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과 함께 살아간다.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누군가를 잃는다.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을 수도 있지만 사람은 그럴 수 없다. 누군가의 죽음을 인식하는 순간 상실은 삶이 된다. 얼마나 크게 삶으로 파고드는지 알 수 없다. 어떤 이는 외면하고 어떤 이는 상실과 한 몸이 되기도 할 테니까.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판단할 기준은 없다.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사는 동안 잃어버린 것, 찾을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난다. 대체할 물건을 만나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대신할 이는 없다. 상실 이후의 삶은 극명하게 달라진다. 상실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아무리 애를 써도 복구할 수 없다. ‘캄보디아’에서 실종된 친구를 찾아 떠나는 예소연의 『영원에 빚을 져서』 도 그런 소설이다. 그러니까 상실에 관한 이야기다.
엄마의 장례를 치른 ‘나’는 ‘혜란’으로부터 ‘석이’의 실종 소식을 듣는다. 혜란과 석이와 나는 대학시절 캄보디아 프놈펜의 바울학교로 해외봉사활동을 다녀왔다. 4개월의 시간을 보내며 친구가 되었지만 그 이후에는 각자의 삶에 집중하며 살았다. 석이의 실종으로 10년 만에 캄보디아를 찾은 나는 그곳에서 그들이 가르쳤던 학생 ‘삐썻’을 만나 과거를 떠올린다.
소설은 석이의 실종에 관한 의문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들려준다. 바울학교에서 선생님이라 불리며 아이들을 가르치며 느꼈던 회의감, 그곳에서 마주한 세월호 사건. 나와는 상관없는 죽음이라 여겼던 일들이 어떻게 일상으로 스며드는지 생각한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저마다 달랐다. 유독 힘들어했던 석이를 혜란과 나는 몰랐다.
결국 나와 혜란의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석이의 마음과 고통을 함부로 가늠하려고 했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이해하는 것과 가늠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65쪽)
삐썻의 안내로 석이의 캄보디아 행적을 밟으며 나는 석이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한다. 세월호 참사에 이어 이태원 참사를 겪은 후 집회 같은 곳에 나가는 석이의 마음을 말이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꺼삑섬’ 물 축제 압사 사건이 있었던 곳이다.
어떤 기억을 집요하게 추적하다 보면, 그것이 정말 물성을 지닌 무엇처럼 느껴지게 된다. 생생하게 만져지는 감각, 흐르는 기류, 시시껄렁했던 나의 마음 같은 것들. 그러니까 기억을 추억하는 과정은 고통 그 자체이지만, 그 고통 너머에 존재하는 희마한 마음이 있다. 건너보는 마음, 살펴보는 마음, 그 기억을 안고 내일을 살기 위해 다짐하는 마음들. (69쪽)
아무 잘못도 없이 희생된 죽음에는 충분한 애도가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어떤 죽음은 시간이 지나도 생생하게 우리에게 말을 건다. 멈추지 않는 슬픔으로 흐른다. 석이는 슬픔을 주워 담고 그 말에 귀를 기울이며 살았고 사느라 바빴던 나와 혜란이는 슬픔을 흘려보내고 말을 듣지 못하며 살았다. 나는 이제 엄마의 죽음으로 놓쳤던 그 말을 붙잡고 슬픔에 기댄다.
상실은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수많은 상실을 겪은 채 슬퍼하는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가게 될 거고 그것은 나와 관계 맺은 이들에게까지 이어질 것이다. 엄마를 잃음으로써 내가 상실을 겪었듯, 누군가도 나를 잃음으로써 상실을 겪을 것이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 상실의 늪 속에서 깊은 슬픔과 처절한 슬픔, 가벼운 슬픔과 어찌할 수 없는 슬픔들에 둘러싸여 종국에는 축축한 비애에 목을 축이며 살아가게 되겠지.
“나는 슬픔을 믿을 거야.” (113쪽)
예소연의 『영원에 빚을 져서』은 특별한 소설이 아니다. 보편적인 일상을 담아낸 소설이며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다.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를 겪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 누군가 석이가 너무 예민하고 요란한 거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석이에게 그게 일상이다. 자신만의 고유한 일상을 지키는 일은 중요하다. 그것을 무엇으로 채우든 말이다. 그 시간에서 빠져나오라고 말할 수 없다.
슬픔은 때로 몸집을 부풀려 눈덩이처럼 커졌다가 어느 순간 녹아내리기도 할 것이다. 슬프면 슬픈 대로 목놓아 울어버리는 삶이야말로 가장 최선의 삶은 아닐까. 우리는 그렇게 상실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상실의 순간을 떠올리며 애도하고 잊지 않으려 애쓰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