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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멀리서


『나만 아는 단어』란 제목에 끌렸다. 그러니까 나만 아는, 나만 알고 싶은, 특별한 단어에 대한 이야기. 그러나 그것은 뭔가 비밀스럽지만 평범하고 모두에게 다 열린 단어였다. 작가, 시인, 번역가 10명이 각가 자신만의 다섯 단어를 소개한다. 좋아하는 작가의 글에서 이미 만난 단어, 독자라면 그 작가가 어떤 단어를 즐겨 사용하는지 알 법도 하기에 그걸 발견하는 기쁨도 누릴 수 있다. 일례로, 김화진의 주머니라든가, 정용준의 산책 같은 것이다. 그러니 작가, 시인, 번역가의 개인적인 생각을 들려주는 책이다. 그게 무엇이든 나만의 의미를 지니면 특별하게 다가온다는 걸 알기에 이 책에서 만나는 모든 단어는 그들로부터 나에게로 건너 와 나만의 것이 될 수도 있다.

모두에게 알려진 물건, 특별할 것 없는 것들이 의미를 갖는다는 건 어떤 소중한 기억이나 위로가 있을 때 가능할 것이다. 보편적으로 그렇다. 아니면 나만의 언어를 갖기 위해 특별하게 관리하게 위해 남들과 다른 이름을 붙이거나 의미를 부여한다. 사전적 의미를 떠나서 내가 이름 붙이기 나름인, 내가 사용하게 편리한 그런 단어들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목록을 보면서 끌리는 단어, 좋아하는 단어를 살펴보며 그것을 먼저 만나면 재밌는 읽기가 될 것이다.

내 경우 정용준의 소설 『유령』이나 「선릉 산책」이 떠올라서 정용준, 김화진의 소설 「사랑의 신」에서 만난 ‘주머니’란 단어가 기억나서 김화진의 단어부터 찾았다. 소설에서 사람은 주머니 같다는 김화진의 말은 뭔가 호기심을 불러오니까. 익숙한 느낌이면서 내가 모르는 의미를 만나 새로운 단어를 추가된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정작 마음을 붙잡은 건 시인이나 번역가의 단어였다. 시와 시인에 대한 알 수 없는 열망 같은 게 작용한 것이다.

시를 쓸 때마다 느끼는 사실이지만, 시 쓰기도 실은 고원을 산책하는 일 같다. 시를 쓰는 동안 어느새 도달한 고원은 시가 끝나는 동시에 서서히 흐려지다가 곧 그 고도와 넓이를 상실하고 만다. 그래서 시인은 늘 불만족 상태에 머무르며 다음 고원을 기다린다. 고원이 사라진 곳에서 다음 고원을 기다리는 동안 삶은 부질없이 흘러간다. 어떻게 하면 고원의 상태에서 좀 더 오래 머무를 수 있을까? 그것이 요즘 나의 화두다. (황유원 「고원」 중에서, 38쪽)

고원이 사라진 곳에서 다음 고원을 기다리는 동안 삶은 부질없이 흘러간다는 시인의 시간을 대변하는 것 같다고 할까. 잘 알지도 못하지만 그렇게 느껴진다. 황유원의 작품은 정확하게 읽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김선형의 번역가의 책은 읽은 기억이 있어 왠지 안도한다. 번역가의 단어를 읽으면서 원서를 읽으면 나도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을까 상상하게 된다.

어쩐지 pang은 내 안 어딘가에서, 가슴에서, 혹은 뱃속에서, 불시에 팡, 터지는 얼음 폭탄 같다. 움찔 소스라쳐 아연하는 사이, 수백만 조각으로 비산한 날카로운 얼음 파편이 혈류에 침투해 온몸으로 퍼진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미소한 얼음 조각들이 흐느끼며 녹아내린다. (김선형 「Pang (n.)」 중에서, 130쪽)

『나만 아는 단어』에서 가장 좋았던 건 번역가 정수윤의 글이다. 일본어 루리에 대한 글에서 그는 자신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릴 적 돌아가신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수윤이란 이름에 담긴 애정에 대해서. 애틋하고 애틋한 그 애정을 응원하고 응원받는다.





