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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대한 작품 속에서 만은 20세기의 사상을 주름잡아 온 십여 가지의 주제와 문제들, 가령 정신분석과 영성주의, 예술, 질병, 죽음을 서로 연결시키는 연결고리, 아인슈타인이 말한 시간의 상대적 속성, 서구인 특히 중산층 서구인들의 정신 상태, 예술가와 사회의 관계, 제대로 된 인간 교육 등을 폭넓게 다룬다. 만의 특별한 재능은 이런 수준 높은 사상, 등장인물들의 창조, 소설 속 분위기의 설정을 잘 종합한다는 것이다.

 - 클리프턴 패디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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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토마스 만의 대표작 『마의 산』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토마스 만은 1875년 독일의 북부도시 뤼벡에서 부유한 곡물상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한자동맹의 중심도시인 뤼벡에서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자란 토마스 만은 자전적 소설인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속의 이야기처럼, 아버지에게서는 엄격하고 철두철미한 시민적 기질을 물려받았고, 어머니에게서는 예술적인 기질을 이어받았습니다. 


독일 북동부에 위치한 뤼벡은 13세기 무렵만 하더라도 '한자동맹의 여왕'으로 불리며 독일무역의 중심지였던 곳이지요. 트라베 강 상류 연안에 위치한 이 도시는 토마스 만의 고향이자 그에게 노벨 문학상을 안긴 작품인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의 배경으로도 유명합니다. 뤼벡 시내에는 아직도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의 주무대이자 토마스 만 집안의 소유였던 대저택이 남아있다고 하지요.


저도 2014년 여름에 17일 동안 독일의 여러 도시들을 자동차를 몰고다니며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드레스덴에서 함부르크로 이동할 때 이 유명한 독일의 항구도시를 쏙 빼놓고 지나친 게 얼마나 후회스러운지 모른답니다. 아무튼 뤼벡에서 태어나 뮌헨으로 이주했던 토마스 만의 작품 속에는 독일 북부의 주요도시인 뤼벡과 함부르크에 대한 이야기가 심심찮게 등장하면서 그 도시들을 직접 방문하지 못한 독자들의 여행의욕을 자극하지요.


뤼벡의 시의원과 부시장을 지냈던 아버지 덕분에 금수저로 자란 토마스 만은 19세기 말의 군국주의적이고 강압적인 학교 분위기를 싫어했던 탓에 학교공부 대신 음악과 시와 연극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일찍부터 작가가 되기 위해 부지런히 습작들을 썼다고 하지요. 1895년 이후에는 철학자인 니체로부터 중요한 영향을 받았고, 특히 1899년에 읽은 쇼펜하우어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토마스 만은 1905년에 카타리나 프링스하임과 결혼하는데, 1912년 결핵 증상을 보인 아내는 스위스 다보스의 요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작가는 1912년 5월과 6월 사이에 3주 예정으로 문병을 갔다가 요양원의 독특한 분위기와 손님들의 모습에 매료되어 자신의 체험을 단편으로 쓰기 시작합니다. 이 작품이 점차 방대해져 12년 후에 완성된 것이 바로 그의 문학의 정점을 이루는 『마의 산』이었습니다. 1913년에 쓰기 시작한 작품은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1915년에 중단되었다가 종전 후 다시 쓰기 시작하여 1924년에야 완성되었습니다.


토마스 만은 『마의 산』의 서문에서 "철저한 탐구만이 진정한 즐거움을 준다."라고 밝혔는데, 이 작품이야말로 작가가 12년 동안이나 고심을 거듭하면서 그 당시 서구 세계가 안고 있던 온갖 병리적인 현상들을 종합적으로 탐구하는 방대한 작품으로 녹여냈습니다.


『마의 산』은 제목에서 풍기는 독특한 분위기처럼 '쉽게 읽히지 않는 고전 소설'로도 악명이 높은데, 그 까닭은 작가 자신이 깊이 고민했던 정신 탐구의 온갖 주제들이 작품의 전편에 걸쳐 끝없이 펼쳐지기 때문이지요. 이 작품이 쓰여진 시대의 사상적 특징이었던 정신분석과 영성주의, 아인슈타인이 말한 시간의 상대적 속성, 질병과 죽음과의 관계, 예술가와 사회의 관계, 제대로 된 인간 교육, 보수와 진보와의 갈등 등이 그런 주제들이지요.


