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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밀란 쿤데라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밀란 쿤데라는 1929년 체코의 브르노에서 태어나 프라하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1968년에 일어난 '프라하의 봄' 사건 이후 반체제 인사로 내몰려 출판금지 등의 탄압을 받은 끝에 1975년 프랑스 파리로 망명한 작가이지요.


그는 아버지가 저명한 음악학자였던 덕분에 보헤미아 전통 음악과 피아노를 배웠고, 대학에서는 문학과 미학뿐 아니라 영화학을 전공하기도 했습니다. 졸업 후에는 연극예술아카데미에서 시나리오 작가와 영화 감독 수업을 받은 뒤 이 학교의 강사와 교수로 지냈는데,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아마데우스》를 만든 영화감독 밀로스 포먼이 그의 제자였다고 하지요. 그는 나찌 독일에 대한 반발심으로 젊어서 일찌감치 공산당에 입당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반체제 활동' 죄목을 뒤집어쓰고 공산당에서 추방당했고(1950년), 1956년에 재입당했지만 1968년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운동'을 표방한 프라하의 봄에 참여한 이후 1970년 또다시 공산당으로부터 추방당하고 말지요.


이러한 작가의 독특한 체험은 그의 첫 번째 소설 『농담』(1967)에도 깊이 반영되어 있는데, 사소한 농담 때문에 인생이 송두리채 뒤바뀌고 마는 경직된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과 경멸에 가까운 조소가 담겨있지요. 작가가 프랑스로 망명한 이후 1984년에 출간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또한 『농담』에서처럼 전체주의 공산체제가 개인의 삶을 얼마만큼 억압하고 뒤틀리게 만드는지를 여실히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제목만 봐도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을 자아내는데, 1988년에 필립 카우프만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진 덕분에 더욱 유명해집니다. 1989년 여름 한국에서 개봉된 영화의 제목은 놀랍게도 《프라하의 봄》이었습니다. 뛰어난 제작진과 인기 배우들의 연기 덕분에 큰 인기를 끌었지만, 정작 작가 자신은 이 영화를 본 뒤에 자신의 작품을 영화로 만드는 걸 몹시 후회했다고 하지요.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지닌 고유의 색깔이나 의미가 왜곡되는 걸 싫어하기 마련인데, 밀란 쿤데라야말로 그런 점에 관해 유난히 예민한 작가이지요. 그는 자신의 작품이 번역 출간될 때 작가에 대한 자세한 이력은 물론 「작품 해설」조차 싣지 못하도록 까다로운 조건을 붙이는 작가로도 유명합니다.


작가와 작품을 둘러싼 대략적인 설명은 이쯤으로 그치고 이제부터는 작품 속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 보지요. 이 작품은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원제목이 있는데도 굳이 국내에서는 《프라하의 봄》이라는 다소 별난 제목을 달았는데, 아무래도 원제목이 지나치게 철학적이어서 그것만으로는 작품의 내용을 쉽게 짐작하기 어렵다는 점이 고려된 듯합니다. 그러나 영화의 제목을《프라하의 봄》으로 바꾼 탓에 정치적인 색깔이 너무 도드라져 자칫 공산주의 국가에서 일어난 반체제 민주화 운동을 그려낸 정치 영화가 아닐까 하는 오해도 생겼습니다. 물론 영화가 원작보다 '프라하의 봄'을 좀 더 부각시킨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이 작품은 몹시 철학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꽤나 정치적인 소설이 맞습니다. 어쨌든 작가는 1968년에 일어났던 체코의 민주화 운동과 그 반작용으로 초래된 소련군의 무참한 무력침공 때문에 개개인의 삶이 어떤 식으로 억눌리고 파괴되는지를 아주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으니까요. 그런데도 이 소설은 네 명의 등장 인물들이 펼치는 유별난 애정행각 때문에 '영화에서 자주 보여주듯이' 에로틱한 장면들이 가득한 영화 제작을 염두에 둔 각본처럼 여겨질 때도 있지요. 더구나 등장인물들이 정사를 벌이는 장소들 또한 체코의 프라하뿐 아니라 스위스의 제네바나 취리히 등지였으니 그런 분위기가 더해졌지요.


