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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멀리서
  • 노 피플 존
  • 정이현
  • 16,200원 (10%900)
  • 2025-10-21
  • : 20,268

예약된 병원 검사 일정을 변경했다. 병원 고객센터의 직원이 담당 부서로 전화를 돌려주며 대기하는 시간은 꽤 길었다. 내가 원하는 날짜의 시간과 검사가 비어있는 날을 맞추는 일은 간단하지 않았다. 몇 번의 기다림 끝에 일정을 변경했다. 검사를 미루기로 결정한 이유는 내가 느끼기에 상태가 괜찮아지는 것 같았고 지난번 외래에서 만난 의사의 말이 컸다. 의사가 확실한 믿음을 주는 말을 한 건 아니다. 그가 들려준 가장 큰 믿음은 과거 외래에서 '방법이 있을 거라'는 말이다.

의사와 환자인 나 사이에는 일정한 거리가 존재한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만 상대는 허락하지 않는다. 좁혀지지 않는 어떤 일정하고도 적절함, 정이현의 단편집 『노 피플 존』을 떠올리면 그런 거리감이 떠오른다. 불편함과 편함의 거리, 친밀하면서도 냉소적인 분위기, 상대가 내민 손을 잡을까 말까 고민하는 그런. 소설의 내용과 상관없이 이런 구절이 딱 그러하다.

어떤 경우에도 나는 환자에게 괜찮을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괜찮지 않을 거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괜찮음과 괜찮지 않음 사이에서 적절하게 밸런스를 조정하는 것이 이 직업에 가장 필요한 덕목일지도 몰랐다.(「선의 감정」, 95쪽)

「선의 감정」은 코로나19를 배경으로 의사인 ‘나’가 환자의 죽음에 대해 느끼는 이야기라고 할까. 환자의 죽음이 자신의 의료 과실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책임 소재. 소설은 환자가 죽은 이유를 찾는 과정처럼 보이지만 환자의 보호자였던 딸이 ‘나’의 환자로 나타나 들려주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소설의 제목의 선(線/善)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생각하게 만든다. 병원이라는 배경을 벗어나 그것은 우리 사회 전반에 대입할 수 있으니까.

그런 감정은 「실패담 크루」에서도 느껴진다. 실패의 속상함과 아픔을 혼자가 아닌 여러 사람들과 나누는 모임 ‘실패담 말하기 크루’에서 삼십 대 변호사 ‘나’는 가장 젊은이다. 모임의 대부분은 사회적 위치가 확고한 중년의 기성 서대다. 그러니까 성공한 사람들이다. 누군가 이 소설에서 인생의 선배로 실패해도 괜찮다고, 충분히 잘 하고 있다는 말을 기대했다면 오산이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위치의 권력을 즐기고 싶을 뿐이니까. 나의 실패가 그들에게 인정받아 한 단계 높은 곳으로 이동하기를 꿈꾼다. 하지만 나의 실패담은 말 그대로 실패로 돌아간다. 이런 패배감을 조성하는 분위기는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그게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일지라도 말이다.

학과 조교로 일하며 지도 교수의 일을 대신 맡아서 하지만 그에 대한 인정은커녕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인회 언니'의 이야기인 「언니」도 마찬가지다. 대학교수와 실패담 크루의 기성 서대는 누가 봐도 강자이며 모임에서 가장 젊은이였던 나와 조교인 인회 언니는 약자다. 뛰어넘을 수 없는 계급의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사회 초년생, 그 시기에 진입한 이와 그 시기를 지나온 이에게 「실패담 크루」와 「언니」는 생생한 현장 중계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럼 학교를 졸업하고 얼마간의 이력이 쌓이거나 소위 인생의 다음 단계인 결혼을 했을 때는 조금 괜찮아질까. 자신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고 지속하게 될까.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더 확장된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들. 완벽한 해결책이 아닌 가장 무난한 답을 찾는 일도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관계의 시작부터 거부해야 할까. 모르겠다. 「빛의 한가운데」 속 아들을 키우는‘안희’와 딸을 키우는 ‘미령’은 남다른 사이다. 함께 모든 걸 나누고 우정을 키워 온 관계. 안희의 아들이 학교에서 일어난 딥페이크 성범죄의 당사자로 지목되면서 안희는 충격에 빠진다. 아무렇지 않게 아들을 두둔하는 남편을 향한 안희의 절규.

둘째를 임신하면서 육아휴직을 쓰지 않기 위해 입주 시터를 구하는 「이모에 관하여」, 놀이 가정 교사 업체에 취직해 심리적을 불안한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단 하나의 아이」에서는 돌봄에 대해 말한다. 입주 시터가 간절하지만 중국인 동포 이모의 신분이 미덥지 않다. 그녀의 이력은 충분했고 잠깐 동안 보낸 시간도 나쁘지 않았다.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하나라도 더 찾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출산과 육아로 경력 단절을 경험한 화자는 우리 주변에 너무 많고 그 모든 책임을 여성에게 돌리는 사회적 시선도 여전히 강하다.

그녀가 첫날 일터에 맨발로 온 것은 사소한 부주의에 지나지 않았다. 그 한 면을 가지고 사람 전체를 재단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재연은 자꾸자꾸 맨발에 대해 생각했다. ( 「이모에 관하여」, 285쪽)

같은 맥락으로 「단 하나의 아이」는 제목부터 상징적이다. 놀이 가정 교사가 해야 할 일은 함께 놀아주는 게 아니라 아이의 가정사에 개입하지 않으며 아이와 적절한 거리 두기가 요구된다. 「단 하나의 아이」에서 놀이 가정 교사가 된 ‘한나’는 아이 ‘하유’의 이상 행동을 발견하고 부모에게 알리지만 결과는 하유가 바쁘다는 이유로 놀이교사 일이 종료된다. 한나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맞을까. 선을 넘는 일로 치부될 게 분명하다. 어쩌면 한나가 아이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노 키즈 존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었을 때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있다. 지나치게 소란스러워서 타인에게 방해가 되는 인간이라면 그게 누구든 얼마나 어리든 또 얼마나 늙었든 자신이 있는 곳에는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노 피플 존. 나와 내 일행 외에는 아무도 없거나, 있어도 눈에 뜨지 않는 곳. 타인의 존재가 내 신경에 거슬리게 하지 않는. (「단 하나의 아이」, 157쪽)

정이현이 그려 낸 『노 피플 존』의 인물이 겪는 일은 소설로만 치부할 수 없다. 경험하지 않아 모르는 세계라고 해도 왠지 알 것 같다. 불편하다고 외면하는 문제, 개선되지 않는 제도. 우리 사회 전반의 문제라서 그냥 뻔한 보통의 일상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런 이유로 정이현은 최대한의 감정을 배제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기 위해,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말이다. 그러한 노력은 그 거리의 간극이 좁혀지기를 바라는 간절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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