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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다락방

최근 한국문학을 오랜만에 읽었다. 그 시작은 정영문의 데뷔작인 《겨우 존재하는 인간》 때문이었다. 이 작품은 1997년에 출간되었으나 곧 절판, 소문으로만 전해졌던 명작 중의 하나였다. 몇 해 전 복간된 덕분에 나도 이제야 읽을 수 있었다. 소문대로 좋았다. 내가 이 작품을 좋게 읽은 까닭은 아마도 한국문학이면서도 한국문학스럽지만은 않은 무엇인가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그래서 정영문의 다른 작품들도 다 읽어 볼 생각이다). 

번역 문장이 아닌 한국어로 쓰인 글을 읽을 때의 즐거움도 오랜만에 느꼈기에, 내친김에 다른 한국문학도 읽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먼저 펼쳐든 책이 김애란의 《안녕이라 그랬어》이다. 내가 한국 현대 소설을 읽으면 다른 사람이 놀라워할 정도로(ex 다락방) 잘 안 읽기는 하지만 그래도 김애란은 드문드문 읽어온 작가이기는 하다. 첫 작품집인  《달려라 아비》부터 《침이 고인다》, 《바깥은 여름》에 이어 이번에 읽은 것까지 네 권은 읽었다. 김애란의 팬인가 싶기도 할 텐데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좋아하지 않는 편에 가깝다. 그럼에도 김애란을 읽게 된 것은 그 무렵 운영하던 블로그의 이웃들이 김애란 책, 한 번만 읽고 감상평 좀 남겨달라고 해서였다.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를 읽고서 잘 쓰는 것 같기는 한데 내 취향은 아니라고 했다. 너무 구질구질하다고… 그때부터 그 친구들 사이에서는 농담처럼 김애란의 작품을 ‘구질문학’이라고 명명했었다.

나는 그 가난함과 구질함을 어디서 느꼈던가. 《달려라 아비》에서 보여준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강박증 같은 것은 많이 사라졌지만 《침이 고인다》 또한 여전히 ‘엄마’와 ‘가난한 삶’ 그리고 비루한 ‘서울 상경 살이’가 거의 모든 단편의 주제이자 소재였다. 《침이 고인다》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방’을 얻기 위한 20대의 남루한 투쟁이라고 해야 할까? 그들은 어떻든 자신만의 ‘방’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자기만의 공간’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딘가 많이 부족하다. 그 ‘방’은 비가 오면 물이 콸콸 들어오는 반지하의 방이기도 하고, 느닷없이 찾아온 후배에게 속절없이 침범당한 작은 원룸이기도 하고, 신림동의 고시원이기도 하고, 옥탑방이기도 하고, 다 큰 남매가 한 공간에서 같이 자고 먹고 해야 하는 원룸이기도 하고, 노량진 학원가의 학사촌이기도 하다. 

그런 김애란의 인물들은 《바깥은 여름》에서 드디어 자기 집을 가진 이들이 된다. 널찍하고 화려한 집도 아니지만 《침이 고인다》에서 방을 찾아 헤매던 청춘들이 어느덧 ‘자기 집’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것이다. 낡고 보잘것없기는 하지만 자기만의 ‘집’을 소유하고는 20대의 삶이 아닌 30대의 삶을 살고 있다. 아이도 낳고, 그 아이로 인해 생의 기쁨을 느끼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자식 때문에 삶의 고통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래서 작가도, 작가가 그리는 인물들도 그때보다는 어른이 되었구나, 자라고 있구나, 그럼으로써 삶이 던져주는 무게를 조금 더 묵직하게 느끼는구나 싶어졌다. 그런 변화가 조금은 반가웠던 기억도 난다.

《안녕이라 그랬어》를 읽기 시작하고 조금 놀랐던 점은 가난과 구질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김애란의 주인공들이 이제는 더 성장하고 사회에서 자리를 잡았는지 부유한 자들이 모여서 여는 ‘홈 파티’(<홈 파티>)에 초대를 받고 해외여행을 가기도 하는 것이었다(<숲속 작은 집>). 하긴 《달려라 아비》를 쓸 때보다 작가 자신이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그가 창조한 인물들 또한 20대에서 30대를 거쳐, 40대로 나이 들면서 생활도 조금 달라지고 만나는 사람들도 달라지고 그러면서 삶이 조금씩은 달라졌으리라. 그러나 나는 《안녕이라 그랬어》의 단편 하나하나를 읽어나감에 따라 경제적 생활은 조금 나아졌을지 몰라도,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빈곤하구나 싶어졌다. 그래서 답답해졌다. 아니 마음의 빈곤함, 가난함은 더 심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한숨이 나왔던 것일까. 

