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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다락방
  • 침대와 침대를 오가며
  • 퍼트리샤 그레이홀
  • 18,000원 (10%1,000)
  • 2026-02-26
  • : 2,530

무척 좋아하거나(이때 좋아하는 대상은 ‘사람’이 아니다. 그 또는 그녀의 ‘글’을 뜻한다) 관심 있는 작가가 아닌 경우라면 회고록이나 그에 관한 전기라든가 일기 같은 글들을 읽지 않는다. 작가의 사생활을 굳이 알아내서 작품 감상에 방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랄까. 그럼에도 회고록, 전기, 일기 같은 것을 읽은 작가들이 종종 있다, 손택, 치버, 카버, 소세키 등등이 떠오른다. 요즘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 일기와 노트 1941-1995>를 사고 싶어서 눈독 들이고 있는 중이다(다음 달에 사자...). 아무튼 그러니까 이 정도 유명세를 지녔거나, 이 정도로 내가 그들의 작품을, 글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전기, 일기, 회고록 등은 웬만해서는 읽고 싶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 읽은 <침대와 침대를 오가며>는 위와 같은 기준에서 모두 벗어난다. 저자 ‘퍼트리샤 그레이홀’은 내가 좋아하고 관심 있는 작가라고 말할 수 없다. 그는 내게 무명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의 글을 읽은 적이 없으니까. ‘의학과 사랑 그리고 나’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의 저자에 관한 소개 글을 읽어보자. ‘의사, 에세이 작가, 소설가. 2022년 출간한 에세이 <침대와 침대를 오가며>로 다수의 독립출판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았다. 2023년 배우자와 공동 집필한 <황금빛 노년과 은빛 희망(Golden Years and Silver Lining)>을 선보이며 소설가로 데뷔했다. 2025년 <우리가 머물 곳(A Place for Us)>, 2026년 <프레임드(Framed)>를 연달아 발표하며 집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의사이자, 에세이스트. 소설가라고도 덧붙여 있기는 하지만 어쩐지 내가 그의 소설을 읽을 일은 없을 것 같다. 이 책 또한 그저 의사가 쓴 병원/환자에 관한 에세이라면 읽지 않았을 것 같다. 너무 뻔해 보이므로. 그런데 이 책에는 다른 키워드가 덧붙여져 있다. ‘레즈비언’이라는 단어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은 정신질환으로 취급받던 시대의 미국에서 살아온 퍼트리샤 그레이홀의 청년기 회고록이다. 만일 이 회고록이 그의 노년기까지 이어진다면(저자는 현재 일흔을 넘겼다), 그렇게 흥미롭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딱 저자의 청년 시절 방황이 일단락되고 또 다른 생이 펼쳐지는 지점에서 마무리 된다. 

이 책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1960년대에 레즈비언으로 산다는 것은 정신질환으로 취급받았고, 어떤 이들에게는 그 자체로 사형선고였다.”(p.19) 자신의 성정체성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사는 이들도 많아졌고 동성혼이 가능한 나라 또한 많아진 요즘이지만 그럼에도 대다수 동성애자들은 혐오 또는 차별이 일상적인 세계의 벽장 속에 숨어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여전히 동성애가 금기시 되어 발각되면 목숨까지 위태로운 나라 또한 존재한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데 단지 그 성이 동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임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청교도 국가, 1960~70년대의 미국 또한 그다지 진보한 사회는 아니었다. 게이나 레즈비언은 정신질환을 가진 자들이었고 그러므로 그들을 향한 차별과 혐오 또한 마땅했다. 그런 시대, 그런 세계에 퍼트리샤 그레이홀, 이 책의 저자는 태어난다. 
  
퍼트리샤 그레이홀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녀의 성정체성을 알고 지지해주느냐(마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그 가정처럼) 하면 그것도 아니다. 아버지는 몇 년째 깊은 우울증에 빠져 가족을 방치한 채 자기 삶을 지탱해나가기도 버거워 보인다, 어머니 혼자 퍼트리샤와 그의 여동생 두 자매를 돌보다시피 한다. 어머니는 퍼트리샤한테 여자아이다운 꾸밈을 강요하며 여성스러운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혹시라도 조금만 이상해 보이면, 정상적인 소녀다움에서 벗어난 행동이나 취향을 드러내면 어머니는 극렬하게 혐오를 드러내며 딸을 야단친다. 이런 호모포비아 가정에서 퍼트리샤는 더 고립감을 느낀다. “내가 애리조나에서는 하나뿐인 레즈비언”일 것이라는 확신을 하며…. 그 고립감을 벗어나고자 자신과 같은 성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이 많다는 곳, 샌프란시스코로 떠나리라 마음먹는다.

