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모르는 세계를 생각한다. 이 세계가 전부라고 여겼지만 어느 순간 다른 세계가 존재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의문이 생겼다. 그 세계에 대해 더 알고자 애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유일무이하다고 확신하지 않는다. SF 소설 영향을 받았냐 묻는다면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 인간의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소통하는 존재를 상상한다.
정소연의 『앨리스와의 티타임』 은 그런 세계로의 초대다. 그러니까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공간, 이웃에 외계인이 살 수도 있는 세상, 현실과 상상을 오가는 경계, 다른 세계를 향한 열린 마음과 인정. 그 모든 것을 흥미로움과 놀라움 그 자체였다. 정소연 작가의 소설은 처음이라 찾아보니 『앨리스와의 티타임』에는 2015년에 발간된 『옆집의 영희 씨』의 복간이자 그 이후 작품을 수록한 책이다. 14편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표제작 「앨리스와의 티타임」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전부가 아닌 다른 세계가 존재하는 세계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 존재하는 나와 평행선 상에 존재하는 다른 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모른다. 화자 앨리스는 그런 세계를 방문하는 일을 한다. 그러니 이런 첫 문장은 이상하지도 낯설지도 않다.
나는 일흔네 번째 세계에서 앨리스 셸던 부인을 만났다. (「앨리스와의 티타임」, 11쪽)
어느 세계든 다를 것이 없었다. 지금까지 늘 그랬다는 생각이 가슴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나는 앤디 워홀이 없는 세계를 보았다. 피카소가 무명으로 일생을 마치는 세계를 보았다. 언제나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채웠다. (「앨리스와의 티타임」, 18~19쪽)
화자가 만난 앨리스는 화자의 세계에서 잘 알려진 소설가였다. 놀랍게도 그녀 역시 다른 세계를 여행하던 사람이었다. 아, 소름 돋는 장면이지 않는가. 우리가 모르는 세계에는 얼마나 많은 앨리스가 존재한단 말인가. 소설의 설정이라 해도 나는 이 장면에서 이 단편에서 조금 울컥하고 먹먹해졌다. 다른 세계를 여행하던 일흔네 번째 세계에서 만난 앨리스도 다른 세계 여행자였다. 그녀는 다른 세계로 가서 알츠하이머 치료법을 찾아 돌아왔다. 사랑하는 남편을 위한 일이었다. 화자가 아는 앨리스는 자살을 한 사람이었지만 말이다. 나와 같지만 나와 다른 사람, 나와 같지만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 누구라도 이 단편을 읽는다면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나를 상상하게 될 것이다. 그런 나를 마주하는 장면도 말이다.
놀랍고 흥미로운 상상은 「옆집의 영희 씨」에서도 마찬가지다. 외계인과 함께 사는 시대가 배경이다. 언젠가 그런 미래가 오지 않을까. 화자 ‘수정’은 화가자이자 미술 전담 교사다. 아무리 노력해도 도심의 오피스텔을 구할 수 없다. 하지만 옆집에 외계인이 산다는 이유로 싼값에 이사했다. 소설에서 외계인은 정부의 감시를 받는 존재이자 기이하고 징그러운 모습이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외계인을 피하지만 수정은 상관없었다. 자신을 이영희로 소개한 외계인은 수정의 집에 와서 수정의 그림을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말이 다르고 생김새가 다르지만 그저 평범한 이웃이라고 할까. 그리고 흔적도 없이 떠났다. 옆집의 영희 씨는 나름 지구에 적응하려고 노렸고 했을지도 모른다. 신문에서는 외계인을 ‘지구의 일상을 경험하러 온 그들’이라 칭한다.
애틋하면서 따뜻하고 현실적인 SF 소설이라고 할까. 그러나 잘못 들어온 세계에서 삭제당할 수도 있다는 설정의 「비거스렁이」는 SF를 빌려 청소년의 정체성에 대해 말하는 느낌이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없는 존재가 된 지영은 이름을 물으면 ‘36번 홍지영’이라고 답한다. 익숙한 일상인데 갑자기 담임 정연이 귀찮을 정도로 자신을 찾는다. 원하지 않는 호출, 상담이 불편하고 정연의 속셈이 궁금하고 화가 난다.
비슷한 삶이 존재하지 않듯이 비슷한 세계도 존재하지 않았다. 겉으론 어떻게 보든 실제로 지영에게 딱 맞는 세계는 하나뿐이었다. 지영에게 상황을 설명해서 해결될 문제라면 훨씬 편하겠지만, 다른 세계나 시공간 불일치나 하는 말을 믿어주기를 바라기도 어려울뿐더러, 자기 세계를 스스로 찾아가기란 불가능했다. 틈을 직접 들여다보고 그 세계에 어울리는 조각들을 맞춰나가는 것은 균형자만이 갖는 재능이자 업이었다. (「비거스렁이」, 58~59쪽)
그랬다. 담임 정연은 균형자였다. 잘못된 세계로 들어온 지영이 맞는 세계를 찾도록 도와주는 역할. 현실에서 정연 같은 역할을 할 이는 누구일까. 지영이 들어온 잘못된 세계에서 꺼내 그동안 힘들었을 지영을 위로하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줄 이는 존재하는가.
정소연의 소설은 이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SF다. 처음부터 존재했지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열리는 계단을 발견하고 그 통로를 통해 나아가겠다는 희망과 의지를 보여주는 「계단」, 인터넷 검열 사회(지금 우리 모습은 아닌가)에서 식물처럼 물과 햇볕으로 자라는 공유기를 발명하고 유포했다 교도소에 수감된 언니의 의지를 보여주는 「개화」는 선의로 이어지는 행동과 연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정소연의 소설은 김초엽의 소설로 연결된다. 정소연의 소설 『옆집의 영희 씨』의 을 향한 독자들의 뜨거운 복간 요청과 애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나처럼 김초엽을 먼저 만난 독자는 이제야 정소연을 만난 게 아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