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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멀리서
  • 숲노래  2025-02-12 04:04  좋아요  l (0)
  • 모든 사람은 다 다른 몸을 입고서 태어납니다. 모든 사람은 머리숱이 다르고, 머릿결이 다르고, 키와 몸무게와 얼굴과 맵시가 다릅니다. 모든 사람은 이도 다르지요.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우리나라는 겉모습에 지나치게 치우치면서 ‘다 다른 사람’이 ‘다 똑같은 겉모습’이어야 한다고 여기기 일쑤입니다. 얼굴을 꾸미거나 고쳐야 한다든지, 살을 빼거나 붙여야 한다든지, 이빨을 줄세우듯 맞춰야 한다고 여기고 맙니다.

    때로는 머리카락이나 몸이나 이를 살짝 다독일 수 있습니다만, 모든 사람이 얼굴뼈와 머리뼈가 다르기에 이도 다르게 마련인데, 그저 줄세우듯 이를 쇠줄로 친친 감아서 맞추려 하면, 오히려 나중에 뼈가 어긋나고 맙니다. 얼굴을 비롯해 몸에 자꾸 칼을 대어 고친 사람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고치고 손볼 일이 늘어납니다.

    저는 우리말꽃(국어사전)이라는 꾸러미를 쓰고 엮는 일을 하는 터라, 어느덧 서른 해째 곳곳에 ‘우리말 이야기(강의)’를 들려주러 다니기도 하고, 노래쓰기(시창작)를 들려주기도 하는데, 이웃님한테 으레 여쭙는 몇 가지 말씀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하나는 “‘맞춤말(표준어·정서법·철자법)’에 얽매이지 말라”입니다. 글쓰기를 거드는 풀그림을 쓸 적에 맞춤틀(맞춤법 검사기)을 켜는 분이 꽤 많은 줄 알지만, 맞춤틀은 아예 끄고서 글을 써야 한다고 여쭙니다. 맞춤틀을 켜고서 쓰는 글로 갇히면 ‘글다운 글’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는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글은 ‘말’을 옮깁니다. 말은 ‘마음’을 담습니다. 마음에는 우리가 저마다 스스로 짓고 가꾸고 누린 ‘삶’이 담깁니다. 그래서 “글쓰기 = 말하기 = 마음짓기 = 삶쓰기”인 얼거리입니다. 우리가 글을 쓰는 뜻이라면, “보기좋거나 반듯하거나 멋스러운 겉모습인 글”이 아닌, “내가 내 나름대로 살아내고 살아왔고 살아가려는 꿈을 그리는 이야기를 옮기는 글”이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글을 쓸 적에는 “맞춤길에 틀린 곳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내 눈으로 보고, 내 몸으로 겪고, 내 손으로 짓고, 내 발로 다니고, 이리하여 내 온마음에 고스란히 담은 이 삶을 어떻게 담느냐”를 바라볼 노릇입니다.

    맞춤틀을 켠 채 글쓰기를 할 적에는, “내 삶을 내 손끝으로 가다듬어서 옮길” 적에 자꾸자꾸 ‘띄어쓰기가 틀렸’다든지 ‘바로적기가 아니’라든지 ‘서울말(표준말)이 아닌 사투리를 쓰면 안 된’다든지 하면서 자꾸 끊기거나 바뀌곤 합니다. 이렇게 걸리고 멈추고 바뀌다 보면, 막상 “내 삶을 담는 글쓰기”를 잊거나 등지면서 “틀린 말씨가 있는지 없는지 따지는 틀”에 갇히지요. ‘글쓰기’가 아닌 ‘글만들기’로 기울어 갑니다.

    ‘정서법·철자법’은 일본에서 영어를 비롯한 먼나라 글살림을 받아들여서 배우는 동안 일본에서 지은 한자말입니다. 일본말씨입니다. 우리 글살림이 아닙니다. ‘일본옮김말씨(일본식 번역체)’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맞춤길(정서법·철자법)을 따지는 글살림을 폈어도, 고을마다 고을말이 고스란하더군요. 우리나라는 경상말과 전라말과 강원말과 충청말과 경기말과 서울말이 이제 낱말은 그냥 똑같으면서 높낮이나 밀당만 조금 다를 뿐인데, 일본은 오늘날에도 도쿄·쿄토·오사카·훗카이도·류우큐우·구마모토…… 사투리가 대단해서, 서로 말을 못 알아듣기도 합니다.