그래서 이 소설은 작가의 또다른 대표작인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처럼 여러 세대에 걸친 가족 구성원들의 대하 드라마식 이야기와도 전혀 성격이 다르며, 획기적이거나 크나큰 사건 하나 없이 극히 좁은 공간과 인물들(베르크호프 요양원과 환자들)로 좁혀진 상태에서 기나긴 이야기가 이어진다는 점에서 드라마틱한 사건 전개와는 거리가 먼 관념소설의 진수를 제대로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평가받고 있지요.


아무튼 이 소설은 '이야기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설명하면 결국 작품의 겉껍데기만 다루는 셈이 되는 그런 작품이지만, 소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배경과 등장인물들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이 소설의 배경은 스위스의 고산 지대인 다보스에 있는 폐결핵 요양원 '베르크호프'이지요. 다보스는 오늘날 <다보스 포럼>으로 더욱 유명해진 스위스의 휴양도시인데, 요양소, 의학연구소, 눈사태 연구소 등으로도 유명한 곳이지요. 소설 속에도 자주 등장하는 중심지인 다보스플라츠의 해발고도는 1,575m이며, 베르크호프 요양원은 좀 더 위쪽에 자리잡고 있지요. 우리의 주인공인 23세의 젊은 청년 한스 카스토르프는 바르 그곳에 입원해 있는 사촌 요아힘의 병문안을 위해 3주 예정으로 그곳을 찾아가지요. 그는 대학에서 조선 공학을 전공하고 이제 막 조선 기사 시험에 합격하여 곧 함부르크의 조선소에 취직할 예정인 상태에서 잠시 여행을 떠나듯 그곳을 방문했던 셈이지요.


함부르크에서 그곳까지는 먼 여행길이다. 3주 동안 짧게 머물기에는 사실 참으로 멀고 먼 길이다. 여러 군주들이 다스리는 나라를 지나, 수많은 산들을 오르내리고, 남독일의 고원에서 슈바벤의 호숫가로 가서는, 배를 타고 넘실거리는 파도를 헤치며 그 옛날 깊이를 알 수 없던 심연을 건너가야 한다.(제13쪽)


소설 속 주인공 청년은 맨 처음엔 마치 아내의 병문안에 나섰던 작가처럼 그저 4촌 동생의 병문안을 위해 그 요양원에 임시로 방문했다가 결국 폐결핵에 감염되어 그곳에서 무려 7년을 더 머무르게 되지요.


소설 속의 이야기는 꽤나 오랫동안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이야기로 진행됩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정기적으로 체온을 재고 식사를 하는 규칙적으로 산책을 다니는 등 요양병원의 따분한 일상 이야기로 진행됩니다. 그러다가 차츰 그곳 요양원에 입원한 환자들과 서로 알고 지내게 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상대방의 사소한 언행들 때문에 언짢아 하기도 하고, 매력적인 이성에 끌려 사랑에 빠지기도 하지만, 점차 평지에서의 수평생활에서 점점 멀어져 해발 1600m에 위치한 고산지대 폐결핵 요양원만의 독특한 분위기 속으로 빠져들지요.


주인공인 한스 카스토르프는 사관후보생이었던 사촌동생 요아힘 침센과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지만, 어느새 그곳에서 요양중인 러시아 출신의 클라브디아 쇼샤 부인에게 마음을 빼앗기지요. 그녀는 남편을 고향에 남겨 두고 유럽 각지의 요양원과 온천장을 전전하는 방종하고 퇴페적인 분위기의 여성이지만 거부할 수 없는 이상한 매력을 지닌 여성입니다.


요양원에는 이탈리아 출신의 인문주의자 세템브리니가 젋은 청년 한스 카스토르프의 '교육자'를 자처하는데, 그는 주인공 청년에게 '죽음'의 세계에 흘러 들어와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저 아래'의 시민 세계로 복귀하라고 충고하지요. 그러나 청년은 쇼샤 부인에게 매혹되어 그곳을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사육제 날 저녁에 마침내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그날 밤 그녀에게 연필을 돌려주기 위해 그녀의 방을 찾아가지요. 그러나 하룻밤 사랑은 짧게 끝나고 다음날 아침이 되자 말자 그녀는 요양원을 훌쩍 떠나고 말지요.


