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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알베르 카뮈의 대표작 『이방인』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저는 이번에 이 작품을 세 번째로 읽었는데도 여전히 새롭게 다가오는 대목들이 많아서 놀랐습니다.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토록 다채로웠던가 싶었습니다. 마치 『어린 왕자』를 읽을 때마다 매번 새로운 의미들을 끊임없이 더 발견하는 것 같은 그런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작가 이탈로 칼비노는 『왜 고전을 읽는가』라는 책에서 무려 14 가지에 달하는 고전의 정의를 소개한 바 있는데, 과연 『이방인』도 여러 항목에서 칼비노의 정의에 딱 어울리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이방인』을 세 번째로 읽고 난 뒤에 특히 공감했던 칼비노의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전이란, 사람들로부터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실제로 그 책을 읽었을 때 더욱 독창적이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 창의적인 것들을 발견하게 해 주는 책이다.
이와 같은 칼비노의 고전에 관한 정의가 왜 『이방인』에게 잘 어울리는가에 대해서는 차차 소개하기로 하고, 먼저 이 작품이 프랑스 문학에서 차지하는 위치부터 간략하게 살펴보고 넘어가지요. 사실 프랑스 문학에서 『이방인』이 차지하는 위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듯합니다. 갈리마르 출판사가 설립된 이후 무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방인』의 프랑스어판은 지금껏(2011년 기준) 733만부가 팔렸고, 연평균 판매부수만 하더라도 19만 부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 작품을 뛰어넘는 판매부수를 기록한 책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유일하며, 이웃나라 일본에서만 하더라도 지금까지 400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고 합니다. 전세계적으로는 지금까지 무려 101개 언어로 번역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책이 과연 얼마나 팔렸을까요? 정확한 통계수치가 발표된 게 없어 안타깝지만, 그보다 훨씬 더 안타까웠던 일은 뜬금없는 '번역 오류 논란' 때문에 이 작품을 둘러싸고 한바탕 대소동이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부조리 소설을 대표하는 『이방인』이 그야말로 문학작품으로서는 유례가 드문 부조리를 몸소 겪은 셈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작가인 알베르 카뮈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작품을 건너뛰면 작가를 설명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러면 이 작품을 구체적으로 해설하기에 앞서 작가 소개부터 간단히 살펴보고 넘어가지요.
그는1913년 알제리의 몽도비(Mondovi)에서 아홉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포도 농장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1차 대전에 참전한 직후 전사했고, 어머니는 가정부로 일하면서 어렵사리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몹시 가난하게 자란 카뮈는 다행히 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 좋은 스승들을 잇따라 만나고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알제 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지요. 거기서 그는 평생의 스승인 장 그르니에를 만나 많은 가르침을 받습니다. 카뮈는 한때 장 그르니에의 권유로 공산당에도 가입하지만 노선 갈등을 겪은 끝에 탈퇴합니다. 철학 석사학위 논문이 통과한 뒤에는 교수 자격 심사에 지원하고 싶었으나 결핵이 재발한 탓에 응시 기회조차 얻지 못합니다. 이후 중등학교 교사로 정식 발령이 나지만 고착화된 안정적 삶에 얽매이기 싫어 스스로 포기하고 진보 일간지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합니다.