초대받은 ‘홈 파티’ 자리에서도, 해외여행을 떠나서도 계급과 돈의 위력을 줄곧 실감하고 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의 마음의 가난함은 <좋은 이웃>에서 절정에 달한다. 서울에서 전세살이 중인 어느 40대 부부는 늘 관심사가 자가 소유의 집, 그것도 아파트이다. 남편은 새로 들어온 신입이 ‘나보다 부자’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며 회사에서도 동료들을 단지 부(富), 집을 소유했느냐 아니냐의 기준으로 바라본다. 방문 학습지 교사였다가 독서지도사로 일하고 있는 아내의 관심사 또한 온통 자기 집의 소유 여부이긴 마찬가지이다. 평소 자신이 특별히 ‘아끼던’ 학생 ‘시우’(그러나 뭐랄까 가난해 보이기 때문에 연민하면서 계급적 우월감을 느끼던 대상)가 어느 날 새로 지은 아파트로 이사 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당황해한다. 자기 마음의 들키고 싶지 않았던 부분을 스스로 목도하는 것이다. 

그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내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무겁기만 하다. ‘분명 좋은 소식인데, 그것도 내가 아끼는 학생의 일인데, 마음이 허전하고 휑’하다. ‘내가 연민하던 대상이 혼자 반짝이는 세계로 가버렸기’ 때문일까 자문하기도 한다. 그런데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낡은 집에서 새 아파트로 이사 가는 것이 과연 ‘반짝이는 세계’로 가는 것일까? 시우를 ‘마주 보는 건 괜찮지만 올려다보는 건 싫은 걸까?’ 생각하다가 아내는 이런 쪼잔한 후회까지 하기에 이른다. “경제적으로 가장 쪼들렸을 때조차 시우네만은 수업료를 안 올렸는데. 그때 그냥 오만 원 더 올려 받을걸…….” 급기야 시우의 수업을 그만둘까 생각까지 한다. 시우가 자신에게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시우네 이사 소식을 들은 남편의 반응도 만만치 않다. 그는 거두절미하고 묻는다. “자가래?” 남편의 이 노골적인 질문에 아내는 자기도 모르게 뺨이 붉게 달아오른다. “별말 아닌데 왜 수치심이 드는지 알 수 없었”노라 말한다. 그러나 본인도 알고, 읽는 나도 안다. 그 수치심은 바로 마음의 빈곤함/가난함 때문 아닐까. 그토록 아끼고 예뻐하던 학생 시우가 자기보다 낡고 허름한 집에 살 때는 괜찮던 것들이 새 아파트로 이사 간다니 왠지 배가 아프다. 시기심과 함께 알 수 없는 열패감, 열등감에 휩싸여 수업을 그만둘까까지 생각하는 너무나 가난한 마음.

이렇게 사사건건 나와 타인의 삶을 주로 부와 계급으로 비교 평가하는 인물들은 거의 모든 단편에서 등장한다. 여행을 떠나 에어비앤비로 빌린 집에서조차 “모국에서의 오랜 관성 탓인지 집주인 앞에 서자 나도 모르게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자꾸 환하게 웃게”되고, 부유하고 풍족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남편과 끊임없이 자신을 비교하면서 “세상에 주류다운 몸짓과 표정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생각하기도 한다(<숲속 작은 집>). 이혼한 아내가 새로 만나는 듯한 남자의 인스타를 염탐하면서 그의 사진에서는 “생활의 흔적이 잘 묻어나지 않는다”면서 “아무리 좋은 신발과 가방을 찍어도 은연중 드러나기 마련인 벽지와 장판, 싱크대, 이불 등 계급의 표지”(<이물감>)를 찾아보려 애쓰는 한심하고 비루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심지어 이 남자 ‘기태’는 그-‘최 대표’의 안색과 표정에서 ‘내장의 관상’까지 본다. 여기서 말하는 내장의 관상이란 ‘기태’가 “거래처의 고위 간부나 임원을 접대하며 종종 봐온 낯빛”이다. “오랜 시간 질 좋은 음식을 섭취한 이들이 뿜는 특유의 기운”이라나. “단순히 재료뿐 아니라 그 사람이 먹는 방식, 먹는 속도 등이 만들어낸 순수한 선과 빛, 분위기”라고 한다. “편안한 음식을 취한 편안한 내장들이 자아내는 표정”이며 “음식이 혀에 닿는 순간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는 찰나가 쌓인, 작은 쾌락이 축적된 얼굴”이다. 아무튼 그런 인상을 가진 이들이 있는데 ‘기태’는 그걸 자기 혼자 ‘내장의 관상’이라 불렀다.(<이물감>), 인스타에 올라간 타인의 사진을 보면서 ‘벽지와 장판, 싱크대, 이불 등’에서 계급 표지를 찾는 것으로도 모자라 내장의 관상 운운하는 장면에선 실소를 떠나 뭐랄까 불쾌한 기분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다른 단편 속 인물은 도배사가 자기 집을 방문했을 “남의 집에 자주 다니는 업자들은 대충 살림만 봐도 그 집 분위기며 사정을 안다던데, 지금 저 여자에게 우리 집은 어떻게 보일까?” 걱정하기도 한다(<빗방울처럼>). 