이 영상을 보시는 시청자분들은 아마도(!) 이 작품을 다들 한 번쯤은 읽어보셨겠지요? 혹은 줄리엣 비노쉬가 청순가련한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청소년 관람불가의 「프라하의 봄」을 보신 적이 있으시겠지요? 혹시 이 둘을 모두 놓치셨더라도 체코의 프라하를 가 보신 적은 있으시겠지요? 이마저도 아니라구요? 아무튼 좋습니다. 우연히 클릭한 이 영상 덕분에 저와 함께 이 세 가지를 한 방에 모두 체험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저 또한 이 책을 두 번째로 읽기 전까지는 「프라하의 봄」이라는 영화를 못 봤습니다. 또한 프라하를 직접 찾아갈 때까지만 하더라도 밀란 쿤데라의 작품은 단 한 권도 읽어본 적이 없었고, 이 작가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조차 없었더랬습니다. 물론 프라하가 배출한 천재 작가였던 프란츠 카프카에 대해서도 새까맣게 몰랐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인가 늦봄에 덜컥 프라하로 날라갔습니다. 무슨 특별한 문학기행도 아니었고 말 그대로 흔해빠진 '동유럽 여행'의 첫 번째 기착지로 프라하에 닿았던 셈이지요. 꽤 오랜 시간 동안의 지루한 비행 끝에 말입니다.


사실 갑작스레 결정된 동유럽 여행을 떠나기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저는 나름대로의 여행 준비작업으로 마음이 몹시나 분주했더랬습니다. 동유럽에서도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도시인 프라하 방문을 목전에 두고도 그때까지 프란츠 카프카나 밀란 쿤데라의 책 한 권조차 읽은 게 없었으니 그 가운데 한 두 권쯤은 반드시 읽어봐야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은 정말 쏜살같이 흘렀고, 프라하에 도착할 때까지 뒤적거린 책이라고는 고작 몇 권의 여행 안내서와 음악 및 미술에 관한 안내서 몇 권이 전부였고, 프라하 올로케로 찍었다는 모차르트 영화 「아마데우스」를 밀린 숙제하듯 간신히 다운받아 감상한 게 전부였습니다. 아, 참, 빈 국립 오페라 극장 구경을 놓칠세라 빈에 머무는 날짜에 맞춰 음악 공연 티켓을 예매하느라 낑낑댔던 기억도 있긴 있었군요.


아무튼, 체코의 역사와 쿤데라의 작품들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인 상태로 저녁 무렵에 도착한 프라하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습니다. 마침 우리 일행들이 묵을 숙소가 카를교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자리잡은 덕분에, 우리 일행은 도착한 첫날부터 밤늦게까지 블타바 강가에 자리잡은 야외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며 (카페가 문을 닫을 때까지) 프라하의 고성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다리 밑에' 숙소를 잡았던 게 정말로 대박이었습니다!


이처럼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읽기 훨씬 전부터 우연한(!) 기회에 미리 샅샅이 다녀본 프라하 관광 체험은 훗날 밀란 쿤데라의 작품을 읽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되었더랬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지요. 프라하의 구시가지 광장이며, 시계탑이며 , 얀 후스의 동상이며, 바츨라프 광장 등등을 직접 걸어다니며 카메라에 쏙쏙 담아냈던 기억들은 밀란 쿤데라의 작품 속에서 그 장소들을 다시 만날 때마다 어김없이 되살아났습니다. 그 멋진 도시를 전혀 가 보지 못한 독자들조차 밀란 쿤데라의 작품이 지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에 빠져들기 쉬운데, 그의 문학의 고향과도 같은 그 도시의 독특한 분위기에서 사흘씩이나 보낸 제가 이 작가의 작품들을 계속 외면하기란 어려웠지요.


