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은 다른 책으로 연결된다.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작가가 같을 때 이런 경우가 많다. 배리 로페즈의 『호라이즌』를 읽게 된 이유가 그렇다. 『북극을 꿈꾸다』로 그를 알았지만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를 읽지 않았다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탐험하고 방문한 장소에 대한 기록과 사유를 섬세하게 그려낸 『호라이즌』은 내가 읽기에 어려운 책이었으니까. 때문에 꼼꼼하게 읽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아름다운 책이고 놀라운 책이라는 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저자 배리 로페즈는 여행자이자 탐험가이고 기록자였고 연구자였다. 그의 생은 여행하며 체험하고 읽고 쓴 시간으로 채워졌다. 55년 동안 80여 개 나라를 여행했다. 단순한 여행자가 아니라 보고 배우고 느끼고 사유한 것들을 책으로 써냈다. 『호라이즌』은 생전에 마지막 집필한 인문 에세이다. 남극과 일흔여 개 나라를 여행하고 보낸 세월을 돌아본 책이다. 그가 간 장소, 그가 본 역사적 유적지, 그가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겼다. 그러니 900페이지가 넘을 수밖에. 누군가는 이 책이 지식과 정보를 만나는 시간이 될 것이고 누군가는 한 번쯤 찾고 싶은 여행지를 꿈꾸는 시간이 될 것이고 누군가는 공간에 대한 탐구와 사유로 안내하는 문학서가 될 것이다.
책은 오리건주 서부의 파일웨더곳을 시작으로 캐나다 북극 스크릴랭섬, 아프리카 케냐, 적도 인근의 푸에르토아요라, 호주, 남극 등 세계 곳곳으로 안내한다. 고백하자면 나는 책을 읽으면서 자주 멈췄다. 인터넷으로 지명을 검색하고 역사에 기록된 탐험가를 검색하며 따라가야 했다. 그가 만난 지구의 곳곳은 고고학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이면서도 여전히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었다. 그의 글로 만나는 황홀하고 신비로운 자연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검색이나 정보로 만날 수 없는 놀라운 경이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느 장소에서든 눈에 보이는 것 작은 것에도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이며 관찰했다. 그리고 과거의 삶을 상상하며 그려보았다. 한 마리 새, 한 마리 고래, 남겨진 뼈나 집 터에서 그가 발견하려고 했던 건 무엇일까. 표면이 아닌 깊숙한 내부, 그곳에 처음 존재했던 동물과 사람의 삶의 형태가 어떻게 흘러갔을까 돌아보는 것 같았다.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며 원주민을 몰아내고 그곳의 지배하고 그곳의 모든 것을 소멸시키고 만 역사의 기록에서 놓치고 만 어떤 것을 찾아내려는 노력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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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장소들에 처음 갔을 때는 놓치는 게 많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두 번째로 갔다면 어떤 것을 받아들이든 간에, 전체적인 경험에서 전과는 다른 영향을 받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나는 다른 장소들에서 밤을 보낼 것이고, 날씨도 다를 것이며, 그 사이 내가 읽은 책들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첫 여행 이후 얻은 깨달음들과 내가 살면서 한 실패들도 분명 예전의 인식을 바꿔 놓을 터였다. 아무리 여러 차원에서 엄밀히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도, 그곳을 아무리 여러 번 여행한다고 해도, 한 사람이 한 장소를 완전히 이해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이는 장소 자체가 항상 변화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모든 장소는 그 깊은 본성상 투명하지 않고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48~49쪽)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일어난 일들을 이해해 보려 노력하고, 거기에 아직 어떤 실마리가 남아 있는지 알아보려 한다. (51쪽)
그러니 그의 가방에는 언제나 책이 있었다. 하나의 장소를 방문하기 전 그곳에 대한 기록을 찾고 함께 가는 이들(대부분 연구가, 탐험가, 과학자)과 어떤 대화를 나누고 그들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미리 세심하게 계획했다. 그의 글은 인류의 발자취를 연구하고, 인류의 현재를 살피고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다. 『호라이즌』 은 인문학, 지질학, 생물학, 지구과학, 지구 역사, 환경까지 모든 걸 수렴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간 장소에 나는 가지 못할 것이다. 단 하나의 장소에도 말이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그 장소를 꿈꿀 수는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책의 마지막 여행지로 만나는 남극 대륙에서 지구온난화, 남극에서 사라지는 것들을 생각한다. 그곳에서 운석을 수집하고 기록하는 과정은 놀랍다. 화성, 소행성대, 달에서 조각들이 남극에서 발견된다니. 그 운석 조각을 마주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 배리 로페즈의 산책을 따라 남극의 풍경을 그려본다.
남극점 기지에서 나가 산책하는 날이면 나는 남극 고원을 가로질러 한참을 걸으며 어디를 바라보든 만나게 되는 풍경의 단순함을 즐겼다. 하늘에서는 종종 햇빛이 다양한 종류의 굴절 현상을 일으켜 눈길을 사로잡는 신기한 광경을 보여주었는데, 이를테면 양쪽으로 아주 연한 분홍색과 라임색의 밝은 빛무리가 생기거나ㅡ이를 환일이라 한다ㅡ 태양과 지평선 사이에 증기로 된 유령처럼 흐릿한 빛줄기가 달의 흙을 연상시키는 회색 기둥을 만들었다.
영원히 지고 있는 태양, 눈을 밟으며 걷는 내 부츠에서 나는 뽀드득 소리, 고원의 광활한 정적 위로 내 숨소리는 주변에 있는 건물들이 어쩐지 내가 투사해낸 실체 없는 환영인 것 같다는 느낌까지 들게 했다. 그것들은 언제라도 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816~817쪽)
배리 로페즈의 생생한 글로 지구의 자연과 역사를 만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되살린 기억과 꼼꼼한 기록으로 이끈 자연 여행은 끝나지만 그가 남긴 질문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는 우리가 살아갈 지구, 앞으로 남겨질 자연에 대한 연구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그것은 아름답고 끝이 없는 추구여야 한다고.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제 인간의 안락과 이득을 위해 자연 세계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 어떻게 협력해야 언젠가 자연 세계 안에서 우리가 지배하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에게 적합한 자리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다. 나는 우리의 문화적 운명에 관해, 그리고 우리 모두가 기다리는 생물학적 운명에 관해 우리가 마침내 서로 유의미한 대화를 나룰 수 있으려면 어떤 대격변이, 혹은 더 낫게는 어떤 상상의 행위가 필요한지 종종 생각한다. (85쪽)
더 알고자 하는 욕망, 감지하고 측정하는 더 정교한 시스템을 만들고자 하는 욕망은 단순히 알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미지의 것에 대비하려는 욕망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끝이 없는 추구다. (285쪽)
여행자에게는 아름다운 안내서가 된다. 연구자와 과학자에는 정확하고 사려 깊은 교과서가 된다.그리고 나 같은 독자에게는 자연과 지구의 역사를 선물하는 그런 책이다.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닿을 수 없지만 정말 경이롭고 아름다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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