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을 산다. 내가 원하는 삶과 살아가는 삶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 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삶의 방향은 더 나은 쪽으로 두었다. 내 삶을 사느라 내 삶 밖을 둘러볼 여력이 없었다. 내 삶 밖을 생각하고 알아가는 통로는 소설이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타인의 삶을 상상하거나 그들의 고통과 아픔에 동참했다. 때로 나의 그것과 비교했다. 저마다의 삶은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김이정의 『유령의 시간』 을 읽는 일도 다르지 않았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의 삶과 그들의 삶을 생각한다. 정확하게는 소설 속 ‘지형’의 아버지 ‘이섭’의 삶이다. 이섭은 아내 미자와 1남 3녀를 둔 가장이다. 새우 양식장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미자와 나이 차가 많을 뿐 평범한 아버지다. 지형이 아버지에 대해 아는 건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다는 것 정도다. 나중에야 아버지에게 다른 아내가 있고 자식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이섭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던 것일까.
소설은 화자 지형을 통해 아버지의 시간을 천천히 들려준다. 일제강점기 일본 유학을 다녀올 정도로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이섭은 사회주의를 선택한다. 이념을 위한 삶이 아니라 가진 것을 나눠주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시대는 그를 나쁜 쪽으로 몰았다. 우선은 살기 위해 북으로 갔다. 이섭에게는 최선이었다. 하지만 다시 남을 택했다. 가족이 있으니까.
“이쪽에서 내 가족을 희생시킬 만큼 더 나은 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뿐이네. 내가 돌아가려는 곳은 가족이 있는 집일뿐이야.” (205쪽)
이섭 대신 아내가 감옥에 갈 줄은 몰랐고 어린 자식의 생사를 모르는 시간이 길게 이어졌다. 전쟁이 일어나고 이섭은 그렇게 혼자가 되었다. 가슴에 그들을 품고 미자를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세상은 이섭의 이력을 외면했다. 직장을 구하려 이력서를 낼 때마다 신원 조회에서 탈락했고 조카와 친척에게도 피해가 갔다.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할 수 없던 아버지의 삶이었다. 자신의 지난 시간을 자세히 말할 수 없었다. 부모 형제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심연 깊숙이 자리한 슬픔에 대해서 함구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는 그런 이섭의 깊은 슬픔과 무한의 고통은 아름다운 비유와 묘사로 그려낸다.
단단한 투구와 갑옷까지 거창하게 차려입은 채 온몸을 굽히고 손을 모은 자의 비굴함을 보는 것 같아 잡힌 새우를 볼 때마다 기분이 언짢아지곤 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보면서도 언짢음이 쉽게 가시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허약한 것들의 비루함이라니. 생각해보면 허약한 자신에 대한 이섭의 적의는 제법 뿌리가 깊었다. (45쪽)
가만히 누워 있으면 벽지 사이로 모래가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저 부실한 시민아파트는 이섭의 인생을 닮아 있었다. 언제 무너져내릴지 모르는 위태로운 건물에 이 순간에도 사람들이 숨차게 살고 있었다. (255쪽)
제대로 된 가장의 역할은 고사하고 자식을 지키지 못한 회한은 막내딸 지우의 죽음으로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거기다 그를 올가 맨 ‘사회안전법’까지. 이섭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려 몸부림치는 그에게 1975년 8월 15일, 해방 30년이 된 60의 나이에 자서전을 쓰기 시작한 건 유일한 숨구멍은 아닐는지.
결국 완성하지 못한 아버지의 원고가 이 소설의 시작이다. 작가가 된 지형이 남북작가대회 작가단에 참여해 북한 호텔 객실에 있는 첫 장면에서 느꼈던 알 수 없는 묵직한 슬픔의 근원이었다. 아버지가 끝내 꺼내지 못하고 그리워만 했던 아내와 자식, 지형에게는 두 오빠였던 그들에게 전하는 길고 긴 안부라고 할까. 유령이 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를 향한 애끓는 애도였다.
어쩌면 아버지는 유령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땅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못했던 유령. 마침내 하늘은 짙은 남색이 되었다. 지형은 하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초가을 강바람이 손가락 하나하나, 머리카락 한올 한 올을 쓰다듬으며 대기 속으로 사라졌다. 유령의 시간이 저물었다. (283쪽)
통렬한 아픔을 아름답게 그려 낸 가득한 김이정의 『유령의 시간』 은 사느라 지우며 잊고 지낸 아픔과 국가와 사회가 돌봐야 할 지난 시대를 추모한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가 함께 하기를 바란다. 부디 소설 속 1970년대가 아닌 2024년 현재에는 유령으로 존재하는 이가 없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담아서.
나는 나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내가 몰랐던 삶도 들여다보고 생각할 것이다. 비록 소설을 읽고 이어지는 보잘것없는 작은 시간이겠지만.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분단과 역사의 폭력에 희생된 개인의 삶을 생각하고 담아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