한스 카스토르프는 세템브리니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면서 온갖 정신적 수업을 받는 동안 요양원 아래 다보스 플라츠에서 지내는 유대인 나프타와도 알고 지내게 됩니다. 그는 한때 수도원에서 생활한 적이 있던 예수회 회원이면서 테러를 긍정하며 공산주의적 이상향의 도래를 확신하는 급진주의자였는데,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합리적 진보주의자인 세템브리니와 자주 충돌하고 격렬한 논쟁을 벌이지요.


사촌 요아힘 침센은 호전되지 않는 병세에 지친 나머지 결국 완치하지 못한 상태로 하산하여 군복무를 시작하고, 혼자 요양원에 남은 카스토르프는 그곳에서 차츰 더 오래 머물 채비를 갖추는데 그런 방편의 하나로 스키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그는 스키를 타고 산으로 갔다가 눈보라 때문에 천지사방을 분간하기 어려운 처지에서 오두막에 갇혀 꿈을 꾸게 됩니다. 그 꿈을 통해 그는 지금까지의 삶을 반성하고 인간이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공감에서 벗어나 삶을 진정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지요.


인간은 착한 마음씨와 사랑을 위해 자신의 생각에 대한 지배권을 죽음에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 자, 이제 눈을 뜨기로 하자. 이것으로 나는 꿈을 끝까지 다 꾸고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 잠과 꿈에 빠지면 내 젊은 목숨이 치명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물론 나도 잘 알고 있다. 아, 일어나라! 눈을 뜨라! 너의 다리와 팔이 여기 눈 속에 빠져 있다! 다리를 끌어당기고 일어나라! 자, 보렴, 날씨가 얼마나 좋은가를!(293∼295쪽)


평지로 되돌아갔던 요아힘 침센은 병이 악화되어 다시 요양원으로 되돌아오는데, 씩씩한 군인이 되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끝내 접고 일찍 삶을 마감하는 청년의 죽음은 한스 카스토르프에게도 큰 슬픔으로 다가오지만, 그무렵 갑작스레 요양원을 떠났던 쇼샤 부인이 다시 되돌아오면서 주인공의 생활도 아연 긴장 관계에 접어듭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아니라 은퇴한 대사업가인 커피 왕 페퍼코른이라는 인물과 함께 등장하기 때문이지요. 그 사람은 현실적인 삶에 충실하면서도 온갖 긍정적인 에너지와 힘을 갖춘 인물이었는데, 자신이 여행의 동반자로 데려온 쇼샤 부인이 한때 이곳에 머무는 동안 한스 카스토르프와 심상찮은 관계였음을 간파하고 난 뒤 결국 '사랑의 패배자'가 된 자신의 처지를 견디지 못하고 어느날 갑자기 자살하고 말지요.


페퍼코른이 죽고 나자 쇼샤 부인은 또다시 요양원을 떠나고, 한스 카스토르프는 몹시 허탈한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요양원에는 히스테리 환자가 속출하고, 세템브리니와 나프타는 어느 날 자유에 대해 격렬한 논쟁을 벌이다가 서로 입밖에 내어서는 안 될 온갖 험악한 언사와 모욕을 주고받은 끝에 서로 결투를 하기에 이릅니다. 결투장에서 세템브리니가 하늘을 향해 권총을 쏘자 나프타는 비겁자라고 흥분하며 자기 머르를 권총으로 쏘아 자살하고 말지요.


이처럼 과도한 흥분상태는 결국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이라는 청천벽력으로 이어지고, 카스토르프는 마침내 외부의 강제적인 힘에 의해「마의 산」을 내려와 전쟁에 참전하게 되지요. 여기저기서 포탄이 터지고 흙덩이며 산산조각이 난 인체가 분수처럼 솟구치는 와중에 커다란 흙덩이가 그의 정강이에 부딪힙니다. 그는 몸을 털고 일어서, 흙이 달라붙어 무거운 발을 이끌고 다리를 절며 갈지자로 계속 걸어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보리수」를 흥얼거립니다.