그런데도 이 작품은 생각보다는 읽기가 조금 까다로운 책이었습니다. 적잖은 독자들이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고들 하지요. 그건 바로 밀란 쿤데라가 이 작품 속에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이나 고대 그리스 철학자였던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을 소설의 도입부에 덜컥 내밀면서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기 때문이지요. 다음과 같이 말이지요.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이처럼 밀란 쿤데라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소설의 도입부에 배치함으로써 지금까지도 많은 독자들을 곤경에 빠뜨리고 있지요. 작가가 이 말을 꺼낸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리의 삶이 무한히 반복된다면 우리의 몸짓 하나하나는 견딜 수 없이 무거워지고, 그 반대로 우리의 삶이 단 한 번만 주어진다면 우리의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택해야 할까요?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고대의 철학자인 파르메니데스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반대되는 한 쌍으로 양분되어 있으며,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이라고 주장했지요. 작가는 그의 말이 맞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고 규정합니다.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하다고 말이지요.


이렇게 시작된 소설 속 이야기는 '존재의 무게'를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운 쪽으로, 혹은 그 반대쪽으로 끊임없이 옮기려는 등장 인물들의 삶의 궤적들을 잔잔하게 그려나가고 있지요. 


남자 주인공인 토마시는 프라하에서 유능한 외과의사로 일하는 바람둥이이자 이혼남입니다. 그는 여러 여성들과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지속하면서도 결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는 에로틱한 우정을 모토로 삼아, 두 사람 중 누구도 상대방의 인생과 자유에 대한 독점권을 내세우지 말자고 단단히 못을 박지요. 그는 얼마 전에 우연히 보헤미아의 한 작은 마을에서 테레자를 만납니다. 불과 한 시간 남짓한 우연한 만남이었지만, 열흘이 지난 뒤 그녀는 대뜸 프라하에 있는 토마시를 찾아가지요.


토마시는 테레자와 함께 일주일을 지냈으면서도 그녀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도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을 느낍니다. 그녀는 마치 송진으로 방수된 바구니에 넣어져 강물에 버려졌다가 그의 침대 머리맡에서 건져 올려진 아이처럼 보였습니다. 테레자와 함께 사는 게 좋을까, 아니면 혼자 사는 게 나을까를 고민하던 토마시는 독일 속담을 되뇌이지요.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던 어느 날, 토마시는 테레자의 목소리를 다시 듣습니다. 그녀가 역에서 전화를 걸어온 것입니다. 토마시는 선약이 있어서 다음날 저녁에나 찾아오라고 하지요. 다시 만난 그녀는 지난번보다 훨씬 우아해 보였고, 손에는 두꺼운 책 한 권을 들고 있었지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였습니다. 그녀는 다른 용건 때문에 프라하에 왔다가 우연히 들렀음을 애써 강조했지만, 사실은 이미 무거운 트렁크를 수화물 보관소에 맡겨둔 참이었지요.


그녀는 토마시가 전날까지도 염려했던 그대로, 인생 전체를 이 남자에게 헌납하기 위해 프라하로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결국 그녀와 그녀의 트렁크를 그의 아파트에 들여놓습니다. 그는 스스로 놀랍니다. 10년 전 첫 번째 부인과 헤어질 때 거의 환호성을 지를 뻔했던 그는 오로지 독신일 경우에만 자신답다는 걸 깨달은 터였고, 비록 여자와 동침하더라도 자정 이후에는 모든 여자를 내쫓았는데 테레자 때문에 그런 원칙을 어긴 때문이었지요. 다음날 아침까지도 그의 손을 꼭 잡고 있는 테레사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다시 한번 테레자가 바구니에 담겨 강물에 버려진 아기라는 생각을 합니다. 아기가 담긴 바구니를 난폭한 강물에 띄워 보낼 수 있다니!


수많은 고대 신화의 도입부에는 버려진 아기를 구하는 누군가가 있다. 폴리보스가 아기 오이디푸스를 줍지 않았다면, 소포클레스는 그의 가장 아름다운 비극도 쓰지 않았을 것을! (21쪽)


이렇게 해서 토마시와 테레자와의 운명은 차츰 고대 그리스 비극의 이른바 '운명적 비극'과 셰익스피어 비극의 '성격적 비극'이 기묘하게 뒤섞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토마시와 테레자와의 사랑은 결국 따지고 보면 거듭된 여러 우연이 아니었더라면 결코 엮일 수 없었다는 점에서 「오이디푸스 왕」처럼 '운명적으로' 엮여있기 때문이고, 남자의 타고난 바람기 때문에 아내와 끊없는 갈등을 지속한 끝에 결국 유능한 외과 의사에서 시골의 트럭 운전사로 점점 추락한 끝에 끝내 부부가 함께 시골 언덕의 커브길에서 동반 추락사하고 말기 때문이지요.


