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1
지상의 다락방
  • 바질 이야기
  •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 11,700원 (10%650)
  • 2024-10-25
  • : 930

피츠제럴드는 내게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작가이다. 나만의 <괴물들>(<괴물들-숭배와 혐오, 우리 모두의 딜레마>, 클레어 데더러, 을유문화사, 2024) 목록에 올라가 있는 작가랄까. 아내인 젤다 피츠제럴드에게 그가 결혼 후 저지른 이런저런 만행들(특히 젤다에게 우리의 이야기는 모두 자기가 쓸 소재라며 글을 쓰지 못하게 하거나, 그녀의 글을 표절한 것 등)을 떠올리면 그의 작품은 읽기 싫어진다. 이제 그만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곤 한다. 그럼에도 그의 새 작품이 소개되면 솔깃하지 않을 수 없다(특히 그게 단편이라면 더더욱). 왜냐하면 나에게 피츠제럴드는 낭만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또는 영원히 잊기 힘든 노스탤지어 같은....

《바질 이야기》를 읽는 내내 나는 피츠제럴드의 작품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바로 그 낭만과 노스탤지어의 세계에 흠뻑 빠져 취한다. 그래 당신은 젤다에게 그렇게 몹쓸 짓을 했던 사람이지만 그토록 나약하고 모순 많고 허점투성인 데다가 불완전한 인간이었기에 이런 작품, 이런 캐릭터를 창조해 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이해하게 된다. 《바질 이야기》의 ‘바질 듀크 리’는 피츠제럴드의 분신 같은 존재이다. 그의 십 대 시절의 초상화랄까. 중서부의 소도시를 벗어나 동부의 대학에 진학해 자기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크게 성공하기를 꿈꾸는 소년, 자신이 대단한 줄 알지만 주변으로부터는 때로는 냉대와 멸시를 받기도 하는 소년, 이런저런 소녀에게 한눈에 반하기 일쑤이고 그중 몇몇과는 금세 사랑에 빠져 죽을 듯이 열병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또 그만큼 금방 잊고 마는 소년. 열한 살에서 열일곱 살에 이르는 소년 바질의 성장담은 피츠제럴드의 이야기이자, 그 시절을 통과한 청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연작 모음집인 《바질 이야기》는 첫 번째 작품인 <그런 파티>를 제외하고는 모두 소년 바질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런 파티>조차도 주인공의 이름만 다를 뿐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드는 열 살 남짓 꼬마의 터질 듯한 첫사랑의 순간이 그려진다. 소년 바질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두 번째 단편인 <스캔들 탐정단>부터이다. 바질과 그의 단짝 친구 리플리는 둘 다 열네 살. 바질은 그 무렵의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인 이모진을 향한 짝사랑으로 앓는 중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모진은 휴버트에게 온 정신이 팔려 있을 뿐. 아니 이 동네 소녀들은 모두 휴버트를 사랑한다. 질투와 시기심에 타오른 바질은 휴버트를 응징하고자 계획을 세우는데 이 계획은 뜻밖의 스캔들로 번지고 만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갈색 머리의 열네 살 소년 바질, 아직은 조금 왜소하고 학교에서는 똑똑하고 게으른 소년 바질, 좋아하는 소설 속 인물이 괴도 뤼팽인 소년 바질은 그렇게 열다섯, 열여섯, 열일곱으로 성장해간다. 아직 반바지를 입기에 어린애 취급을 받는 열다섯의 바질은 긴 바지를 입고 어른이 된 척 우쭐대는 리플리에게 괜히 심통 맞게 군다<(<박람회에서의 하룻밤>). 긴바지냐 반바지냐가 중요한 바질은 아직 사랑의 쓴맛은 알지 못한 채 그저 찬란하고 역동적인 흥분에 휩싸일 뿐이다.



오랜 전통처럼 사내아이들은 어른이 된다는 개념에 집착한다. 어리다는 이유로 가해지는 제약을 이따금 푸념하면서 말이다. 반면에 소년으로 지내는 것이 마냥 좋은 시절도 오랜 기간 존재하는데, 그 만족감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표현된다. 바질은 조금만 더 나이가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더러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그에게 긴 바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박람회에서의 하룻밤>).




열다섯 살의 바질은 드디어 동부의 기숙학교로 이동 중이다(<풋내기>). 부잣집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가장 가난한 학생들 중 한 명인 바질은 예일대학교에 진학하고 위대한 풋볼 선수가 되리라 꿈꾸지만 그 꿈은 저 멀리에만 있는 것 같다. 소녀들로부터 관심은 받는 것 같은데 또래 소년들로부터는 왜 이렇게 인기가 없을까? 이토록 미움받는 이유가 얼굴에 숨어 있을까 가만히 거울을 들여다본다. 눈빛이 문제일까, 미소가 잘못됐을까. 아, 나는 자랑을 많이 하는구나! 풋볼 경기에서는 소심한 플레이를 하고, 다른 사람들의 실수를 대놓고 지적하고, 수업 시간에는 비범한 상식을 과시했지! 깨닫기도 한다.

