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신자들이 열성을 부리는 것도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지혜로운 사람들이 열성을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다. 신중해야 하지만 소극적이어선 안 된다.” 볼테르는 광신자가 아니라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이 말을 던졌다. 애당초 광신자들에게서는 수치심을 기대할 수 없고, 수치심을 느낄 줄 모른다면 지혜로운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 (41p).
선생은 2000년 초반 20대를 보냈던 나에게는 아직도 첫 정신적 스승같은 존재다. 몇 달 전 읽은 저자의 ‘결- 거칢에 대하여’가 나왔을 때 오랜만에 그 이름을 듣는다 생각했는데 그게 11년 만의 신작이었단다. 이 책 ‘미안함에 대하여’ 는 그 뒤를 이어 수년 간 한겨레에 실린 칼럼을 모은 책이다. 전작을 서점에서 발견하고, 이 양반 여전하시구나 생각했어서 이 책 역시 자연스럽게 찾아보게 되었다.
저자가 미안함을 느끼는 대상은 누구일까. 책은 코로나보다 더 일찍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던 죽음, 산재에 대해 말하며 시작한다.
‘불온한 나는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관심의 10분의 1 아니 100분의 1이라도 매년 2000건에
이르는 산재 사망 사고에 닿는다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오래전에 제정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바이러스 앞에서 인간의 몸은 평등하지만, 기업의 이윤 앞에서 인간의 몸은 평등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길들여졌다. (11p) (...) 하루 평균 다섯 명의 노동자가 산재로 사망하는 나라에서 김용균 씨처럼 비극적 서사가 세상에 알려지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16p)’.
반복되는 뉴스들과 서사화되지 않는 죽음들. 이런 현실이 무서운 건 우리를 이 현실에 지치게 하고 더 이상 사망 소식에 놀라지 않게 길들인다는 것이다.
‘권력은 시장에 넘어가’ 자본의 위력 앞에서 정치는 실종되었고 사회는 욕망의 포로가 되어, 이웃에 대한 상상력을 잃어갔다.' (33p)
각자도생의 사회. 사람들은 각자 고통받으며 연대하지 못한다. 이 고통은 더 약한 자들에게 뻗친다는 것이 저자의 시선이다.
‘오랫동안 국가폭력에 익숙해진 우리는 오로지 물적 조건으로 힘의 크기가 규정되는 사회에서 맘몬의 숭배자, 힘의 숭배자가 되었다. (...) 갑은 을에게 힘을 행사하고, 을은 당한 만큼 병에게 풀어내는 방식이 자리잡았다.' (56p)
늘 궁금했다. 왜 힘든 사람들이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에게 측은지심을 느끼며 같이 고민하고 연대로 나아가는 것이 어렵고, 형편이 훨씬 나은 이들을 걱정하며 동경하는지. 결국 이건 의식의 문제다. 힘의 논리에 지배당하고, 소비와 소유에 길들여진 우리의 의식.
‘20’에 속한 정치인, 연예인, 전문가가 등장하는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80’의 의식 세계는 온통 ‘20’의 것들로 채워져서 그들에게 친근감을 느낀다. 공감과 감정이입을 통한 연대는 진보의 중요한 가치다. 하지만 우리는 ‘20’의 욕망과 가치관을 가진데다 ‘80’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당연히 ‘80’에 관심을 가질 수 없고, 감정이입도 되지 않으니 연대도 불가능하다.'
이는 발달한 인터넷 환경과 맞물려 사고의 확증편향을 낳고 가중시키고 있다. 코로나 시국 이전까지 가장 큰 이슈는 혐오가 아니었나 한다. 저자는 사랑의 힘만큼이나 혐오가 가진 힘에 대해 말한다. 왜 혐오가 그토록 강한 생명력을 가지는지에 대해서.
‘혐오는 파장력이 강한 만큼 굳이 다수가 혐오감정을 갖지 않아도 된다. 혐오에 분노로 맞서지 않는 ‘착한 방관자’가 다수이기만 하면, (...)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다수이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혐오의 정치학이다. (48p) 우리는 이런 혐오의 정치가 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켜서 시민들을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결과적으로 혐오스러운 정치인이 정치를 계속 독점하게 하는 부수적 효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놓쳐선 안 된다.' (49p)
그렇다. 혐오하는 것은 쉽고, 감정이입하고 연대하는 것은 어렵다. 저자는 내내 약자들의 연대와, 약자에 대한 감정이입이 중요함을 역설한다. 강제 망명당한 난민 출신으로서 난민 문제에 대해선 각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리아 어린이 알란 쿠르디가 터키 해변에 시신으로 떠밀려온 사진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때 품었던 측은지심은, 가령 그의 아버지나 아저씨가 제주도 난민으로 들어왔을 때는 혐오감정으로 돌변하는 것인가. (...) 젠더 폭력의 오랜 피해자인 여성 대부분이 자신보다 약한 소수자인 난민에게는 남성이라는 이유로 공격적인 혐오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게 아닐까.' (56p)
읽다가 걸리던 부분이다. ‘혐오는 가진 자, 힘센 자, 다수파가 없는 자, 약한 자, 소수파에 대한 차별, 억압, 지배를 관철시키는 감정기제로서 한쪽 방향으로만 작용한다’라고 하고서 ‘가령 한국의 젊은 세대가 함께 분노를 표출하는 대신 여혐과 남혐으로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 지배 세력에겐 실로 아름다운 혐오의 정치학인 것이다’, 라고 하다니.
여성을 ‘젠더 폭력의 오랜 피해자’로 언급하면서도, 여성이 난민에게 공격적인 혐오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남성이어서라... 어떤 상황에서든 가볍게 지나가듯 이렇게 언급되서는 안될 다중의 결을 지닌, 민감한 부분이 아닌가. 만약 그렇다쳐도 다수자인 남성에게 그렇게 공격적이 된 소수자인 여성에 대해 좀더 깊게 바라보고, 그들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것이 이 책에서 내내 말하는 논리에 맞지 않을까. 여성들이 왜 인종, 빈부 격차 등 다른 차별보다 끝내 여성 해방이 가장 최전선이라고 느끼는데.
여혐은 생명으로까지 이어지는 폭력이자 공포이고 남혐은 다만 ‘기분을 얹짢게 하는 수준’ 이라는 점에서 대등하게 놓이지 않는다는 것이 지금의 교양적 상식인데, 이 책에서 미안함의 대상이라며 거듭 소수자를 언급하면서도 그 소수자로서 아이들, 성소수자, 장애인, 난민까지 언급해도 대표적 소수자인 여성은 같이 호명되지 않아 신기했다. 여성의 소수자성에 대한 이입은 부족하게 느껴졌다는 점이 어쩔 수 없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