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작품을 완벽하게 작가의 의도대로 해석해서 받아들이는 일이 가능할까? 꼭 문학이 아니더라도 한 권의 책을 읽고 독자가 저자의 의도를 100% 이해하거나 해석해서 받아들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도 책 읽기를 좋아하는 이들은 기꺼이 그 글자의 세계로 빠져들어 난독의 어려움을 뚫고서라도 글쓴이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그가 지은 미로를 기꺼이 헤맨다. 저자와 독자 사이에 놓인 글자가 만든 미로에는 탈출구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 바로 거기서 독서의 즐거움이 탄생할지도 모른다. 입구도 출구도 모호한 글자 사이사이에 놓인 심연 속을 헤매는 것.
알랭 로브그리예의 <진>은 가히 최고의 난이도로 독자가 텍스트 사이를 헤매도록 만든다. 텍스트가 빚어낸 이 미로는 그다지 길지 않아서 어찌어찌 헤매다 가까스로 출구를 나올 수는 있다. 그런데 가까스로 출구를 나온 것 같은데 생각해 보니 그곳은 다시 입구이다. 한 번 더 그 입구를 열어보니 어라? 아까와는 또 다른 문이다. 내가 걸어왔던 길이 분명 출구로 향하는 지름길인 것 같은데, 또 다른 입구로 들어가니, 전혀 다른 미로가 펼쳐진다. 토끼굴로 들어간 앨리스가 된 듯도 하고, 미궁 라비린토스에 갇혀버린 미노타우로스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이는 로브그리예가 만든 이 미로에 갇혀 저자와 독자 사이에 놓인 그 심연의 미궁 속에서 지적 유희를 즐기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를 것이다. 그리고 또 어떤 이는 출구를 나와서도 다른 입구를 찾아보려고 기꺼이 뒤를 돌아보게 될 것이다.
<진>은 모두 8장으로 이루어진다. 애초에 이 작품은 로브그리예가 미국의 한 대학교 프랑스어 교수의 요청을 받아, 미국 대학생들을 위해 프랑스어 문법 교육용 텍스트로 쓴 <면접>에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덧붙여 새로이 펴낸 소설이다. 장을 거듭할수록 프랑스어 문법의 난이도가 점점 높아지는 형식이라고 한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야기가 반복되는 부분이 종종 있어서 아, 이거 문법 교재로도 꽤 잘 쓰였겠구나 싶어진다. 우리말로 번역된 작품을 읽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화자와 시점이 달라지기도 하기 때문에 그런 느낌은 더 강해진다. 예컨대 1장에서는 1인칭 화자가 현재시제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6~7장은 3인칭 과거 시점이었다가 1인칭 현재 시점으로 바뀌기도 하고 8장에서는 아예 화자의 성별이 달라져 1인칭 시점으로 말 한다. 원문인 프랑스어로는 더 다양한 시제가 쓰였으리라 짐작된다. 여덟 장에 걸쳐서 프랑스어의 문법 난이도가 규칙적으로 증가하고, 이야기도 문법 활용과 맞물려 전개되는 형태이다.
아,아니- 골 아프다 시점이 달라지고 시제가 달라지는 문법 교재라니! 골 아파!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이 작품은 굉장히 재미있다. 이야기 자체가 미스터리이다. 작품의 줄거리를 요약한다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한데, 그래도 큰 줄기만 말해보자면, 각각 다른 이름으로 된 여권과 100쪽 남짓한 타자 원고를 남기고 한 남자, ‘시몽 르쾨르’라는 청년이 파리의 자택에서 사라진다. 그 원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는 구인광고를 보고 어느 허름한 창고를 찾아가 보스턴 억양의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한 여성을 만난다. 그녀가 바로 ‘진’이다. 여자는 시몽에게 자신의 조직을 위해 미션을 수행해야 한다고 지시하지만 정작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뚜렷하게 밝히지 않는다. 진의 지시를 따라 임무를 수행하고자 시몽은 파리 북부역으로 향하는데 가는 길에 계속 기묘한 일이 벌어진다. 난데없이 나타난 소년을 따라갔더니 한 소녀를 만나게 되고 사고로 죽은 줄 알았던 소년이 다시 살아나기도 하고 등등 정상적인 스토리 구조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장마다 내용을 달리하면서 펼쳐진다.