알베르 카뮈는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에 『이방인』을 발표하면서 이름을 널리 알립니다. 같은 해엔 『이방인』과 깊은 연관을 지닌 에세이 《시지프 신화》를 출간하여 철학적 작가로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극작가 겸 연출가 겸 연극배우로도 활동했던 그는 《오해》, 《칼리굴라》 등의 희곡을 발표했고, 1947년에는 오랜 시간 매달렸던 작품 《페스트》를 출간해 즉각적인 선풍을 일으켰습니다. 1957년에 카뮈는 불과 마흔네 살의 젊은 나이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 프랑스인으로서는 최연소이자 아홉 번째 수상자였습니다. 작가로서는 창창한 나이에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던 그는 노벨상을 탄 지 불과 3년도 지나지 않아 불의의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알베르 카뮈 작품에서 늘 따라다닌 평생의 화두가 죽음이었는데 정작 작가 자신이 너무나도 어이없는 죽음을 맞고 말았던 셈이었습니다. 그가 너무 일찍 노벨상을 타지만 않았어도, 거액의 상금으로 프로방스 지방의 루르마랭에 근사한 주택을 사지만 않았어도, 사고 전날 친구가 찾아와 기차 대신 자동차로 이동하자는 권유에 응하지만 않았어도, 카뮈는 어쩌면 80년대 혹은 90년대까지도 여전히 살아남아 지금보다 훨씬 더 오래도록 우리 곁에 남아있었을 지도 모를 인물이었습니다.
작가 소개는 이 정도로 하고 이제부터는 이 작품이 탄생한 배경을 살펴보지요. 그는 1957년 스톡홀롬에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기념 연설에서도 자세히 밝혔듯이, 20대의 젊은 나이에 이미 자신만의 원대한 작품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 가지 층위에서 작품을 구상했는데, 첫 번째로는 부정(否定)을 표현하는 세 가지 형식이었고, 소설로는 『이방인』 , 극으로는 『칼리굴라』와 『오해』, 사상적으로는 『시지프 신화』였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긍정을 표현하는 세 가지 형식으로, 소설로는 『페스트』, 극으로는 『계엄령』, 『정의의 사람들』, 사상적으로는 『반항하는 인간』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부정(부조리), 긍정(반항), 사랑의 발전 단계를 전제로 작품 체계를 구상한 걸 보면 발자크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너무 많은 작품을 쓰다가 과로사로 일찍 사망한 그 작가는 "나폴레옹이 칼로 할 수 없었던 것을 나는 펜으로 정복하겠다."면서 『인간 희극』을 통해 19세기 프랑스의 사회상을 거대한 벽화로 남기고자 했던 인물이었지요. 그처럼 알베르 카뮈도 문학에 대한 포부가 대단했던 작가였습니다.



카뮈가 20대 중반에 일찌감치 삶의 부정적인 측면인 부조리에 대한 소설과 에세이를 구상하게 된 건 그의 삶과도 깊은 연관이 있었습니다. 스무 살에 너무 일찍 결혼했다가 파혼한 일, 공산당원에서 제명된 일, 결핵의 재발로 대학교수 자격시험에 응시하지 못한 일, 폐결핵 치료와 요양을 위해 프랑스의 고산 지대인 앙브렁에 체류하면서 겪은 고독 등등이 그로 하여금 일반적인 삶과 무관한 존재, 즉 이방인의 느낌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결혼, 출세 등" 세상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삶과 "무관한" 당시의 작가 모습이야말로 『이방인』 속의 주인공 뫼르소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소설 속에서 뫼르소는 파리 출장소로 가서 일할 생각이 없느냐는 사장의 물음에 별 고민도 없이 단박에 거절하지요. "사실 이러나저러나 내게는 마찬가지"며 "삶이란 결코 달라지는 게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지요.
『이방인』의 탄생 과정
카뮈의 『이방인』은 지극히 간결한 문체로 쓰여진 소설의 첫 문장이 너무나 인상 깊은 작품이지요.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뜻이 없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가장 말이 적은 절제된 톤이야말로 『이방인』을 상징하는 중요한 문학 장치인데, 카뮈 소설 미학의 핵심을 이루는  생각들이 작가 나이 불과 스물다섯 살이던 1938년에 쓰여진 작가노트에서 일찌감치 발견됩니다.