이름은,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어떤 존재가 언어라는 상징을 통해서 모두와 함께 약속되는 순간이다. 그 모두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존재하는 사람들이고, 나에게 이름이 붙는다는 것은 그 무한한 사람들로부터 내가 특정되는 일이다. 그들이 나의 이름을 부를 때, 그들이 내 이름의 뜻을 알든 모르든 나는 내 이름이 품고 있는 힘의 파장을 받게 된다. 나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나는 그 이름으로부터 힘을 얻는다.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기억하고, 떠올리고, 말하고, 쓰고, 부를 때마다 나는 스스로 갈고닦고자 하는 열망이 조금씩 더 해진다고 믿는다. (정수윤 「루리」 중에서, 208~209쪽)

이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주변의 사물이나, 내가 아끼는 단어에 대한 생각이나 기억이 이어진다. 내가 시집을 고를 때, 몇몇 시어에 끌린다는 것. 그건 단순히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나에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우산, 의자, 풍경이 그러하다. 종종 그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글을 쓰기도 하는데 부끄럽지만 나는 우산에 대한 이런 글이 좋다.

우산을 열다, 우산을 펴다, 우산을 접다, 우산을 개다. 말장난 같은 말들이 주르륵 따라왔다. 이처럼 열고 닫을 수 있다는 건 간편하고 편리하구나 생각했다. 그저 버튼 하나만 누르면 자동으로 열리는 우산, 마음에는 그런 버튼이 없다는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음을 여는 건 정말 어렵다고 한다. 연다는 건 문이 있다는 말인데, 그럼 문의 위치와 입구를 찾는 게 먼저다. 그렇게 찾아 연 문이 닫힌다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울까. 물론 마음의 문을 닫는 것도 그렇다. 처음부터 활짝 열린 마음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마음도 있으니까. 어렵게 열린 마음이니 그 마음을 닫는 일은 얼마나 더 어려울까. 마음에는 길도 없고 마음에는 이정표도 없고.

우산 안으로 들어와야 볼 수 있는 우산의 내부, 일정하게 자리한 우산 댓살처럼 안으로 들어와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밖에서 짐작하는 것과는 다른 것들이 많다. 그러나 함부로 예측하고 예단하면 안 된다. 그중 가장 어려운 게 마음이다. 마음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 마음 안에서 마음을 보는 일. (우산을 정리하다 쓴 글)

다시 좋았던 소설가의 소설을 펼치고 시인의 시를 찾는 일로 확장된다. 하나의 책이 다른 책으로 이어지는 기분 좋은 읽기.


어쩌면 그의 삶은 오해되고 왜곡되었는지 모른다. 아니, 우리를 속이고 있는지도 모르지. 솜씨 좋은 작가처럼 거짓을 진짜처럼 혹은 진실을 가짜처럼. 영혼은 편하게 침대에 눕혀놓고 하루종일 내 손을 잡고 유령처럼 산책하다 집에 돌아간 것일지도 모른다. 아닌가. 하지만 그럴 수도 있지. 모르는 일이니까.「선릉 산책」 중에서


사람을 상상하는 일. 겉으로 보이는 행동이 전부라고 애써 믿으면서도 그 안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보는 일. 나는 그런 걸 그만둘 수 없는 것 같아. 사람은 주머니 같다. 나는 그 안이 궁금해. 「사랑의 신」 중에서


특별하면서도 특별하지 않고 공통적이면서도 공통적이지 않은 단어의 이야기. 좋아하는 작가가 소중하게 다루는 단어를 함께 기억한다는 건 작가와 알게 모르게 연결된 기분이다. 그래서 이런 책은 지나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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