진의 지령에 따라 ‘마리’와 ‘장’이라는 이름의 이 두 아이들은 시몽을 이끌고 그를 이리저리 헤매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데 대체 이 아이들은 누구이며, 진은 또 누구이며, 진이 속한 그 수상한 조직, 그리고 시몽이 맡은 임무는 과연 무엇일까 계속 책장을 넘기게 된다. 그러다가 마지막 8장과 에필로그에 이르면 아아아니! 하고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에 얼이 빠져서 다시 프롤로그부터 돌아가게 된다(이렇게 해서 프랑스어문법 공부를 학생들이 절로 익히게 하려던 것일까?!)
이 작품을 읽다 보면 로브그리예가 애초부터 독자를 텍스트라는 미로 속에 던져 놓으려고 작정한 것 같다는 인상이 든다. 그러고 나서 자신은 높은 망루에서 그 미로를 헤매는 독자들을 내려다보면서 껄껄껄 짓궂게 웃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이 책 앞날개에 있는 바로 그런 표정으로 말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진’이라는 여성 캐릭터를 신비롭게(양성적으로) 만든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이 책 표지를 장식한 인물처럼 진이라는 인물은 여성인지 남성인지 또는 마네킹인지 로봇인지 모를 모호한 캐릭터이다. 트렌치코트와 중절모, 선글라스를 착용한 인물, 그는 진일까 시몽일까? 시몽이 보기에는 진이기도 하지만, 다른 누군가가 보기에는 진이기도 하다. 또 누군가는 진이 ‘진짜 여자가 아니며, 모건 박사라는 사람이 만든, 아주 완성도 높은 전자장치에 불과하다’(118쪽)고도 한다.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그는 여성이 되기도 하고 남성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전자장치가 되기도 한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존재.

저렇게 웃기 있긔없긔!?
이 이야기 속의 텍스트들이 빚어내는 미로 또한 실체를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잇달아 발생하는 수수께끼 같은 상황들. 수수께끼에서 수수께끼로 진행하면서 해결책은 마지막에 가서야 발견하지만 그것이 정말 해답인지, 진실인지 독자는 여전히 아리송하다. 이런 현실 모두가 시몽에게는 부조리하게만 보인다. 그는 ‘모사된 현실 어딘가에 정확한 의미가 존재하리라’(76쪽) 막연하게 생각하지만 그 어디에도 정확한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몽은 ‘지나치는 장소들이나 마주치는 사람들과 관련한 가공의 이야기들을 되는대로 꾸며대느라 부단히’(108쪽) 애를 쓴다. ‘그러다가도 문득 자기도 확실하게는 잘 모르는 이상하고 복잡한 길을 택하도록 유도’(108쪽)하기도 한다. 이때의 시몽은 저 알랭 로브그리예로도 읽힌다. 누보로망의 새로운 소설쓰기를 시도했던 로브그리예, 그 자신의 생각이 시몽에게 투영된 것은 아닐까.
일찍이 로브그리예는 소설은 시대와 마찬가지로 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독자를 즐겁게 해준다거나 미적 쾌감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시도를 단념하고 소설성이란 허구를 포기해야 한다”고. 소설성이란 무엇인가? 기승전결 스토리가 있고 인물들은 그 스토리에 따라 기민하게 움직이고 변화한다. 그러나 누보로망은 기존의 소설에서 작가 자신이 창조한 세계의 바로 그 전지전능함에 대한 반기이기도 했다. 로브그리예가 보기에 그런 작품 속 작가들은 일관된 스토리 연결을 위해 인물의 심리를 조작하기도 했고 윤리나 사상으로 장식을 일삼기도 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현실이 과연 그러한가? 소설과 달리 현실은 그런 논리로만 세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승전결이기보다는 기승승승승전이거나 기승전전전이기도 하고 아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도 한다. 어떤 일이 발생하고 끝나고 나서도 인간은 아무런 의미도 발견하지 못한 채 또 다음 날을 살아가기도 한다. 현실이 언제나 드라마가 되지는 않는다. 어디에도 완벽한 현실은 존재하지 않고 인간의 불완전한 기억과 상상으로 재현될 뿐이다. 그러므로 불완전한 현실의 모사인 텍스트 또한 그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쓰는 나’와 ‘읽는 나’는 또 누구인가? 완벽하게 자기를-진실을 아는 인간이 존재하는가? 의미 부여 이전에 그저 인간도 사물도 존재할 뿐이다. 행동이나 사물이 무엇이기 이전에 존재 자체로 이미 ‘그곳’에 있기. 인간(작가)의 시선 중심의 의미 부여에 대한 반기. <진>은 그런 로브그리예의 짓궂음과 삐딱함이 절정을 이룬 작품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