진정한 예술 작품은 가장 말이 적은 작품이다. 한 예술가의 총체적 경험, 그의 생각 + 삶과 그의 경험을 반영하는 작품 사이에는 일정한 관계가 있다. 예술작품이 그 경험을 문학적 장식으로 포장하여 모조리 다 보여 준다면 그 관계는 좋지 못한 것이다. 예술 작품이 경험 속에서 다듬어 낸 어떤 부분, 내적인 광채가 제한되지 않은 채 요약되는 다이아몬드의 면 같은 것일 때 그 관계는 좋은 것이다.
이리하여 카뮈를 상징하는 이 작품은 심리 분석이나 설명은 피하고 오직 겉으로 보이는 구체적인 대상들만을 묘사하는 중성적인 톤, 문장과 문장 사이에 가로놓인 침묵 등을 통해 "겉보기에 아무 의식이 없는 한 인간"을 가장 적게 말하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가장 많은 말을 하는 인물로 느끼게 만듭니다.



한편, 소설의 제목이 된 '이방인'은 1940년의 작가 노트에서 발견됩니다.
"나는 이곳 사람이 아니다. ㅡ 다른 곳 사람도 아니다. 그리고 세계는 내 마음이 기댈 곳을 찾지 못하는 알지 못할 풍경에 불과하다. …… 이방인. 내게 모든 것이 낯설다는 것을 고백할 것."



가난한 신문사의 젊은 기자, 극단의 연극 배우, 문학 지망생이자 철학도, 그러면서도 수시로 직장을 잃고 마는 카뮈는 자신이 문득 낯선 세계에 던져진 이방인 같은 심경을 느꼈고, 그와 동시에 이 세상이 부조리하다는 사실도 더 자주 느꼈습니다. 이방인의 부조리한 존재 방식! 이걸 최대한으로 '적게 말하는' 표현 방식으로 창조하느냐가 카뮈에게 보다 분명하게 감지될 무렵, 실업자 신세였던 카뮈에게 <파리 수아르> 편집 사원 자리가 났다는 연락이 왔고, 햇빛 찬란한 알제리의 바닷가로부터 음울한 잿빛 도시 파리로 '던져진' 카뮈는 끔찍한 고독을 느끼며 말 그대로 이방인이 되고 맙니다. 카뮈는 파리의 허름한 호텔들을 전전하면서 낮에는 편집 일을 하고 밤에는 '침묵과 고독' 속에서 소설 집필에  매달린 끝에 불과 두 달만에 『이방인』 쓰기를 끝내고, 그때부터 곧바로 에세이를 쓰는 일에 착수합니다. 카뮈의 부조리 문학의 또다른 한 축을 이루는 『시지프 신화』가 쓰여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시지프 신화』는 왜 『이방인』과 짝을 이루는가
작가는 일찍부터 삶에 대한 기쁨과 동시에 어둡고 비극적인 면을 뚜렷하게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삶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는 삶의 절망적이고 부조리한 면을 떨치지 못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답하려는 시도가 담긴 책이 바로 『시지프 신화』였습니다.
무대장치들이 문득 붕괴되는 일이 있다. 아침에 기상, 전차를 타고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왜?' 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 『시지프 신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보다는 『오뒷세이아』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된 시지프(그리스어 시쉬포스)는 인간들 중에서 가장 꾀가 많은 인물인데, 오뒷세우스의 친부일 가능성이 있는 인물로도 자주 묘사됩니다. 그는 제우스가 독수리로 변해 요정 아이기나를 데려가는 걸 엿보고 있다가 코린토스 성채에 맑은 샘물이 솟아나게 해주는 조건으로 그녀의 아버지인 하신 아소포스에게 고해바칩니다. 이때문에 제우스가 화가 나서 그에게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보냈으나 시지프는 도리어 죽음의 신을 동굴에 가둬버려 한때 죽는 이가 없었다고 하지요. 나중에 죽음의 신이 풀려나 그에게 다시 찾아가자 그는 아내 메로페에게 자기 시신을 묻지도 말고 장례를 치르지 말라고 일러놓고 저승에 가서 또다시 꾀를 냅니다. 아내를 벌주고 자기 자신을 매장하게 한 뒤 다시 돌아오겠다며 저승의 신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를 속이고는 지상으로 되돌아옵니다. 이승에서 다시 살만큼 살다가 헤르메스가 그를 저승으로 데려가자 마침내 그는 지하 세계에 영원히 머물면서 무거운 돌덩이를 산꼭대기로 영원히 굴려 올리는 끔찍한 형벌을 받게 되지요.