“걔는 자기가 대단한 줄 알아” 또래들로부터 따돌림당하는 바질. 하지만 어쩌랴 바질은 정말 진심으로 자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걔는 자기가 대단한 줄 알아>). 심지어 바질은 자신을 무시하는 애들을 보며 그들 모두 언젠가는 뼈저리게 후회하리라 생각한다. ‘스물다섯 살에 미국 대통령이 되다니! 아, 그날 밤 걔한테 그렇게 못되게 굴지 말걸.’ 이렇게 후회할 것이라고. 언젠가는 위대한 인물이 되어야 하므로 바질은 제대로 된 인생을 살리라 마음먹기도 한다. “캠프네 베란다에서 미니 비블과 함께 보낸 오후, 블랙 베어 호수에서 차를 타고 돌아올 때 이모진 비슬과 함께 뒷좌석에서 저질렀던 일, 우체국 게임에서 뻗대는 코나 귀에다 억지로 했던 유치한 키스들에서부터 시작된 온갖 잡다한 접촉들. 이제 끝이다. 아내가 될 사람을 찾기 전까지는 어떤 여자에게도 키스하지 않으리라.”(<완벽한 인생>) 이렇게 결심하기도 한다.

“중요한 건, 완벽한 인생을 꾸리려는 노력이야. 어릴 때부터 시작해야 해. 절대적으로 완벽한 인생을 살려면 열한 살이나 열두 살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애늙은이처럼 말하기도 하는 바질. 이런 어린 꼰대를 보며 또래들은 혀를 차며 슬금슬금 멀어진다. 바질이 마음에 두었던 소녀마저도 ‘기분 나쁜 샌님’이라며 조롱하고 멀어져간다. 잘하려고 애쓸수록 번번이 쓰라린 굴욕만 맛보는 바질. 바질은 그렇게 ‘소년기의 한창인 열세 살과 일종의 가짜 청년인 열일곱 살 사이의 언젠가, 두 세계 사이를 끊임없이 오락가락하면서 생소한 경험들로 끊임없이 떠밀리고 어떤 대가도 치를 필요가 없던 시절로 되돌아가려 헛되이 몸부림치는 시기’를 오가면서 조금씩 성장해 간다.

열일곱의 바질은 스스로 학비를 마련하고자 좌충우돌한다(<전진하다>).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아 고학으로 예일대를 졸업하리라 단호하게 외쳤지만 어쩐지 쉽지 않아 보인다. 돈벌이보다 눈앞에 다시 나타난 천사 ‘미니 비블’의 마음을 얻는 데 온통 정신이 팔려 있다. 아니 단 한 번의 키스라도 좋다. 그렇지만 이 깜찍한 소녀는 좀처럼 바질에게만 안주하지 않는다. 비록 바질이 낭만적이고 잘생기고, 속을 헤아릴 수 없고, 조금은 우울한 남자여서 매력적으로 보일 때도 있지만, 문제는 그가 늘 그런 게 아니라 그런 때도 가끔 있다는 것. 게다가 자신에게 안달 난 남자들도 수두룩한데 굳이 왜 그녀가 바질에게만 마음을 줘야 하는가!



“알아, 하지만 그건 몇 년 전 일이야. 열세 살이나 열네 살 때는 난잡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아무렇지 않았어. 남의 말에 신경 안 썼으니까. 하지만 1년 전쯤부터는 더 나은 인생이 있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어. 정말이야, 바질. 그래서 똑바로 처신하려고 노력했어. 하지만 영영 천사는 되지 못할 거야.”


바질은 이렇게 무심하게 말하는 미니를 좀처럼 놓을 수가 없다. 예일대 입학까지 겨우 한 달밖에 남지 않았지만, 나흘 후면 미니 비블은 어떤 약속도 확신도 없이, 영원히 떠나버리리라... 아직 사춘기를 벗어나지 못한 바질은 먼 미래를 내다보다가도 어느새 눈앞의 일에 연연한다. 예일대의 영광도 미니와 보내는 그 비길 데 없는 시간에 비하면 초라해 보일 지경이다. 꽁꽁 붙잡고 싶지만 잡힐 듯 말 듯 도무지 잡히지 않는 미니를 보며 바질은 ‘생전 처음으로 나이가 더 많았으면, 감수성이 덜 예민했으면, 쉽게 감명받지 않았으면 하고 절실히 바라기도 한다. 이렇게 모든 향기와 광경과 곡조에 전율하는 대신, 심드렁하니 냉정을 지킬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무수한 어른들이 인생의 수년을 바쳤을 청춘이 과도하게 넘쳐흘러 바질은 속수무책으로 허우적거리며 한숨을 쉬듯 짧은 숨을 뱉는다.’

그러나 미니 비블 또는 한때 바질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모진 같은 소녀는 결국 한 시기를 거쳐 그의 세계에서 사라져버릴 것이다. 이모진을 잃고 난 후 일주일이 지나자 더는 슬프지 않았던 것처럼. 그녀를 만나도 예전부터 알았던 익숙한 어린 소녀로 보일 뿐이었던 것처럼. 그날 오후의 황홀했던 순간이 덧없는 봄이 남긴 감정의 찌꺼기, 조산早産 같은 것이었음을 깨달았던 것처럼. 미니와의 이 애타는 로맨스도 언젠가는 지나가리라. “누구에게나 삶은 힘겨운 싸움이며, 멀리서 보면 가끔은 화려해 보일지라도 항상 난해하고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며 조금은 슬프다는” 것을 미숙하게나마 깨달으면서 그렇게 지나가리라. 그 순간에는 상처받지만 바질은 상처를 잊지 않고, 상처를 품은 채 새로운 실패와 새로운 속죄, 미지의 운명을 향해 나아간다. 봄날 또는 여름 밤 품었던 막연하고 들뜬 열망이 그럭저럭 충족되고, 확 타올랐다가 폭발하고 재만 남았을 때, 하나의 별이 사라지고 또 다른 별을 기대하면서 삶이 그렇게 흘러간다는 것을 깨달으며 바질은 나아간다. 계속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그렇듯이.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