    사투리가 죽은 나라는 말과 글도 나란히 죽는다고 느낍니다. 사투리가 싱싱하게 살아숨쉬는 나라는 말과 글도 나란히 빛난다고 느낍니다. 사투리는 그냥 ‘고을말’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가고 살림하고 사랑하는 하루를 스스로 가꾸고 빚은 말씨입니다. 남을 흉내내지 않고서, 스스로 생각하고 가꾸는 마음을, 스스로 깜냥껏 엮고 빚어서 드러내는 ‘새말짓기’가 사투리입니다. 우리나라 맞춤틀은 바로 이 사투리를 깡그리 죽이거나 억누릅니다.

    그런데 이런 대목에서 그치지 않더군요. 저는 미역국을 끓일 적에 멸치나 고기를 아예 안 씁니다. 이를테면 풀밥(채식) 미역국인데, 무를 바탕으로 미역국을 끓이면 ‘무미역국’이고, 배추를 바탕으로 미역국을 끓이면 ‘배추미역국’입니다만, 맞춤틀을 켠 채 글을 쓰면 ‘무 미역국’이나 ‘배추 미역국’처럼 띄라고 붙잡지요. 맞춤틀은 우리가 새롭게 가꾸거나 짓는 모든 살림살이하고 얽힌 낱말을 고루 담지 않거나 못 합니다. 또한 맞춤틀은 다 다른 새소리와 물소리와 바람소리를 하나도 못 담거나 안 담습니다. 우리가 쓰는 한글은 온갖 새소리와 물소리와 바람소리까지 낱낱이 갈라서 담을 수 있다고 합니다만, 정작 다 다른 새소리나 물소리나 바람소리를 글로 담는 글바치는 이제 아주 보기 어렵습니다.

    참새만 하더라도 ‘짹짹’ 노래하지 않습니다. 째째째째 찌찌찌지 쮜쮜 찟 찟 찌르릉 쪼릉 찌링 짭짭 칫칫 치리치리 짜르르르릉 쪼빗쪼빗 ……처럼 끝없이 다 다르게 노래하는데, 이런 ‘참새소리’를 맞춤틀을 켠 채 쓰면 다 고치거나 지우라고 나오지요. 더욱이 ‘참새소리’나 ‘박새소리’나 ‘딱새소리’처럼 붙여쓰기를 할 수도 없는 맞춤틀입니다. ‘바람소리’도 국립국어원 낱말책에 없기 때문에 띄어쓰기를 하라고 나올 텐데, 왜 띄어야 할까요?

    글을 쓸 뜻이라면, 글로 내 마음을 담으려는 길이라면, 글로 내 삶과 살림과 사랑을 이웃하고 나누려는 하루라면, 우리는 이제 맞춤틀을 끌 일입니다. 이러면서 낱말책(사전)을 읽을 일입니다. 비록 국립국어원 낱말책이 우리 살림말을 두루 안 담았어도, 가장 수수하고 흔하다고 여길 낱말부터 찾아볼 노릇입니다.

    글쓰기를 하려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열이나 스물쯤 이를 낱말책을 늘 자리맡에 놓고서 일부러 들춰서 읽을 노릇입니다. 왜냐하면, 익숙한 말이란 있을 수 없거든요. “다 아는 말”도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말꽃을 쓰는 일을 하지만, 날마다 낱말찾기(사전 검색)를 끝없이 합니다. 아주 흔하고 수수한 ‘하다·있다·보다·가다’ 같은 낱말도 여태까지 10만이 훨씬 넘도록 다시 찾아보고 살펴보고 읽으면서 새기고, 낱말풀이를 제 나름대로 가다듬습니다. 우리말이건 한자말이건 영어이건 다 찾아볼 노릇입니다. 우리가 쓰는 글에 담는 모든 낱말을 낱낱이 낱말책에서 손으로 종이를 넘기면서 살펴보고 찾아볼 때에 글힘이 붙고 글살림이 피어납니다. 익숙하게 쓰던 말씨라고 여겨서 낱말책을 안 뒤적이는 사람은 글힘이 사라지고 글살림이 안 자라더군요.

