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하지 않고 학습하지 않은 삶은 바깥에 있다. 일부러 안으로 들이지 않는다면 생이 끝날 때까지 바깥에 존재한다. 자연스럽게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통로가 되는 것, 소설이 아닐까 싶다. 윌리엄 트레버의 장편소설 『운명의 꼭두각시』을 읽으면서 그랬다. 아일랜드의 역사를 잘 모르는 나는 이 소설을 통해 그것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다. 지독하게 아픈 역사의 상처와 영국과 아일랜드의 관계에 대해서. 소설은 한편으로는 역사소설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 그들의 사랑에 관한 소설로 각인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그러니까 우리의 역사를 다른 소설을 바깥에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 그 결과는 한강의 2024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이어진 건 아닐까.
윌리엄 트레버의 『운명의 꼭두각시』는 시대적 배경과 없다면 내가 느낀 것처럼 복잡하게 다가올 소설이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의 편에서 반대였던 독일군과 싸운 아일랜드가 독립을 원했지만 그것은 이뤄지지 않았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이루기 위한 아일랜드와 영국 사이의 갈등과 싸움은 계속된다. 그 과정에서 배신과 갈등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영국과 아일랜드는 서로를 적대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다. 애나 우드컴은 영국인이지만 아일랜드 남자와 결혼했다. 킬네이에서 퀸턴 가문의 안주인으로 어려움에 처한 아일랜드를 도왔다. 그런 애나 우드컴의 증손자이자 주인공인 윌리의 어머니도 영국인이었다. 그들이 사는 로크 지방은 서로 다른 종교를 존중하며 각자의 신념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그들의 평화를 지켜주지 않았다. 윌리의 개인교사인 킬개리프 신부와 가업인 제분소를 운영하던 아버지 윌리엄 퀀턴도 시대에 희생된 이들이다. 킬개리프 신부는 아일랜드의 제국주의 혐오자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아버지는 영국이 아일랜드의 독립을 막고자 파견한 왕립 경찰대 ‘블랙 앤드 텐즈’가 스파이를 처단하는 명목으로 생을 마감했다. 퀀턴 씨의 저택은 불길에 휩싸였고 집안에 있던 가족들의 죽음도 있었다. 잔인하고 끔찍했다. 남편과 두 딸을 잃은 윌리의 어머니에게 남은 생은 화염으로 무너진 저택 그 자체였다. 저택을 재건할 의지는커녕 삶을 살아가기 힘들 정도였다. 위스키에 취한 일상을 보내는 큰 딸을 윌리의 외조부모는 그냥 볼 수 없었다. 딸이 걱정되어 수차례 편지를 보내며 아일랜드를 방문하겠다 하지만 윌리의 어머니는 편지를 읽지 않는다.
그리하여 윌리의 이모가 사촌 메리엔을 데리고 퀸턴가에 오게 된다.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윌리와 메리엔의 만남 말이다. 그야말로 운명적인 만남이다. 윌리와 메리엔 사이의 사랑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시대의 불운 같은 건 잊어버리고 둘 사이의 사랑이 폐허가 된 킬네이를 다시 세우며 살아가면 좋았을 것이다. 윌리와 메리엔에 서로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은 둘 사이의 절절한 마음을 잘 보여준다. 윌리의 시선에서 들려주는 처음은 조금 복잡하고 어렵지만 메리엔의 등장으로 독자는 퀀텀가를 떠날 수 없게 된다. 소설은 윌리와 메리언, 그리고 그들의 딸인 이멜다의 관점으로 그들의 사랑과 남겨진 이들의 삶을 들려준다.
비가 내렸다. 광택이 나는 나무관 위에서 조약돌 하나가 덜그럭거렸다. 당신이 고개를 숙이고 턱을 가슴 쪽으로 세계 누르는 것을 보았다. 한두 번 당신은 얼굴에 손을 올렸다. 당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고통 같은 고뇌가 나를 사로잡았다. 당신이 간절히 원하는 위로를 해줄 수 없었고, 손을 잡을 수도, 정직하게 당신만을 위해 울 수도 없었다. 우리는 돌아서서 모두가, 비를 긋기 위해 우산을 들고, 무덤에서 멀어졌다. (194쪽)
아름다운 퀸턴가의 비극과 그곳에서 피어나는 사랑. 그러나 윌리는 사랑이 아닌 퀸턴가의 복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킬네이를 떠나야 했고 돌아올 수 없었다. 그가 떠난 킬네이엔 메리언과 딸 이멜다가 있었다. 아버지는 볼 수 없었지만 이멜다는 잘 성장했다. 하지만 운명은 이멜다를 그냥 두지 않았다. 퀸턴가의 비밀을 찾아 나서고 운명의 그늘은 이멜다를 조종한다. 노년이 돼서야 메리언과 재회한 윌리는 이멜다를 지킨다.
반쯤 탄 집이 아무리 음울해도,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아도 당신이 거기 속했으므로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그곳이었다. 내 존재의 모든 세부, 내 몸의 모든 혈관, 모든 흔적, 내 모든 친밀한 부분이 눈을 감고 쓰러지고 싶게 만든 그 부드러움으로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263~264쪽)
“내 말은, 이멜다, 일이 그렇게 된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일은 우연히 일어난단다.” (291쪽)
어렵고 힘든 소설이었다. 밖에 있던 나는 소설을 통해 아일랜드의 아픈 역사 속으로 아주 살짝 들어간 기분이다. 운명의 소용돌이에서 힘겹게 살아남은 사람들. 아름답지만 슬픈 사랑이다. 아일랜드와 영국의 아픈 역사는 물론이고 윌리와 메리언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모든 걸 포기할 수 없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굴곡진 삶을 버티고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서로를 향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그들은 사랑했고 살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