초반에 그려지는 퍼트리샤의 삶은 순탄하지 않다. 동성애자로서의 자각, 그럼에도 호모포비아적인 엄마(와 가족), 주변 환경 때문에 정체성을 숨기고 사느라, 이성애자인척 하느라 애쓰는 삶이 참으로 애처롭게 그려진다. 이성애자인척 하느라 좋지 않은 선택을 하기도 하는데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안타까운 마음에 탄식하고 만 장면이 있다. 그녀가 나이 든 남자에게 섹스를 허락하고 마는 장면이다. 사실 퍼트리샤는 자신에게 다가온 잘생긴 또래 남자와 연애를 해보기도 하지만(결국 그의 여동생에게 반하고 마는 퍼트리샤!) 집요하게 섹스를 원하는 남자 친구를 거부하다 관계는 끝나고 만다. 그런데 그 이후 이 중늙은이랑 섹스를 하는 것이다! 설상가상, 이 남자와의 관계 때문에 임신하고 마는 퍼트리샤. 미성년자였던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엄마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는다, ‘로 대 웨이드’ 판결 이전으로 낙태가 불법이던 시절이다. 그런 때 퍼트리샤는 임신중지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십대 소녀, 미성년자임에도 성인과의 그루밍 관계에서 성착취를 당하고, 결국 임신, 임신중지를 겪고 몸과 마음이 망가지는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처참한 심정으로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후 샌프란시스코에서 그나마 자유롭게 연애 상대를 만날 기회를 갖게 되지만 그렇다고 삶이 마냥 행복하지는 않다. 이렇다 할 직업도 돈도 거주지도 마련하지 못해 하루하루 살아가기 버겁다. 일상에 이렇게 허덕이는데 연애라고, 사랑이라고 잘 될 리가 있을까. 그럴 때 그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난다. 인간의 생에는 한두 번 쯤은, 운이 좋으면 몇 번쯤은 꼭 도움이 되는 만남이 있다. 이 무렵의 퍼트리샤에게도 그랬다. 그렇게 삶을 낭비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 공부하고 대학을 가라고 말하는 여자가 나타난 것이다. 퍼트리샤는 이 충고를 받아들여 집으로 돌아가고, 공부해서 의대에 진학한다. 의대에 진학했으니 성공적인 삶이 펼쳐질까 싶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다. 퍼트리샤가 의대에 진학한 당시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의대생 100명 중 여학생은 다섯 명이 전부이다. 보스턴에서 인턴 과정을 수련할 때는 그가 유일한 여성이다. 1970년대 의료계는 남성 중심적 위계로 움직였으며, 기득권 진입의 기회 역시 남성들이 단단히 틀어쥐고 있었다. 오랜 세월 공고하게 유지된 남성들만의 카르텔에서 여성인 그가, 심지어 동성애자인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일과 사랑 모든 면에서 만족스러운 삶을 일구기란 쉽지 않다. 

특히 의학 수련이라는 거친 바다에 내던져져 만성적인 피로와 감정 고갈을 겪으면서 소진된 나날을 보내던 퍼트리샤는 남성 동료들이 아내나 여자친구에게서 얻는 것과 같은 돌봄과 지지를 바란다. 그런 안정적인 연애를 갈망하며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중얼거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관계를 찾기란 쉽지 않다. 제2물결 페미니즘 운동과 함께(이 책에는 ‘케이트 밀렛’이 찬조 출연하기도 한다. ㅋㅋ) 성해방이 꽃을 피운 시기라 연애에서의 독점적이고 안정적인 관계에 관한 갈망이나 “아내 운운” 발언은 당시의 기조와는 어긋날 수밖에 없다. 때문에 퍼트리샤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 검열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바람이나 발언이 문제인 줄은 알지만 그럼에도 안정적인 관계에서 에너지를 얻고 싶은 것을 어찌하랴. 퍼트리샤는 일에서도, 사랑에서도 성공해서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다. 레즈비언은, 게이는, 동성애자는 일에서도 사랑에서도 실패하고 말 것이라는, 불행한 삶을 살다 혼자 쓸쓸히 죽어갈 것이라는 사회의 저주, 경고, 편견을 모두 깨버리고 싶다. 