    바로적기(표준어·정서법·철자법)가 좀 어긋나더라도 글이 엉망이거나 못날 수 없습니다. 띄어쓰기가 좀 틀리더라도 글이 엉터리라거나 어설플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바로적기와 띄어쓰기를 내려놓을 일입니다. ‘마음쓰기’와 ‘삶쓰기’를 할 일이라고 느낍니다.

    국립국어원 낱말책에 ‘신나다’라는 낱말이 2014년에 드디어 실렸습니다. 저는 2001년부터 국립국어원에 왜 ‘신나다’를 올림말로 안 싣느냐고 따졌습니다만, 열네 해 동안 “사람들이 ‘신나다’처럼 붙여쓰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올림말로 안 싣는다”는 대꾸만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왜 ‘신 나다’처럼 띄어서 쓸까요? 바로 맞춤틀 탓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입으로 말을 할 적에 “신 나요”처럼 띄어서 말하지 않습니다. “짜증 나!”처럼 띄어서 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신나!”에 “짜증나!”처럼 ‘붙여말하기’를 합니다. 다시 말씀을 여쭙니다만, 국립국어원은 2014년에 드디어 ‘신나다’를 올림말로 삼았습니다만, 2025년 오늘까지도 ‘짜증나다’는 올림말로 안 둡니다. 이밖에도 ‘쓸모없다’는 올림말로 있으나 ‘쓸모있다’는 올림말로 없습니다. 아직도 ‘아들딸’만 올림말일 뿐, ‘딸아들’은 올림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맞춤틀로 글을 쓴다면 ‘아들딸’로 적을 적에는 붙여쓰기로 두겠지만, ‘딸아들’로 적으면 맞춤틀은 ‘딸 아들’처럼 띄라고 나옵니다.

    글쓰기를 하다가 이런 작디작은 낱말에서 자꾸 멈추거나 걸린다면, 우리가 드러내거나 담거나 나누려고 하는 마음과 삶을 잊거나 놓치기 일쑤입니다. 숱한 사람들이 ‘가르치다·가리키다’를 가려쓰지 못 하더라도 그리 대수롭지는 않습니다. 두 낱말을 섞어서 쓰거나 잘못 쓰더라도 우리는 이 낱말을 쓰는 분이 무슨 말과 무슨 이야기와 무슨 마음을 나타내려고 하는지 알아듣습니다.

    저는 전라남도에 삽니다. 전남에서도 고흥이라는 시골에서 살기에 곧잘 전남말이나 고흥말이 튀어나옵니다. “그랑께요.”라든지 “거석한디요.” 같은 말을 글로 옮기면, 이런 사투리도 맞춤틀은 다 지워버리려고 합니다. “그란디 말이죠” 같은 사투리를 “그러한데 말이지요”처럼 굳이 서울말씨로 바꾸어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굳이 “우리말의 정확하고 올바른 사용”을 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말을 알맞고 즐겁게 쓰”면 넉넉합니다. “올바른 우리말 사용”이란, 우리 마음을 스스로 옥죄고 억누르고 가두는 틀이라고 느낍니다. 우리가 마음을 기울일 곳이라면 “즐겁고 신나게 우리말 노래”로 나아갈 일이지 싶습니다.

    우리는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다 다르지만 다 닮은 듯한, 이러면서도 마음으로 다가가고 다가오면서 새롭게 다룰 말씨(말씨앗)”을 물려주기에 어른스럽습니다. 이렇게 해야 맞는다든지, 저렇게 하면 틀리다고 금을 긋는 틀이 아닌, ‘마음·말·만나다·마주·맑다·물’이 얽힌 수수께끼를 들려주면서 ‘밤·밝다·밭·바탕·바다·바닥·바람·파람(휘파람)·파랑·팔·활개·팔랑·펄럭·날개’가 얽힌 말밑을 하나하나 짚고 알려줄 적에 비로소 어른답다고 봅니다.
  • 자목련  2025-02-17 11:55  좋아요  l (0)
  • 숲노래 님, 답글이 늦었습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익숙한 말과 다 아는 말도 있을 수 없다는 말씀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숲노래 님이 사시는 곳은 봄이 가까이 있을 것 같습니다.
    건강하고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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