가지가 살랑거리네,

나를 부르는 듯이 ㅡ


이리하여 그는 아비규환 속으로, 빗속으로, 어스름 속으로 우리의 눈에서 사라져 간다.


이 소설은 한편으로는 시간에 대한 소설이면서, 또다른 한편으로는 삶과 죽음을 다룬 소설입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인데도 건강한 사람들이 평지에서 수평생활을 바삐 영위하는 사람들은 죽음이 언제나 저멀리 동떨어진 문제로 인식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평지에서 생활하기가 불가능할 만큼 병세가 깊은 환자들만 모여 있는 요양병원에서의 생활은 수평생활과는 전혀 다릅니다. 요양병원 환자들은 늘상 죽음과 대면하는 삶을 영위해 나갑니다. 그들의 일상은 오로지 건강을 회복하는데 촛점이 맞춰져 있고, 하루 다섯 차례의 푸짐한 식사와 디저트, 오전과 오후의 산책, 저녁 식사후의 오락 시간 등으로 촘촘히 짜여 있지만, 건강을 회복하여 요양병원을 빠져나가는 환자보다는 그곳에서 일찍 삶을 마감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매일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요양병원 생활 속에서 한스 카스토르프도 한때나마 잠시 죽음을 긍정하고 애착을 보이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데, 이는 작가 토마스 만이 바그너와 쇼펜하우어로부터 받은 영향이며, 죽음에 친근감을 느꼈던 주인공이 그것을 탈피하고 삶을 긍정하는 태도로 전환하는 모습은 니체의 '생에 대한 긍정'의 영향 때문이지요.


『마의 산』은 흔히 시대 소설, 교양 소설, 철학 소설 등으로 일컬어지지만 딱히 어떤 소설이라고 단정짓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어떤 작품이든 그 작품이 쓰여지고 나서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시대적 배경'은 차츰 뒷편으로 저만치 물러나고 작품 속에 내재된 본질적인 문제들만 앙금처럼 남기 마련이지요. 이 작품도 어느새 발표된지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만큼 시대소설이나 교양소설로서보다는 철학소설로 보는 게 더 마땅하지 싶습니다. 토마스 만은 특히나 쇼펜하우어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작가이다 보니 몇몇 대목들에서는 이 작품이 소설인지 철학책인지 헷갈릴 정도이지요. 가령, 제6장의 첫 소절인 <변화들>에서 길게 이어지는 '시간에 대한 묘사'는 얼마나 철학적인가요?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이란 불가사의한 것이다. 실체가 없으면서 전능한 것이다. 현상계(現象界)의 하나의 조건으로 공간 속에 존재하는 물체와 그것의 운동과 결부되고 혼합된 하나의 운동이다. 그러면 운동이 없으면 시간도 없는 걸까? 뭐든 물어 보라! 시간은 공간이 행하는 기능의 하나인가? 또는 그 반대일까? 또는 두 개가 동일한 것일까? 얼마든지 물어 보라! 시간은 활동적이고, 동사적인 속성을 갖고 있어, 그것은 '낳는' 힘을 지닌다. 그러면 시간은 무엇을 낳을까? 변화를 낳는 것이다! 지금이 당시가 아니고, 이곳이 저곳이 아닌 것은, 이 두 개 사이에 운동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시간을 재는 운동은 순환적이고, 자체적으로 완결되어 있으므로 이러한 운동과 변화는 거의 정지와 정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당시는 부단히 현재 속에, 저곳은 이곳 속에 쉬지 않고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한한 시간과 한정된 공간이라는 개념은 아무리 필사적인 노력을 해도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 영원하고 무한하다고 '생각'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분명 이게 사리에 맞을 거리는 믿음에서, 딱히 옳다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좀 더 나을 거라는 믿음에서이다. 하지만 영원한 것과 무한한 것을 확실하게 정한다는 것은 한정된 것과 유한한 것을 논리적으로나 수학적으로 부정하고, 상대적으로 그것을 영(零)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아닐까? 거리, 운동, 변화 같은 개념들이나, 또는 우주 속의 한정된 물체라는 존재가 영원한 것과 무한한 것이라는 임시적인 가정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좌우간 얼마든지 물어 보라!