여주인공인 시골 처녀 테레사는 토마시와 동거하게 되면서 토마시의 애인인 사비나의 도움을 받아 프라하에서 잡지사 사진기자 일자리를 얻어 차츰 정착하게 되지만, 토마시의 끝없는 애정행각 때문에 매일밤 악몽을 꾸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여자는 토마시의 잠재적 애인이었고, 그녀의 악몽은 텔레비전 연속극처럼 반복되지요. 토마시는 테레자의 고통을 잠재우기 위해 결국 그녀와 결혼하고, 작은 강아지까지 사 줍니다. 강아지의 이름은 『안나 카레니나』의 남편이었던 카레닌으로 짓습니댜.


테레자는 충직한 카레닌이 늘 곁에 있어도 행복하진 못합니다. 소련 탱크가 전국을 점령하고 난 뒤로 차츰 토마시의 일자리가 불안해졌기 때문이지요. 테레자도 소련군이 진주한 후 일주일 동안은 거의 행복과 유사한 일종의 전율 상태에 빠져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나섰지만, 너무 대담해져 시위 군중에게 권총을 겨누는 한 장교의 사진을 찍다가 체포된 적도 있었지요. 그녀가 찍은 사진이 빌미가 되어 많은 시민들이 구금되고 체포되는 일도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국민들의 행복한 도취는 점령 후 일주일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체코 정치인들은 잡범처럼 소련군에게 끌려갔고,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모든 사람이 그들의 안위를 걱정했고, 소련군에 대한 증오는 술기운처럼 치밀어 올랐다. 증오감에 도취된 축제였다. …… (47∼48쪽)


토마시와 테레자와 카레닌은 결국 체코를 떠나 스위스 취리히로 건너가지요. "사비나도 스위스로 망명했는데 그래도 괜찮아?" 라는 토마시의 걱정어린 물음에도 테레자는 개의치 않지요. 이제 사비나는 토마시를 만나기 위해 제네바를 떠나 취리히의 호텔에 더욱 자주 머물게 되고, 토마시는 그녀와 헤어져 취리히의 집으로 돌아가면서 달팽이가 자신의 집을 메고 다니듯 자기도 자신의 삶의 방식을 휴대하고 다닌다는 생각을 하며 행복해 하지요. 테레자와 사비나는 그의 삶에 있어서 서로 멀리 떨어진 아름다운 두 극점 같았습니다.


테레자는 취리히에서도 밤마다 악몽을 꾸며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프라하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그녀는 토마시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고,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원하지 않았던 것이었지요. 텅 빈 집에서 테레자의 이별 편지를 발견한 토마시는 모든 상황을 아무리 되짚어 보아도 테레자를 되돌아오게 할 수 없다는 걸 깨닿고 좌절하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자 차츰 생각이 바뀌지요.


그는 그녀와 함께 보낸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았고 그들의 관계가 이보다 더 잘 끝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누가 꾸며낸 이야기일지라도 달리 마무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느 날 테레자는 예고도 없이 그의 집에 찾아왔다. 어느 날 그녀는 같은 방식으로 떠났다.그녀는 묵직한 트렁크를 들고 왔다. 그리고 다시 묵직한 트렁크를 들고 떠났다.(53∼54쪽)


테레자가 떠난 뒤 우울에 빠져 홀로 거리를 산책하는 동안에 토마시는 뜻밖의 자유를 느낍니다. 거리 모퉁이마다 연애 가능성이 널려 있었고, 오로지 독신으로만 진정한 자신의 모습으로 살 수 있는 '예전의 삶'으로 되돌아간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는 테레자에게 얽매여 칠 년을 살았는데, 마침내 그의 발목에 채워 놓은 방울을 벗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는 존재의 달콤한 가벼움을 만끽합니다.


나흘 때 되던 날 갑자기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테레자가 이별의 편지를 쓰며 겪었던 쓰라린 감정을 느낀 것이지요. 한 손에는 무거운 트렁크를 들고 다른 손에는 카레닌을 묶은 줄을 잡고 천천히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고, 홀로 된 그녀의 슬픔이 그의 가슴에 사무치게 와닿습니다.


