어내는 재료는 다름 아닌 사실”이다. 예술의 소재는 현실에서 구한다. 그런데 그 현실을 비틀어 어떻게 창작하는가는 오롯이 창작자의 몫이다. ‘바라모’가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우리의 월급은 통장을 스쳐지나갈 뿐이지만 바라모의 월급-심지어 위조지퍠는 이렇게 시가 되었다. 가지에 꽂힌 젤리가 꽃이 되어 새가 날아와 입에 넣었듯이 당신은 바라모의 위조지폐에서 탄생한 시를 지금 읽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