어쩌면 이 소설은 문학과 예술의 본질이 늘 그러하듯이,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주인공 한스 카스토르프의 체험을 통해 '평지에서의 삶'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지를 강조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이 작품에서 카스토르프가 7년 동안 머무르는 스위스 고산지대 폐결핵 요양원이 아주 사실적으로 묘사되지만, 그것은 암시, 은유, 비유, 지시, 인용을 통하여 마치 마법에 걸린 산이 되기도 하고, 고대 신화 세계의 저승인 하데스가 되기도 하고,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발푸르기스 밤」의 마녀 산이 되기도 하며, 일반적으로는 시간 감각을 상실한 채 의무를 잊어버린 반시민적인 세계가 되기도 합니다.


베르크호프 요양원이라는 무대는 지리적으로 고산 지대일 뿐만 아니라 밀폐되고 외부와 차단된 세계를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지요. 그곳에서 생활하는 다양한 국적의 환자들은 과거의 직업이나 신분 혹은 재산상태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똑같은 시설에서 똑같은 식사와 똑같은 진료를 받으며 다시 일상생활로 복귀하길 염원하지만, 정상적인 삶에서 궤도이탈한 요양병원 생활은 이미 신화 속의 하데스처럼 신비한 분위기에서 살아가고 있지요.


요양병원을 총괄하는 베렌스 고문관은 염라대왕인 라다만토스로 군림하는 존재이며, 카스토르프는 3주간의 일정으로 요양원을 방문할 때만 하더라도 저승세계를 잠시 방문하는 오뒷세우스로 자신을 비유하며, 아둔한 슈퇴어 부인은 좀처럼 벗어나기 힘든 요양병원 생활을 시시포스와 탄탈로스 이야기를 꺼내며 요양원 생활에 비유하기도 하지요.


신화적인 숫자 7이 일관된 흐름으로 소설을 관통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마의 산』은 모두 일곱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체온계를 입에 무는 시간도 7분이며, 카스토르프는 일곱 개의 식탁에 일년에 한 번씩 바꿔 앉아 보며 7년간 그곳에 머무르게 되지요. 카스토르프의 방번호도 34호실이며, 소설의 정점인 「발푸르기스의 밤」 장면 또한 주인공이 요양원에 도착한 지 7개월이 지난 시점에 벌어지며, 페퍼코른이 자살을 결심할 때에도 일곱 명이 함께하지요. 여기서 다시 재미삼아 이 방대한 소설의 서문으로 잠시 되돌아갈 필요도 있을 듯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한스 카스토르프의 이야기를 금방 끝내 버리지 않을 작정이다. 일주일의 7일은 부족할 것이고, 7개월로도 모자랄 것이다. 작가인 내가 이야기에 휩쓸려 가는 동안 지상의 시간이 얼마나 지나가는지를 미리 정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 그렇다고 설마 7년이나 걸리지는 않겠지!


소설 『마의 산』에는 두고두고 음미할 만한 온갖 명문장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것으로도 꽤나 유명하지요. 그 문장들은 굳이 『마의 산』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하지 않더라도 다른 데서 가끔씩 마주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방대한 작품 속에서 이런 명문장들을 직접 마주치노라면 그 감흥이 훨씬 더 배가되는 걸 부정하긴 힘들지요. 그런 문장들을 몇몇 덧붙이면서 이 작품에 대한 소개를 마치겠습니다.


 " …… 장례식에는 사람을 고양시켜 주는 무언가가 있어. 나는 정신적으로 고양이 되려면 옛날부터 교회에 가지 말고 장례식에 가야 한다고 가끔 생각한 적이 있어. 사람들은 다들 멋있는 검은 복장을 하고 모자를 손에 벗어 들고는 관을 바라보면서 엄숙하고 경건한 태도를 취하지. 평소 때처럼 쓸데없는 농담을 하는 사람도 없어. ……"


시간에는 사실 눈금이 없고, 새로운 달이나 해가 시작될 때 천둥이 치는 것도 아니고 나팔 소리가 울리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될 때 예포를 쏘거나 종을 치는 것도 인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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