이런 장면, 묘사, 문장들을 내내 읽다 보니 문득 정말 사람들이 다 이렇다고?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인간은 치졸하기도 한 존재라 잠시나마 그런 비루한 마음이 들 수도 있겠지만 《안녕이라 그랬어》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의 관심사는 돈과 계급, 아파트이다. 그들은 거의 전부가 부유함과 가난함으로 타인을 평가하고 자기 또한 그렇게 평가받으리라고 단정 짓고, 그러면서 내면으로 끊임없이 이런 기준에 맞춰 살아가려 기를 쓴다. 이런 모습들을 지켜보노라니 경악스럽다 못해 진저리가 쳐친다. 대다수 한국인이 돈에 환장했고, 부유하게 보이려고 애를 쓰고, 서울에 자가 아파트, 빌딩 갖는 게 꿈이라지만 모든 인간이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소리치고 싶어진다.  

《침이 고인다》의 어느 단편에서인가 “서울이 이래도 되는 건가”라는 구절이 있다. “멀리서 보니 한없이 가난해 보이는 서울”, 노량진 학원가와 신림동 고시촌을 “지나가는” 수많은 젊은 청춘, 사회에 제대로 편입하지 못하고 주변부로 “학원 강사”와 같은 이른바 “지식인의 막장 직업”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20대의 고단한 삶이 그려지는데 이런 고단한 삶을 보고 있노라면 그 단편의 문장처럼 서울이 그들에게 “이래도 되는 건가”하는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데 《안녕이라 그랬어》를 읽노라니 “서울이 그들에게 이래도 되는 건가”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에게 이래도 되는 건가, 아니 인간이 자신에게 이래도 되는 건가, 스스로 이렇게 자멸해도 되는 건가, 다들 그렇게 살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 이렇게 한없이 낮아져도 되는 건가 싶어졌다. 

원룸을 벗어나 방 두 칸짜리 빌라로 이사를 가고 낡았지만 오래된 아파트에 살게 되고, 또 언젠가는 서울의 자가 아파트에 입성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으나 누군가의 재산의 규모를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헤아리고 또 누군가가 새 아파트로 이사 가는 것을 시기하는 치졸한 마음이라면, 그래서 내 삶이 한없이 비루해지는 마음이라면 김애란의 주인공들이 아무리 나이가 들어 서울의 자가 아파트를 갖게 될지언정, 해외로 여행을 다닐지언정 나에게는 여전히 그 마음만큼은 비루하기 짝이 없는, 가난하기 짝이 없는 그래서 가난하고 구질구질한 문학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인간의 마음이 하나같이 다 그럴까? 서울 사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이 정말 하나같이 다 그럴까? 드물지도 모르겠지만 타인의 재산에, 나의 재산 불리기에 관심 없는 이들도 존재하리라 믿는다. 그래서 그런 문학을 읽고 싶다. 《안녕이라 그랬어》를 덮으니, 언젠가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을 읽었을 때 느낀 당혹감, 그러니까 서울에서, 한국에서 노동자로 살아가는 사람들 마음이 다 이렇게 너무 계산적이고 날카롭고 이기적이기만 하다고? 아니라고 믿고 싶었던 불쾌함과 씁쓸함이 떠오르기도 한다. 지금의 대다수 한국문학은 주변을 관찰하고 그 일상을 날카롭게 포착해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은 잘할지 모르겠지만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의 어려움, 그럼에도 버티고 살아가는 자들의 숭고함에서 느껴지는 감동은 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고전을 읽는지도 모르겠다. 고전에서 인간은 세계에 번번이 패배하고, 때로는 자기 자신에게 지고 말지언정 결국 인간으로서 존엄을 회복하려고 애를 쓰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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