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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멀리서


글을 쓴다. 빈 공간이 채워진다. 잡념으로 채워졌던 마음에 공간이 생긴다.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무언가를 잊어버리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한다. 그래서 쓰는 일은 좋고 제법 괜찮다. 크리스티앙 보뱅의 『빈 자리』 를 읽으면서 텅 빈 공간을 떠올렸다. 잠시 자리를 비운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 영영 돌아오지 않을 누군가의 부재를 채우려고 쓰는 마음. 어쩌면 그건 보뱅을 글을 빌미로 쓰고 싶은 내 마음인지도 모른다. 책 날개를 펼치고 마주하는 첫 문장(“살아갈 길이 없기에 우리는 글을 쓴다.”)에 울컥하고 말았으니까.


그러니까 이 글은 보뱅의 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 누군가를 바라보고 관찰하는 어떤 시선, 그가 머물다 떠나간 자리에서 느끼려는 온기, 사라진 이의 흔적을 찾으려는 마음, 설명할 수 없는 헛헛함을 달래기 위해 읽고 쓰는 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보뱅의 글은 아름답다. 아름다워서 감탄하고 아름다워서 슬프다. 아름다워서 헤매고 아름다워서 아프다. 그가 당신이라 부르는 이는 유일한 존재이거나 무한의 존재다. 그런 존재의 부재를 인식하고 애도하는, 상실의 모든 감정을 맑고 맑은 글로 써 내려가는 보뱅. 그가 당신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나의 당신을 기억한다.


무심하게 흐르는 하루, 닿을 수 없는 당신,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을 차분하게 부드럽게 하나의 문장으로 매만지는 보뱅. 보뱅의 글은 읽을 때마다 같은 통점으로 다가온다. 처음에는 그녀가 너무 궁금해서 정체를 찾으려 노력한다. 그의 소설 『마지막 욕망』에서 사랑하는 연인과 하나가 되기 위해 죽음을 택한 여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보뱅이 사랑한 연인인가 짐작한다. 이내 포기한다. 그가 누구든 상관없다. 보뱅의 글은 그렇다. 단 한 사람만을 위한 글이자 모두를 위한 글이니까. 모두를 만하게 만드는 능력. 그러니 그의 부재는 그가 남긴 글로 채워진다.


괴로운 마음에서 벗어나려고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마음과 멀어지려고, 그 슬픔과 떨어지려고 모니터를 켜고 자판에 손을 얹고 아무 말이 쓰려 했지만 결국 내가 쓰고 있던 건 내 마음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 순간 육체와 영혼을 지배하고 있었던 건 괴로움 마음이었다. 그제야 인정하니 오히려 쉬웠다. 왜 괴로운지, 무엇이 가장 힘든지 보였다. 그랬다. 나도 살아갈 길이 없기에 글을 쓴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그 글을 읽을 때 부끄러운 마음도 크지만 그때보다 괜찮은 나를 마주할 수 있어 반가움 마음도 크다. 상실과 부재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겼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걸 발견했다는 사실. 붙잡을 수 있었던 단 하나, 읽고 쓰는 일이 있었다는 큰 위안. 그것은 “당신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읽으며, 당신이 읽는 것은 곧 당신 자신이다.” (27쪽)란 보뱅의 문장과 맞닿아 포개질 수 있어 나는 보뱅의 글을 더 사랑할 수밖에. 나의 보잘것없는 글을 사랑할 용기가 자랄 수밖에.

그런 용기는 나를 둘러싼 주변을 살피는 마음으로 변한다. 나의 존재와 내 곁에 머무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게 만든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알게 되는 불변의 진리.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것을 내일 같은 시간에 마주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 그리하여 정말 신비로운 비밀로 가득한 게 삶이라는 걸 알게 된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결국 침묵으로 돌아가고, 붙잡은 것은 결국 손을 떠난다. 한 줌 속 맑은 물을 어찌할 수 없듯이 우리의 삶 역시 통제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벗어나 우리의 사랑을 먹고 자라는 것만을 소유할 뿐이다. 꿈속의 나무 한 그루, 침묵 속의 한 얼굴, 하늘의 빛 한 줄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머지는 모두 우리가 분노에 휩싸이는 날이나 정리하는 시간에 버리는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68쪽)


보뱅의 글을 읽으면 알 수 없는 고요가 샘솟는다. 활기차고 아름다운 소란 속에서 솟구치는 고요라고 할까. 다정하게 응시하는 눈빛, 보이지 않는 존재가 나를 감싸앉는 기분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이런 글을 쓴다. 당신에게 보뱅과의 만남을 주선하고자. 내가 받은 회복의 느낌을 전하고 싶어서.


시간은 일 속에서, 휴가 속에서, 어떤 이야기 속에서 소모된다. 시간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활동 속에서 소모된다. 그러나 어쩌면 글쓰기는 다를지도 모른다. 글쓰기는 시간을 잃는 것과 매우 가까운 일이지만, 또한 시간을 온전히 들이는 일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남아서 눅눅해진 시간을 조리하는 것이다. 그러면 매 순간은 감미로워지고 모든 문장은 축제의 밤이 된다. 글을 쓰는 동안 영혼은 길 위에 흩어진다. 길을 잃어 헤매기도, 길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그러다 단 하나의 단어가, 단 한 차례의 숨결이 흩어진 영혼을 다시 모은다. 왕의 만찬처럼 풍요로운 말, 맛의 정수를 담은 사랑의 글자. (112쪽)


『빈 자리』 를 읽으면서 캐스린 슐츠의 『상실과 발견』이 계속 생각났다. 보뱅에게 부재의 대상은 특정 지을 수 없는 존재라 할 수 있지만 아버지의 부재로 글을 시작하는 캐스린 슐츠의 책은 다르지만 비슷한 결을 지녔다. 우리 삶에서 잃어버리는 것들, 쉽게 찾을 수 있는 게 아닌 부재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존재. 그들을 향한 그리움과 사랑은 삶을 지탱하는 한 방식이다. 그것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인 글쓰기가 얼마다 훌륭한지 알게 된다. 상실과 부재 속에서 멈춘 삶이 아니라 끊임없이 발견해야 하는 사랑 속으로 나가야 한다고. 부재로 존재하는 사랑과 동시에 새롭게 발견하는 사랑.


우리는 삶의 모든 단계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상실하지만, 그 비율은 시간에 따라 고르게 나타나지 않고, 상실은 우리가 나이를 먹을수록 빈번하게, 더욱 파괴적인 내밀함으로 충격을 가한다. 그래서 우리가 나이를 먹으면서 직면하는 어려움의 유형이 달라진다. 사랑이 우리에게 처음 제기하는 문제는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이다. 한데 사랑이 꾸준하게 제기하는 문제는, 삶이 꾸준하게 제기하는 문제이기도 한데, 우리는 결국그것을 잃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다루며 살 것인가이다. (『상실과 발견』, 290~291쪽)


『빈 자리』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살아갈 길이 없기에 우리는 글을 쓰고 읽는다. 한결 가벼워진 느낌. 주렁주렁 매달려있던 무거운 감정이 조금은 사라진다. 슬픔과 상실의 본질은 그대로 존재하지만 막막했던 마음에 틈이 생긴다. 새롭게 생긴 틈을 채울 그것이 무엇이라도 괜찮다. 글쓰기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상실과 부재, 그리고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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