토요일과 일요일에 그는 미래로부터 존재의 감미로운 가벼움이 그에게 다가옴을 느꼈다. 월요일, 그는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중압감에 짓눌리는 듯했다. 수천 톤이나 나가는 소련 탱크의 무게도 이 중압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동정심보다 더 무거운 것은 없다. ……


그는 동정심에 굴복하지 말라고 스스로에게 채찍질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지요. 테레자가 떠난 지 닷새 후 그는 취리히의 병원 원장에게 당장 프라하로 돌아가야 한다고 선언하지요. 원장은 정말 화를 냈지만, 토마시는 어깨를 으쓱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Es muss sein. Es muss sein."


이 말은 베토벤의 마지막 4중주 가운데 마지막 악장에 나오는 말이었지요. 베토벤은 필연성과 무거움과 가치가 내면적으로 서로 연결된 개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토마시는 스위스 국경을 향해 차를 몰았고, 머리가 헝클어지고 표정은 침울한 베토벤은 이민 생활에 작별을 고하는 그를 위해 'Es muss sein!'을 기꺼이 연주해준 셈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이란 뭔가 가벼운 것, 전혀 무게가 나가지 않는 무엇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반드시 이런 것이어야만 한다고 상상한다. 또한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삶도 더 이상 삶이 아닐 거라고 믿는다. 덥수록한 머리가 끔찍한, 침울한 베토벤도 몸소 그의 'Es muss sein!'을 우리의 위대한 사랑을 위해 연주했다고 확신한다.(63∼64쪽)


그러나 프라하로 되돌아온 토마시는 잠든 테레자 곁에서 뒤척이다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테레자가 자기와 사랑에 빠진 것은 철저히 우연이라는 사실을 말이지요.


칠 년 전 테레자가 살던 도시의 병원에 우연히 치료하기 힘든 편도선 환자가 발생했고, 토마시가 일하던 병원의 과장이 급히 호출되었다. 그런데 우연히 과장은 좌골 신경통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 대신 토마시를 시골 마을에 보냈던 것이다. 그 마을에는 호텔이 다섯 개 있었는데, 토마시는 우연히 테레자가 일하던 호텔에 들었다. 우연히 열차가 떠나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 그는 술집에 들어가 앉았던 것이다. 테레자가 우연히 당번이었고 우연히 토마시의 테이블을 담당했다. 따라서 토마시를 테레자에게 데려가기 위해 여섯 우연이 연속적으로 존재해야만 했고, 그것이 없었다면 그는 테레자에게까지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64쪽)


토마시는 테레자 때문에 보헤미아로 되돌아왔지만 지금 그의 곁에 누워 깊은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는 '우연의 화신인 그 여자'에게 추호도 동정심을 느끼지 못하지요. 그가 느낀 유일한 감각은 귀향으로 인한 절망감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작가는 소설 속에서 '우연의 가치'를 다시 한번 땅바닥으로부터 높이 들어올립니다. 만약에, 어떤 한 사건이 보다 많은 우연에 얽혀 있다면 그 사건에는 그만큼 중요하고 많은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지요.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나타날 수 있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 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그저 침묵하는 그 무엇일 따름이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87쪽)


따라서 소설이 신비로운 우연의 만남에 매료된다고 해서 비난할 수 없는 반면, 인간이 이러한 우연을 보지 못하고 그의 삶에서 미적 차원을 배제한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93쪽)


프라하를 떠나 제네바에서 살게 된 사비나에게 어느 날 멋진 남자친구가 나타납니다. 프란츠는 그녀의 아뜰리에에 자주 들렀지만 결코 그곳에서 정사를 나누지는 않지요. 불과 몇 시간 만에 한 여자의 침대에서 다른 여자의 침대로 가는 것은 애인과 부인을 모욕하는 짓이며 결국 자신도 모욕하는 짓으로 보였기 때문이지요. 몇 달 전에 프란츠가 반한 이 여인에 대한 사랑은 너무나 소중해서 그는 자신의 삶 속에 그녀만을 위한 독자적 공간을 만들어내려고 고심합니다. 외국 대학으로부터의 강연 초청은 100% 받아들였고 여행을 정당화하기 위해 없는 세미나까지 만들어내지요. 