이토록 부조리한 형벌을 받는 시지프를 바라보는 카뮈의 시선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는 시지프를 도리어 영웅으로 바라봅니다. 신들에 대한 멸시, 죽음에 대한 증오, 그리고 삶에 대한 열정 때문에 형용할 수 없는 형벌을 받았지만 그것이야말로 이 땅에 대한 정열을 위해 지불해야 할 댓가라는 게 카뮈의 생각이었습니다. 
경련하는 얼굴, 바위에 밀착한 뺨, 진흙에 덮인 돌덩어리를 떠받치는 어깨와 그것을 고여 버티는 한쪽 다리, 돌을 되받아 안은 팔끝, 흙투성이가 된 두 손 등 온통 인간적인 확신이 보인다. 하늘 없는 공간과 깊이 없는 시간으로나 헤아릴 수 있는 이 기나긴 노력 끝에 목표는 달성된다. 그때 시지프는 돌이 순식간에 저 아래 세계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그 아래로부터 정점을 향해 이제 다시 돌을 끌어올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는 또다시 들판으로 내려간다. - 『시지프 신화』
카뮈는 시지프 신화의 주인공이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에 비극적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성공의 희망이 그를 떠받쳐준다면 무엇 때문에 그가 고통스러워하겠는가! 오늘날의 노동자는 그 생애의 그날 그날을 똑같은 일에 종사하며 산다. 그 운명도 시지프 못지않게 부조리하다. 그러나 운명은 오직 의식이 깨어 있는 드문 순간들에 있어서만 비극적이다. …… 멸시로 응수하여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시지프 신화』



이처럼 카뮈는 우리의 삶이 시지프 못지 않게 부조리하지만, 그 사실을 의식조차 하지 못하며 살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의식이 깨어 있는 드문 순간은 도리어 비극적이 되고 마는데, 이런 운명은 오이디푸스 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영문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는 자신이 그토록 불행한 인간인 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그가 알게 되는 순간부터 엄청난 비극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를 끝내 긍정하는데, 그가 신들을 부정하며 바위를 들어올리는 한 차원 높은 성실성을 가르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속에 그려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카뮈의 말 속에는 부조리에 반항하는 인간 정신에 대한 긍정이 가득 담겨있습니다.



카뮈와 죽음
카뮈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언제나 '죽음'이었습니다. 소설『이방인』도 죽음에서 시작하여 죽음으로 끝나는데,『이방인』에 담긴 죽음은 세 가지 형식으로 구분됩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로 시작된 자연적인 죽음, 주인공 뫼르소가 저지른 뜬금없는 살인, 가해자가 재판 끝에 사형선고를 받고 기다리는 죽음이 그것입니다. 도대체 카뮈는 왜 이토록 '죽음'에 진지하게 매달리는 것일까요? 그것은 죽음을 이야기하다 보면 결국 삶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에 닿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첫 번째 어머니의 죽음은 사회통념상 큰 슬픔에 빠져야 할 것 같지만, 주인공은 남의 일처럼 무심한 태도를 보입니다. 사장에게 휴가를 청해야 하는 난처한 입장, 버스를 타고 멀리까지 가야 하는 번거로움, 밤샘 등만 걱정할 뿐이지요. 그는 심지어 '엄마 일만 없었다면 산책하면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까지 합니다. 두 번째 죽음인 살인에는 아예 피해자가 존재하지도 않는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재판정에는 많은 증인들이 실명으로 불려나오지만 정작 피해자는 끝내 그 이름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법정의 재판관, 검사, 변호사에게는 피고인 뫼르소 역시 실질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각자 자신들의 역할에 대해서만 집줄할 뿐이지요. 법정에 출입하는 기자들의 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법정이 일종의 연극무대일 뿐임을 강조하는 건 삶에 내재된 연극적인 성질을 드러내는 문학적 장치로 보여집니다. 세 번째 죽음인 사형은 정작 소설 밖에서 이뤄질 예정이지만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소설에서 관심의 대상은 '과거'의 죽음이 아니라 '미래'에 닥쳐올 죽음이고, '남'의 죽음이 아니라 '나'의 죽임이기 때문이지요.
