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필로우북

 















조해진 소설집 <환한 숨> 수록 단편 '환한 나무 꼭대기' 밑줄 긋기

그녀는 그들을 이해했다. 재산이나 가족, 심지어 욕망도 없이 산속 운둔자로 사는 지인이란 속세의 경쟁에서 밀려나거나 패배했을 때 그 쓰라린 마음을 되비춰볼 만한 거울로 퍽 쓸모가 있을 테니까. 상대적인 박탈감을 위로받을 수 있는 영원한 타자......- P12
혜원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아니 태곳적부터 있어왔던 자연의 일부가 혜원의 몸 안에서 일시적으로 머물렀다가 덧없이 빠져나온 뒤 이제는 성물을 비추는 저 햇빛에 녹아 있는 것만 같았다.- P13
이곳에서라면 찰랑거리는 물속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듯 남은 생을 소모할 수 있겠다는 뜻밖의 기대감이 차올랐다. 그 하늘이 찬란하게 빛나든 먹구름에 잠식되든, 일정한 거리를 둔 채 그녀는 살아갈 터였다. 욕망도 후회도 없이, 아무도 원망하지 않으면서, 전체 생애에서 없어도 무관한 여분을 살 듯, 긴 휴가처럼.- P17
창밖으로 넘실거리는 여름밤에서 그녀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바람이 한 번 불어올 때마다 밤의 페이지 한 장이 넘겨지기라도 한 듯 새와 벌레들이 새롭게 울었고 나뭇잎은 조금 전과는 다른 음으로 사각거렸다. 페이지 너머 또 다른 페이지들이 이어지는 여러 겹의 밤에 둘러싸여 있다고 상상하자 보호받는 느낌이 들었다. 나쁘지 않은 안정감이었다. 아니, 평생을 찾아 헤맨 안정감이었다.- P18
노동의 감각을 기억하는데도, 그녀에게 그 2년은 시곗바늘의 최전으로 차곡차곡 증량된 실재가 아니라 질감도 형태도 없이 허공에서 흩어지는 희끄무레한 연기 같기만 했다. 절에서 나온 뒤부터는 매 순간이 생존과 연결되어 있었기에 돈을 벌지 않아도 되었던 그 시절이 더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몰랐다. 특정한 분야에서 경력을 쌓지 못한 그녀는 소규모 회사의 계약직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간병은 2,3년 단위로 반복되던 자연스러운 해고와 피로한 면접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선택한 직업이었다. 적어도 간병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일을 구할 수 있었다. - P22
그녀는 느티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혀보았다. 촘촘하게 엮인 나뭇잎 사이로 물빛에 가까운 하늘과 헐겁게 뭉친 구름이 보였다. 거대한 질항아리 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고, 그녀 자신뿐 아니라 벤치와 커피 자판기, 느티나무 모두 항아리 바깥 하늘에서 사슬 모양으로 내려오는 빛의 입자로 빚어진 침전물 같기만 했다. 하긴, 그녀나 개미나 죽음이 위성처럼 그 주위를 빙빙 돌고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정해진 운명은 똑같았다. - P22
그 사실은 때때로 그녀의 마음을 헝클었고 그런 무질서는 이내 그늘처럼 번져가기도 했다. - P24
그녀는 못이 박힌 곳까지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러나 기도의 언어는 떠오르지 않고, 그저 누구에게든 묻고 싶다는 단순한 마음뿐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두 손을 모아, 때로는 동그랗게 엎드려 기도했을 텐데, 저마다 비슷한 무게로 절박했을 그들의 염원을 고유한 것으로 구분하는 것이, 그 염원의 안쪽에 펼쳐진 개개인의 고통을 절대적으로 동정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에 대해. 그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는 없었다. 전체와 영원의 시선으로 본다면 한 사람의 염원이란 퀼트의 한 조각처럼 평균적인 일부이자 보편적인 욕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P26
끊임없이 순환하는 자연 앞에서 인간의 구도는 무의미하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그 생각은 그때껏 그녀가 절에서 찾아낸 유일한 진실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P26
그녀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의 삶에는 타인의 호기심과 애틋한 관심을 받을 만한 사연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저 허무했다. 날마다 그녀의 일부가 하수구로, 하수구의 구정물 속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으며 언젠가는 그녀의 모든 것이 그리될 거라는 비관적인 허무에서 도무지 벗어날 길이 없던 시절이었다. 절에 들어간 이유라면, 오직 그뿐이었다.- P28
외로워졌다. 외로움은 해변으로 밀려와 퇴적되는 세상의 물건들처럼 그녀의 마음 가장자리에 쌓여갔다. 외로움이 해변의 퇴적물이라면 불안감은 부둣가에 버려진, 내용을 알 수 없는 상자들 같았다. - P33
그녀는 벤치에 누웠고 느티나무 사이로 수면인 양 찰랑거리는 여름밤을 올려다봤다. 나뭇가지 무늬로 조각났지만 전체이면서 영원으로 가닿는 밤이었다. 시간이 좀더 흐르자 구름 속에 숨어 있던 꽉 찬 달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동그란 달은 이곳과 다른 세계를 이어주는 통로처럼 보였고, 덕분에 그녀는 이 세계가 끝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달빛은 나무 꼭대기부터 환하게 물들였다.
버스는 오지 않았다.- P37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