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1
그리하여 멀리서
  • 소설 보다 : 가을 2024
  • 권희진 외
  • 4,950원 (10%270)
  • 2024-09-09
  • : 8,801

걷기 좋은 계절이다. 걷다가 살짝 뛰면 경쾌한 리듬이 따라올 것 같은 날들이다. 동네 공원을 도는 가벼운 산책, 조금 긴 시간을 들인 등산도 좋을 것이다. 그런 걷기에 『소설 보다 : 가을 2024』를 곁들여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때마침 권희진의 단편은 「걷기의 활용」이다. 걷기란 목적지를 두지 않고 그냥 걷는다는 행위 그 자체로 좋다. 소설 속 ‘나’도 다르지 않았다. 일자리를 찾지 못한 시절 걷기는 그에게 가장 큰 일상이자 위로였다.


어쨌거나 한 반년 동안은 다른 일은 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처음에는 집 주면만 걷다가 나중에는 먼 곳까지 나가보기도 했다. 걷다 보면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앞으로 뭐 해 먹고살지로 시작한 고민은 80세 노인이 된 미래까지 갔다가 결국 다시 오늘 저녁에 뭐 먹지, 하는 생각으로 돌아왔다. (「걷기의 활용」, 25쪽)


걷기는 그런 것이다. 같은 곳을 걷다 보면 항상 같은 것들을 본다. 그리고 조금씩 변하는 걸 감지할 수 있다. 어쩌면 관계도 그런 게 아닐까. 권희진의 단편은 ‘나’와 태수 형과의 관계를 걷기에 비유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시간 가까이 지낸 둘은 일상을 공유한다. 태수 형의 연애와 사소한 농담 같은 대화. 그러다 둘은 만나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매일 걷던 익숙한 길이 걷기가 멈추면 낯선 곳이 되는 것처럼 관계도 다르지 않다. 누구의 잘못인지, 오해인지 알 수 없다. 뒤늦게 듣게 된 소식은 태수 형의 죽음이었다. ‘나’에게 걷기가 평범한 일상이자 중요한 일과였던 것처럼 태수 형이 그런 존재였다는 걸 알게 된다. 소설은 지난 관계를 떠올리며 누군가를 추억하게 만든다. 쓸쓸하지만 혼자 걷는 산책의 풍경과 겹쳐진다.


이미상의 「옮겨붙은 소망」은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소설이다. 이상하다고 하면 이상하고 아니 그게 뭐 이상한가 싶은 거다. 화자인 ‘나’는 같은 빌라에 사는 n&n’s의 쇼핑 도우미다. 처음에 나는 이 부분을 n&n’s가 쇼핑몰을 운영하는 것으로 착각해 읽었다. 다시 읽으니 그게 아니라 n&n’s가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에서 원하는 물건을 사기 위해 ‘나’를 고용한 것이었다. 쇼핑을 도와주면서 n&n’s 부부의 사정을 알게 된다. 아파트를 팔아 빌라로 이사를 오면서 일을 하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얻은 우울증, 남편의 사고사. n&n’s 는 우울과 슬픔이 가득한 분위기를 상상할 수 있지만 소설은 의외로 유머러스하다고 할까. 다시 한번 말하자면 나는 어렵고 난해했다.


정기현의 「슬픈 마음 있는 사람」속 ‘기은’도 걷는다. 걸으면서 낙서를 발견한다. 흥미로운 건 낙서가 이어지고 업데이트된다는 것이다. 김병철이란 사람을 지목해 욕을 하고 그를 향해 분노한다. 낙서를 보는 사람이라면 그 인물이 궁금해질 정도다. ‘기은’의 걷기는 교회로 향한다. 평일 교회의 모습은 평화롭고 그곳에서 만난 ‘준영’과 탁구를 치다 점점 가까워진다. 함께 산책을 하고 낙서의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기은은 혼자 걷다가 낙서를 발견하면 자신도 모르게 준영을 생각한다. 나중에야 준영이 목사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교회는 모두에게 안식처의 공간이지만 준영에게는 집이다. 준영에게는 어떤 슬픈 마음이 있는 걸까. 가장 재밌고 편하게 읽은 소설이지만 실체를 알 수 없는 여운이 남았다. 어쩌면 그것은 슬픈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기은은 자신이 비로소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이 된 것에 아늑함을 느끼면서도 슬픈 마음을 가지게 된 덕분에 슬픔 속에 한참을 머물다 자리를 떴다. (140쪽)


때로 읽기는 이해를 동반하지 않고 그냥 읽는 자로 충분할 때가 있다. 핑계 같지만 『소설 보다 : 가을 2024』 가 그랬다. 잘 몰라서 처음 들어선 길을 걷는 느낌이라고 해도 좋겠다. 처음 만난 권희진, 장기현은 소설이 그랬고 처음이 아닌 이미상의 소설도 다르지 않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