그는 미남이며 학계에서도 출세가도의 정상에 서 있는 인물이었지만 늘상 사비나가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휩싸여 지냅니다. 그런데 사비나는 이 진지한 남자와 만날 때에도 (토마시와 만날 때처럼) 중산모자를 쓰지요. 그것은 사비나 아버지의 기념품이자 토마시와의 에로틱한 게임에 사용하는 엑세서리였지만, 프란츠는 그 모자를 보는 순간 마치 누군가가 '미지의 언어'로 자신에게 말을 거는 듯한 불편함을 느끼고 몹시 당혹해 하지요. 사비나와 프란츠 사이엔 '이해할 수 없는 어휘들'의 목록이 너무 많았습니다.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토마시와 사비나가 중산모자의 모티프를 서로 나눠 가졌듯)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성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기 마련이다.(152쪽)


언제나 삶에 진지했던 프란츠는 결국 아내에게 사비나의 존재를 당당히 밝히고 아내와의 결별을 선언하지요. 하루 아침에 멀쩡한 아내와 결별하고 자신과의 공개적인 사랑을 선언하는 이 남자는 어느덧 사비나에게 점점 더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그날 밤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흥분한 그녀는 어느 때보다도 격렬하게 그를 사랑했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고 동시에 이미 그곳에서 먼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또다시 멀리에서 배반의 황금 나팔 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이부름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녀 앞에 아직도 광활한 자유의 공간이 열려 있으며 그 공간의 넒이가 그녀를 흥분시키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프란츠를 미친 듯 거칠게 사랑했다.(194쪽)


프란츠는 그녀의 몸 위에서 흐느꼈고, 그녀의 몸짓을 통해 모든 걸 깨달았다고 확신하지요. 식사 시간 내내 침묵을 지키던 사비나가 마침내 그와 함께 영원히 살고 싶다고 말이지요. 그가 사비나와 함께 살리라 결심한 바로 그 순간, 사비나는 제네바에서 떠날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도 말이지요.


한 인생의 드라마는 항상 무거움의 은유로 표현될 수 있다. 사람들은 우리 어깨에 짐이 얹혔다고 말한다. 이 짐을 지고 견디거나, 또는 견디지 못하고 이것과 더불어 싸우다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 그런데 사비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녀는 한 남자로부터 떠나고 싶었기 때문에 떠났다. 그 후 그 남자가 그녀를 따라왔던가? 그가 복수를 꾀했던가? 아니다. 그녀의 드라마는 무거움의 드라마가 아니라 가벼움의 드라마였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201쪽)


이렇듯 소설은 작품의 제목처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상징하는 두 인물 토마시와 사비나, 그리고 이 두 사람의 대척점에서 삶의 무게에 짓눌려 고통 받는 테레자와 프란츠를 중심으로 차분하면서도 길게 이어지지요.  


사비나가 제네바를 떠나 파리로 온 지 삼 년이 지난 뒤 그녀는 토마시와 테레자의 사망 소식을 전해듣지요. 편지에 따르면 그들은 죽기 전 몇 해 동안 시골 마을에서 살았으며, 트럭 운전사로 일하던 토마시는 테레자와 함께 자주 인근 마을로 가서 항상 조그만 호텔에서 밤을 보내곤 했습니다. 언덕을 타고 넘는 도로에는 꼬불꼬불한 구간이 많았는데, 트럭이 그만 계곡 아래로 떨어져 즉사하고 만 것이었지요. 이처럼 두 주인공의 죽음은 소설의 앞부분에서 너무 빨리 노출되지만 그렇다고 이 소설이 거기서 끝나는 건 아니지요.


스위스를 떠나 프라하로 되돌아온 토마시와 테레자는 차츰 밑바닥으로 떨어지는데, 유능한 외과의사였던 그가 점점 더 변방의 끄트머리로 밀려난 까닭은 범죄적이고 야만스런 정치체제에 대항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언젠가 소련 점령군 체제에 협력한 비양심적인 지식인들을 비판하는 기고문을 잡지에 발표하는데, 당국은 반공주의를 조장하는 그의 글을 철회하도록 끈질기게 회유하고 압박하지요. 그는 결국 외과과장으로 승진하는 대신 현직에서 물러나 시골 병원으로, 다시 무료 진료원으로, 거기서 다시 유리창 닦는 노동자로 전락한 끝에 맨 나중엔 시골마을에서 트럭운전사로 살아갑니다.