그런데 참 재미나다. 인간이란 참으로 모순적인 존재라 드디어 그런 관계를 가꿔나갈 수 있는 여자(캐스)를 만났는데 도리어 퍼트리샤는 한눈을 팔기 시작한다. “한때 나는 배려심 있고 잘 챙겨주는 여자를 원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커리어를 치열하게 추구하는 여자, 내 눈에 섹시하고 호감 가는 여자를 원했다. 그 모든 특성을 다 가진 한 여자만 만나는 건 불가능하게 느껴졌다.”(p.266), 캐스를, 또 다른 연인을 속이며 또 때로는 대놓고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거나 일시적인 연애 관계에 놓이면서 퍼트리샤는 자신을 폴리아모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인간이란 이토록 이기적이고 비열하기조차 한 존재이다. 그렇게 침대와 침대를 오가던 퍼트리샤에게 제대로 임자가 나타난다. 그녀의 이름은 ‘다니’- 지금껏 퍼트리샤를 매혹했던 여자들과는 사뭇 다른 매력을 지닌 이 여자에게 속수무책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녀. 

헌데 ‘다니’는 퍼트리샤와 사귀게 되면서 이렇게 말한다. “동성애자는 니가 처음이야!” 레즈비언이면서도 그간 헤테로 여자만 사귀었다는 다니가 너무나도 신기한 퍼트리샤....는 다니의 그 말이 지닌 의미를 곧 깨닫는다. 동성애자 이성애자 가릴 것 없이 끌어들이는 이 마성의 여자는 정말이지 문젯거리, 위험한 존재는 사실을…. 어느덧 퍼트리샤는 독점적인 관계를 원하던 ‘캐스’의 입장이 되어 ‘다니’와 안정적인 관계를 만들어나가고 싶지만 다니는 그럴 생각이 딱히 없어 보인다. 전 여친도 만나고 새 여자도 만나고 커플 상담사도 꼬시고 그러면서도 퍼트리샤 너 없이는 못산다 하고…대환장 파티다. 퍼트리샤는 다니에게서 지나간 시절, 폴리아모리를 외쳤던 자기 자신을 마주한다. 퍼트리샤와 다니, 이 커플은 퍼트리샤의 바람처럼 안정적이고 독점적인 커플을 이룰 수 있을까? 퍼트리샤는 자신이 원하던 바로 그 ‘아내’를 얻을 수 있을까?

사람들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상대가 자신에게 많은 것을 해주기를 바란다. 인간의 속성이 그렇다. 지고지순하고 헌신적인 애정은 물론이요,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응?) 자신에게 모든 것을 바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 자신은 사랑하는 그 대상에게 그런 존재인가? 그렇게 온 마음과 에너지, 시간 등등 정성을 다해 그 상대를 사랑하는가? 이렇게 물으면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이 그렇지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퍼트리샤도 그랬을 것이다. 안정적인 관계, 따뜻한 돌봄과 끊임없는 지지와 사랑을 바라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은 그렇게 하기를 꺼리던 사람, 이기적이고 철없는 사랑의 표본과도 같았던 그녀. 그리고 때로 그 말은 폴리아모리라는 말로 정당화되기도 한다. 때문에 그 스스로도 “20대 시절의 나는 믿을 만한 사람도, 존중받을 만한 사람도 아니었고, 내가 나 자신에게 주어야 마땅할 사랑과 수용, 돌봄을 연인이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p.430)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 고백이 단지 고백으로만 끝났다면 허무했으리라. 그녀는 자신이 달라져야 한다고 깨닫는다. 그리고 그 깨달음 끝에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함께하고 싶은 그 여자가 되기로 했다.” 퍼트리샤의 이 다짐은 성공할까? 인간은 사랑에 실패했을 때 관계에 실패했을 때, 상대, 타인으로부터 문제를 찾는다. 그러나 그런 나 자신은 과연 그 또는 그녀에게 그런 사람이었는가? “나는 내가 함께하고 싶은 그 여자가 되기로 했다.”라는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사랑은 물론 삶 전반을 되돌아보게 하는 강력한 한 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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