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면 나는 그림을 보러 가서 그림을 보지 않았던 것 같다.
한때는 미술관에 많이 다녔고 여행을 가서도 유명한 미술관들을 둘러보며 할 수 있는 만큼 많이 예술을 눈에 담으려고 노력을 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내가 무엇을 봤던가?
교과서에 나오는 유명한 작품들을 보긴 봤는데 내가 내 눈으로 봤다는 생생한 기억은 없고 원래 알고 있던 그림의 이미지만 떠오르는 건 왜일까?
난해한 현대미술을 보면서 당황스러웠던 기억은 있는데 정확히 뭘 봤는지 떠오르지 않는 이유는 뭘까?
이게 다 내가 그림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보는 식이란 바로 이렇다. 그림을 한번 쓰윽 보고 제목을 보고 다시 그림을 쓰윽 보고 제목에 나온 게 이거구나 확인하고 다음 그림으로 넘어가서 또 같은 행동을 반복. 이렇게 한 그림 앞에서 길어야 고작 3분 정도의 시간만 할애해서 그림을 봤으니 기억이 안 나는 게 당연하다.
조금 느긋한 전시실에서는 오랫동안 한 그림 앞에 서 있어 보기도 했다. LA 현대 미술관에 갔을 때 마크 로스코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때 마침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로스코의 그림 앞에 가만히 오랫동안 서 있어 봤다. 이 장면은 내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때 그림을 보고 있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 조용한 미술관에 커다란 로스코 그림 앞에 서 있는 나, 이 공간과 이 시간을 누리고 있는 나, 그러니까 평소의 나 같지 않은 나의 모습에 취해 있었던 거다. 그러면서 로스코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나의 뒷모습을 빨리 사진 찍으라고 같이 간 언니를 닦달했었지ㅋㅋㅋㅋ
이러나저러나 결론은 나는 그동안 잘 보지 못 했다는 거다.
이 책은 ‘예술이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에서 출발한다. 난해한 현대미술 앞에서 이게 무슨 예술이란 말인가 라는 생각들을 해보지 않았나? 이 책의 저자도 우리 같은 예술 문외한들과 같은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 예술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삶이 옥죄어드는 벽같이 느껴지자 예술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단다.
저자의 할머니가 유대인 수용소 생활을 하던 와중에도 미술을 가르치고, 여든이 넘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더욱더 궁금해 졌다. 왜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하나도 중요해 보이지 않는 예술에 그토록 열정을 쏟을까?
그래서 예술을 이해해보고자 미술계에 직접 뛰어든다.
갤러리에도 취직을 하고 화가의 잡다한 일을 처리해 주는 보조로도 일을 하고 미술관에서 경비원으로 일을 하기도 한다. 틈틈이 다른 미술계 관련자들, 컬렉터들을 인터뷰하기도 하고 예술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세미나에 참석하기도 한다.
몇 년 동안 직접 발로 뛴 생생한 경험과 방대한 자료 조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로 옆에서 예술작품을 많이 아주 많이 보게 되면서 처음의 문외한의 시선으로 “이게 무슨 예술이야!” 라고 했던 불신을 벗어 던지고 열린 마음으로 예술을 즐기게 된다.
이 과정을 따라가다가 나는 반성의 시간을 가졌던 것이다. 보긴 봤는데 보지 않은 것과 같았던 그동안의 나의 미술관 관람 방식을 말이다.
저자는 미술관 경비원으로 일을 하면서 몇 시간이고 한 작품 앞을 지키고 서 있어야 했을 때 작품 속에서 계속해서 새로운 것들이 보이는 경험을 한다. 한번만 쓰윽 봤을 때는 느끼지 못 했을 작품 속의 이야기들이 진득하게 오래 바라보자 들려오기 시작했단다. 보는 사람이 얼마나 그 작품 속에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작품은 새롭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경험을 할 때는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느낌이 든단다. 시간이 그냥 흐르는 게 아니고 흥미진진한 경험으로 흐르니까 삶이 풍요로워 진다는 것이다.
더 많은 작품을 보려고 하지 말고 천천히 보면서 한 작품을 오랫동안 바라보라, 작품의 곁다리인 제목이나 작가의 이력에 대한 배경은 생각하지 말라, 그저 작품만 보면서 그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라, 작품을 보고 떠오르는 감정을 어떤 해설서의 언어가 아니라 내 언어로 표현해 보라. 멈추고, 알아채고, 감탄하라. 저자가 권하는 예술 감상법이다.
이것을 읽으면서 내 미술 감상법이 형편없었음을 반성하는 동시에 우리 집에 있는 그림 두 점이 생각났다. 내가 애기였을 때 아빠가 생활이 어려운 화가의 그림 두 점을 돕는 셈 치고 사셨다고 했다. 그 그림들은 내가 세상을 기억하는 때부터 언제나 내 옆에 있었다. 어릴 땐 뒹굴뒹굴 하면서 그림을 바라보며 잠이 들곤 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오랫동안 본 그림들이다. 지금도 벽에 걸린 그림을 보면 마음이 포근해진다. 애기 때 그림을 보면서 상상하던 이야기들도 생각나고, 그림 속에 그려진 집의 창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이 어른거려서 이 사람은 누굴까 상상하며 놀았던 시간도 기억이 난다. 만약 이 그림이 어디 전시관에 걸려 있어서 원래 하던 대로의 나의 감상법으로 한번 쓰윽 보고 지나친다면 창문에 비친 사람도 못 봤을 거고 그림 속에 꽤 여러 명의 사람이 작게 그렇지만 모두가 다른 자세로 그려져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넘어갔겠지. 그렇게 감상하면 지금 내가 이 그림에 느끼고 있는 비밀스러운 아름다움도 전혀 느낄 수 없었겠지.
그러니까 이 책의 저자의 말이 정말 맞다. 작품은 오랫동안 바라봐야 한다. 계속 보다보면 처음에 봤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르게 보이기도 하고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도 한다. 그림의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고 내가 상상해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렇게 경험하는 감정과 생각들이 시간을 채워서 삶을 살아볼 만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다. 새로운 생각, 새로 발견하는 아름다움을 예술을 통해서 우리는 채울 수 있다.
음...그래 그러니까 앞으로 미술관에 가면 그림을 오랫동안 바라보도록 노력해야겠다. 근데 사람이 너무 붐비는데도 그게 가능할까? 그래도 시도는 해 보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