이 소설은 희극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우연으로 시작된 주인공들의 삶이 '프라하의 봄'이라는 정치적인 격랑에 휘말리면서 어떻게 변질되어 가는지를 때로는 우수에 찬 선율로, 때로는 감성 넘치는 철학 에세이의 필치로 유려하게 그려내고 있어서 의미심장한 문장들의 행간을 자꾸만 반복해서 읽게 되는 아주 독특한 작품이지요.


인생의 고비마다 운명처럼 다가오는 '그래야만 한다(es muss sein)'는 필연성은 우연성과 어떻게 교차하면서 삶에 희비쌍곡선을 그려나가는지, 소련군 탱크의 무게만큼이나 강한 압력으로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정치적 격변의 와중에 개인의 자유와 소신은 얼마만큼 부당하고 또 나약하게 침해당하는지, 참으로 생각할 게 많은 작품입니다.


망명 작가인 밀란 쿤데라는 이 작품 속에서 자신이 직접 체험했던 '프라하의 봄'에 대해 그 누구보다 예민한 감각으로 당시의 정치체제를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작가는 '범죄적 정치체제는 (범죄자가 아니라) 자신들이 유일하게 옳다고 확신하는 광신자들이 만든 것'이라고 따끔하게 지적합니다. 이런 비난을 받는 공산주의자들은 '우린 몰랐어! 우리도 속았어! 우리도 그렇게 믿었어! 따지고 보면 우리도 결백한 거야!'라고 외칠지도 모른다고, 작가는 말합니다.


주인공 토마시는 바로 이 논쟁에서 핵심을 포착합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알았는지 몰랐는지에 있지 않다고 말이지요. '권좌에 앉은 바보가, 단지 그가 바보라는 사실 하나로 모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토마시는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버지인 줄도 모르고 라이코스를 죽였고, 자신의 어머니인 줄도 모르고 이오카스테와 결혼했지만, 사태의 진상을 알고 나자 자신이 결백하다고 느끼지 않았으며, 자신의 무지가 저지른 불행의 참상을 견딜 수 없어 스스로 자기 눈을 찌르고 장님이 되어 테베를 떠났었지요.


토마시는 영혼의 순수함을 변호하는 공산주의자들이 악쓰는 소리를 들으며 이렇게 생각했다. 당신의 무지 탓에 이 나라는 향후 몇 세기 동안 자유를 상실했는데 자신이 결백하다고 소리칠 수 있나요? 자, 당신 주위를 돌아보셨나요? 참담함을 느끼지 않나요? 당신에겐 그것을 돌아볼 눈이 없는지도 모르죠! 아직도 눈이 남아 있다면 그것을 뽑아 버리고 테베를 떠나시오!(289쪽)


토마시는 이 비유가 너무나 마음에 들어 체코 작가 동맹이 발간하는 주간지에 글을 투고하지요. 토마시의 글이 발표되고 불과 두세 달 후 '프라하의 봄'은 끝장이 납니다. 이제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감히 우리 눈을 뽑아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써 대다니! 소련은 그들의 변방에서 자유로운 토론이 허용될 수 없다고 결정했고, 그들 군대는 하룻밤 사이에 토마시의 나라인 체코를 점령하고 맙니다. 토마시는 결국 '프라하의 오이디푸스'였던 셈이었습니다. 자신이 우연히 투고했던 글 때문에 그는 결국 외과의사의 옷을 벗어야 했고 프라하를 떠나야 했으니까요.


끔찍한 교통사고가 일어나기 하루 전날, 토마시 부부는 우연한 일로 기분이 좋아진 동네 사람들과 함께 인근 호텔로 춤을 추러 가지요.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에 맞춰 스텝을 밞는 동안 테레자는 토마시의 어깨에 기대면서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낍니다. 그 슬픔은 종착역에 다다랐다는 암시였지요. 작가는 말합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라고 말이지요.


이것으로 작품 설명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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