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엔 좋은 글로 보답하고 싶다. 불가능하겠지만. 그러니까 이 말은 김소연 시인의 『생활체육과 시』가 좋은 책이라는 말이다. 얇고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책. 그 안에서 펼쳐지는 글은 쉽고 정겹다. 그러나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지 않으며 간결하고 힘 있다. 모두가 바랐을(어쩌면 일부는 바라지 않았을) 어제의 일과 앞으로 기대하는 일들을 생각하며 이런 글을 다시 읽는다. 우리가 배우고 공부했던 것들, 그것을 말하고 쓰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혐오의 말들에 대하여 글로 써보기로 했지만,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이런 주제로 집필된 책들이 어느덧 내 방 책꽂이에 빽빽하다. 읽고, 밑줄을 긋고, 이해하고, 공부해온 문장들. 그러나 실재하는 사건들, 참사들, 재난들 앞에서 나는 자주 재확인한다. 공부가 다 무슨 소용이람. 피부에 새겨진 것들이 이토록 없을 수 있다니. 앎은 간단히 휘발되고, 무지했던 신체로 무력하게 리셋된다. (32쪽)
연합은 힘을 키운다. 그 힘을 어떤 연합은 권력을 얻는 데에 쓴다. 패권이 목표다. 폭력의 말은 그에 대한 기표이다. (48쪽)
곳곳에서 연합하는 이들, 유튜브를 즐기지 않기에 어제 뉴스에 나온 유튜버의 말에 나는 심히 놀랐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걸 몰랐다. 더 알아야 할까 하다 검색하는 일은 그만두었다. 정치적인 사람이 아니지만 그래서 더 정치적인 사람이 되고 있다고 느끼는 날들이다. 『생활체육과 시』이라는 책에 대해 이야기기 해야 하는데 정치라니. 그러다 문득 우리에겐 생활정치가 필요한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아무튼 이 책은 좋다. 시도 좋고 김소연의 산문도 좋다. 작가는 이런 유행의 글(시인의 글에 의하면 시 청탁에, 산물을 사은품처럼)에서 산문을 군만두로 표현했는데 덕분에 나의 책 읽기는 풍요롭고 만족스럽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시를 읽는 독자가 많이 없다는 걸 실감하기도 했다. 나부터도 그런가 싶은 마음이 들기도. 그래서 이런 유행이 끝나기를 바라는 시인의 바람에 한편으로는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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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해 많이 말해야 할 것 같은 책이 있고 일부러 책에 대해 말을 아껴야 할 것 같은 책이 있는데 이 책은 후자의 속한다. 내 기준으로는 그렇다. 말을 아낀다는 건 그만큼 비밀스럽거나 나만 알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이기도 한데 좋은 책일수록 그렇다. 탁구 경기를 하고 테니스를 치는 김소연 시인을 상상한다. 시인들이 모여 응원하는 모습도 함께. 건전한 생활체육은 얼마나 좋은가. 이 책의 시작인 시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처럼 말이다. 공을 주고받는 사람, 소통하는 사람, 더 잘 해보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간을 가득 채운 생기 넘치는 공기.
캐치볼을 하러 가자
글러브를 하나씩 끼고 마주 보며 멀리 서 있자
공을 던지자
공을 받자
또 공을 던지고 또 공을 받자
잘 던지고 잘 받고 조금 더 잘 던지고
조금 더 잘 받자
그만하고 싶어도 조금 더 해보자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 일부)
그러면서 무언가를 견디고 아직 말하지 못했던 무언가를 쏟아낼 수 있는 용기를 보여준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었다. 그래서 시를 몰라도 반복해서 읽는다. 이런 부분을 말이다.
말해줄래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줄넘기를 이렇게 잘하게 된 이유를
신발장에서 줄넘기를 꺼내어 손에 들고 매일매일 옥상으로 올라간 이유를
팔자더블스윙을 연마한 지난주와
옆 떨쳐 모아 뛰기를 연마한 어제에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들려줄래
(중략)
우는 입을 비로소 보이고
낯선 사람들과 마주 앉았다
안녕하세요 잘 주무셨어요
인사를 건네고 오늘의 할 일을 의논하는
한가로운 여행지의 조식 시간처럼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 일부)
시은 홀연한 것이라고 말하는 시인에게 던져진 질문이 무엇일지 알지 못해도 나는 끝내 만질 수 없는 시인의 감각과 시선을 흠모한다. 1991년에 초판이 발행되고 지금은 구하지 싶지 않은 김소연 시인 말하는 ‘나만의 시집’ 이 궁금하다. 그리하여 나는 이 책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고 가까운 이에게 선물할 목록에 포함시킨다.
책을 읽는 일도 여느 경험과 마찬가지로 실패의 연속 경험을 통과하게 된다. 그래야 안목이 생긴다. 어떤 허위를 알아보는 눈이 뜨인다. “남들이 다 좋다고 하는데 나는 어째서 이것이 별로인가?”라는 질문이 그 시절의 나에게는 나의 정체성을 파악하기에 유용했다. ‘별로’라는 부정적 반응을 보이는 내 자신을 향하여 세부적인 질문들이 생겨났다. 싫어할 수밖에 없는 가치 기준이 필요했다. ‘진짜 원하는 것’을 알아채는 기준들이 태어났다. (103쪽)
이렇게 좋은 책을 만나 기쁘다. 더 많이 읽어서 나만의 안목을 키우고 싶은 소망을 품는다. 좋은 글은 좋을 글을 쓰고 싶게 만든다. 설령 좋은 글이 아니더라도 뭔가 더 쓰고 싶은 동기가 된다. 『마음사전』을 만났을 때의 마음이 떠오른다. 그 책과 더불어 곁에 두고 자주 열어보게 될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