이방인의 구조
이방인은 주인공 뫼르소를 둘러싼 세 가지 형식의 죽음을 다루는 극히 간결한 소설입니다. 소설은 1부와 2부 사이의  극명한 대조와 현격한 차이가 돋보입니다. 1부에서는 등장인물들의 움직임이 환각이나 꿈속처럼 나른하게 흘러갑니다. 엄마의 죽음과 장례식조차 따분한 일상처럼 묘사됩니다. 뫼르소는 엄마가 죽었는데도 장례식 내내 무심한 태도로 일관하다가 장례식이 끝난 다음날 여자친구 마리와 만나 수영을 즐기고 영화를 구경하고 난 뒤 애인과 함께 하룻밤을 보내면서도 아무런 반성적 의식을 갖지 않습니다.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인식 없이 오로지 현재적인 삶만 영위할 뿐이지요. 특별한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같은 층에 사는 레몽이 (행실이 나쁘다고 소문이 나 있음에도) 부탁하면 거절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서 편지를 대필해 주고, 사랑이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라면서 마리가 원하면 결혼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주인공 뫼르소의 하루하루의 삶은 자유롭고 무반성한 삶, 삶과 죽음의 경계조차 영원히 망각한 채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의식 없이 '현재'에만 몰두하는 삶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러다가 우발적인 살인이 일어납니다. 뫼르소와 마리와 레몽이 바닷가에 있는 레몽의 친구 마송의 별장으로 함께 놀러 갔다가, 우연히 레몽의 여자친구 오빠 일행과 시비가 붙어 칼부림이 일어나고, 다친 레몽을 치료하는 틈에 홀로 해변가 샘물이 있는 바위쪽으로 바람을 쐬러 나갔던 뫼르소는 칼을 휘두른 아랍인과 다시 마주치고, 뫼로스는 그 아랍인을 권총으로 쏘아 죽입니다. 그저 강렬한 태양이 아랍인의 칼날에 번쩍였고 그 태양빛 때문에 그 아랍인을 죽이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두 번째 죽음과 함께 1부가 끝나면 감옥과 법정이라는 극히 한정된 공간에서 제2부가 펼쳐집니다. 무반성한 주인공이 감옥에 갇힌 이후 마침내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되돌아볼까요?
감옥에 갇힌 뫼르소
엄마의 죽음조차 주인공에게는 특별한 감정의 동요를 일으킬 수 없을 만큼 그날그날의 공허하고도 따분한 일상을 이어가던 뫼르소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신의 삶에 초래된 심각한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변호사가 주인공의 사생활을 조사했다면서, 최근에 어머니 장례식이 있었는데 그날 '내가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을 알고 그날 '마음이 아팠느냐'고 물어도 '자신의 감정이 어떤지 살펴보는 습관 같은 건 별로 없기 때문에 알려주기는 어렵다'고 대답합니다. 변호사는 흥분해서 법정에서든 예심 판사의 방에서든 그런 말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고 다그치지만 뫼르소는 자신의 천성이 그렇다는 식으로 대답할 뿐입니다. 변호사는 '그날 내가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제했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다시 묻지만, 주인공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아뇨, 그건 사실이 아니거든요."
