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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멀리서
  • 달에 울다
  • 마루야마 겐지
  • 12,150원 (10%670)
  • 2020-12-17
  • : 308

봄 병풍에 그려진 그림은 중천에 걸려 있는 흐릿한 달, 동풍에 흔들리는 강변의 갈대, 그리고 걸식하는 법사(法師)다. 휘늘어진 버드나무 둥치에 털썩 주저앉은 법사는 달을 향해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비파를 타고 있다. (「달에 울다」, 9쪽)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 「달에 울다」의 시작이다. 달과 갈대, 법사의 모습을 묘사한 병풍. 그리고 그 병풍을 바라보는 화자는 열 살 소년이다. 강렬한 아름다운으로 잘 알려진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은 한 편의 서정시 같았고 독자를 소설 속으로 끌어당기는 힘을 지녔다. 소년이 사는 산골마을, 사과나무가 가득한 골짜기, 소년과 한 몸처럼 지내는 늙은 백구, 그리고 소년을 미혹하는 소녀 야에코.

야에코의 아버지는 촌장의 곳간을 털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붙잡혀 죽었다. 어떤 이유인지, 왜 그들은 야에코의 아버지를 죽게 만들었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가장 앞장선 이가 소년의 아버지. 하나의 사건으로 앞으로 소년과 야에코의 관계는 결정되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가 병풍의 풍경이 바뀌고 화자는 성장한다. 그러니까 계절이 달라지면 열 살 소년은 스무 살, 서른 살, 마흔이 된다. 자연이 사과를 재배하는 마을의 분위기도 달라진다. 누군가는 마을을 떠나고 누군가는 새로운 문물에 빠져든다. 오직 소년만이 부모님과 함께 그 자리, 그곳에서 사과 농사를 짓는다. 소년이 성장하면서 느끼는 감정, 사랑, 욕망은 때로 솔직하게 때로 거칠게 드러난다. 소녀 야에코를 향한 마음, 아버지에 대한 분노.


여름 병풍에 그려진 그림은 산기슭에 걸린 초승달, 천지에 무성한 초록 풀, 그리고 거지 법사다. 높다란 바위 머리에 앉은 법사는 흠집 많은 비파를 여인처럼 끌어안고 격렬하게 술대를 치며 은은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다. (「달에 울다」, 34쪽)

여름은 병풍의 모습처럼 생동감 넘친다. 스무 살의 청년도 그러하다. 야에코와의 관계는 깊어가고 부모님과의 갈등도 생긴다. 아버지를 잃은 야에코는 마을을 떠나지 않고 사과농사를 짓는다. 야에코네 사과는 달고 맛있다. 야에코와 화자는 사랑을 나누지만 결혼을 하지도 함께 마을을 떠나지도 않을 것이다.

가을 병풍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그림자 하나 없는 명월, 가을바람에 굽이치는 초원, 그리고 거지 법사다. 흠집 투성이 비파를 등에 멘 장님 법사는 회오리바람에 휘청이며 삭막한 황야를 헤매고 있다. 어디에도 사람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달에 울다」, 67쪽)

세상은 변했고 작은 산골 마을은 예전의 모습을 볼 수 없다. 마을의 최고 권력자였던 촌장도 약해졌다. 화자의 진정한 벗 백구도 죽었고 야에코의 어머니도 죽었다. 야에코와의 사랑도 끝났고 그녀는 비누 공장에 나간다. 나만 오롯이 산골 마을에 남아 사과농사를 짓는다. 야에코에게는 아이가 있고 그녀는 마을을 떠난다. 그녀를 배웅하는 건 나의 몫이다.

겨울 병풍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잘 닦인 겨울 달, 얼음과 가루눈에 갇힌 산정호수, 그리고 거지 법사다. 자신이 파낸 볼품없는 눈 동굴 속에 앉아 있는 법사는 얇은 누더기를 걸친 채 미동도 하지 않고, 낮에도 여전히 팽창을 계속하는 얼음의 비명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다. (「달에 울다」, 92쪽)

마흔 살이 된 나에게 남은 건 사과나무뿐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차례로 돌아가셨다. 혼자 남은 화자 그의 쓸쓸함이 전해진다. 마을을 떠났던 야에코는 돌아왔지만 눈 속에서 죽은 그녀를 발견한다. 상징과 은유로 채워진 소설, 인간의 심연과 고독을 병풍 속 법사의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그러니까 법사는 곧 화자인 것이다. 삶은 이처럼 허무한 것일까.

「조롱(鳥籠)을 높이 매달고」에서도 마찬가지다. 검둥이를 데리고 고향인 M 마을로 돌아온 화자는 직장을 잃었고 가족과 헤어졌다. 심지어 정신이 이상하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고향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이가 있는 건 아니다. 쇠락한 마을엔 사람이 살지 않는다. 화자는 모든 걸 버리려 그곳을 찾았지만 그 안에서 어떤 욕망과 마주한다. 홀리듯 들리는 피리새의 소리. 어린 시절 집집마다 조롱을 매달았던 기억.

어디서 나는 소리일까. 마을을 헤매다 노인을 발견한다. 너무도 잘 차려진 밥상과 피리새. 화자는 피리새를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은 노인에게서 강제로 빼앗는다. 그 노인에게 딸이 있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빨간 하이힐을 신은 딸이 노인을 돌보고 화자에게서 다시 피리새를 가져간다. 노인에게도 피리새는 중요했다. 피리새는 「달에 울다」속 사과나무 같은 존재다. 삶의 이유가 되는 존재.

생각해 보면 겁에 질려 살아온 40여 년이었다. 잃는 게 두려워 분투했음에도 나는 차례차례 잃어만 갔다. 그러나 나는 많은 것을 잃었기에 나 자신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 내 주위에는 나밖에 없다. 나는 그런 나에게 눌리어 숨이 막혔다. (「조롱(鳥籠)을 높이 매달고」, 151쪽)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묘한 전개. 환상을 통해 화자의 현실을 더욱 부각시킨다. 나약하고 무기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말이다. 빨간 하이힐의 여자를 미행하고 마을의 온천에서 노인과 마주하고 혼잣말을 하는 화자. 그가 정말로 원한 건 무엇이었을까. 아니, 마루야마 겐지가 말하고 싶었던 건 무엇일까. 채우려 해도 결국엔 공허만 남는 게 삶이라는 사실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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