이처럼 재판의 모든 과정은 자신에게 불리한 쪽으로 진행되지만 뫼르소는 굳이 반박하거나 변명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별로 달라질 것도 없고 무엇보다 귀찮게 생각되기도 해서였지요. 뫼르소는 감옥에 있으면서도 그저 막연히 뭔가 새로운 사건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할 정도로 무덤덤한 태도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그러다가 마리가 더 이상 면회 허가를 받을 수 없다는 편지를 보내오자 그제서야 '내 삶이 그 속에서 멈추어 버렸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주인공이 자신의 운명에 무심하면 할수록, 자신의 처지에서 소외되면 될수록 독자들은 피해자보다는 살인자 뫼르소를 편들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법정은 한사코 그의 인간성을 규정하기 위해 모든 행동의 동기를 찾아내는데 골몰합니다. 어느새 장례식에서 보여준 뫼로소의 일거수일투족이 재판에서 문제시됩니다. 담배를 피우고 밀크커피를 마신 것까지도 말이지요. 주인공은 어느새 희대의 살인마로 변질됩니다. 증인 심문과정을 보다 못한 변호사가 "도대체 피고인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다고 해서 기소된 것입니까? 아니면 살인을 했다고 기소된 겁니까?"라고 외칩니다. 이 말에 방청객들이 모두 웃음을 터트리지요. 이처럼 뫼르소의 재판과정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사회 체제의 견고한 부조리들은 삶에 대한 또다른 은유를 드러냅니다. 작가가 『시지프 신화』에서 말한 다음 문장은 뫼르소의 재판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노력의 단계에서 인간은 비합리와 마주서게 된다. 부조리는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 사이의 대면에서 생겨난다. 바로 이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로 여기에 꼭 매달려야 한다. 한 일생의 모든 귀결이 송두리째 그것으로부터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비합리, 인간의 열망, 그리고 양자의 대면에서 솟아나는 부조리, 이것이 바로 드라마의 세 등장인물이다. - 『시지프 신화』
죽음과 대면한 뫼르소
소설의 막바지에는 말수가 극히 적었던 주인공 뫼르소가 마침내 울부짖다시피 절규하는 대목이 이어집니다. 계속 거절했음에도 기어코 면회를 온 신부가 기도하겠다고 하자 뫼르소는 격렬한 반응을 보이지요.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내 속에서 뭔가가 폭발해 버렸다. 나는 목이 터져라 고함을 치기 시작했고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기도하지 말라고 했다." 뫼르소는 죽음 앞에서 삶의 모든 가능성들이 무화(無化)되는 저 기막힌 '등가성(等價性)'을 확인합니다. 소설 전편에 걸쳐 주인공이 되풀이했던 말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라는 표현은 삶의 가치를 평준화하는 죽음의 어둡고 가차 없는 속성을 여과없이 드러내 보여줍니다.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전 생애 동안, 내 미래의 저 깊숙한 곳으로부터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 오지 않은 세월을 거슬러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었어.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 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야. 다른 사람들의 죽음, 어머니의 사랑,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다는 거야?



죽음을 목전에 둔 사형수의 마지막 독백은 필멸의 인간을 감옥에 갇힌 사형수에 비유했던 파스칼의 『팡세』를 떠올립니다. “쇠사슬에 묶인 한 무리의 사람들을 상상해 보라. 모두가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매일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중 몇몇이 교수형에 처해진다.”(『팡세』) 카뮈는 인간에게 내재된 필멸의 운명 때문에 삶이 의미가 없으므로 죽어야 하는 게 아니라 이 한정된 삶을 더욱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오늘날 부조리 소설의 상징적인 작품이 된 『이방인』의 마지막 문장은 곱씹어 읽을수록 긴 여운을 남깁니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아서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도록, 내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이것으로 『이방인』에 대한 소개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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