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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을 농담처럼 말했지

 

1. 암살이라는 스캔들(나이토 치즈코,  고영란 역, 역사비평사)

  

 '암살' 사건을 다룬 일본 메이지시대 미디어 서사의 욕망을 다룬 책이다, 라고 간단히 정리할 수도 있겠지만, 식민지 시기를 공부하고 있는 내겐 여러 모로 꼼꼼히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그 자체로 공부가 될 뿐 아니라, '담론 연구'라는 방법론 자체에 대한 성찰의 가능성도 동시에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일본 메이지 시대 신문기사를 읽는다는 건, 식민지 조선의 관제 매체와, 당국의 영향을 지배적으로 받았던 민간매체를 주된 사료를 삼았던 한국의 연구자들에게 확실히 '외부'를 제공한다. 제국의 신문지상에 등장한 명성황후와 김옥균, 안중근의 모습은 새롭게 보인다. 그들은  제국의 욕망 지형도 안에서 요청되는 배역을 부여받고 다시-새롭게 '해석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 책의 의의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나아가 '식민지-여성'이라는 타자를 재생산하는  제국의 남성지배 미디어 공동체에 의해 주조된 '이야기' 그 자체를 문제 삼고 있다. "텍스트에 담긴 암묵적 전제와 결론들은 결코 독자=미디어 공동체의 은밀한 욕망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야말로 미디어 내러티브의 가장 강력한 성립조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끊잆없는 스테레오타입을 통해 이야기 주체의 욕망을 재생산하는 '제도로서의 이야기' 그 자체가 의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암살 이야기' 뿐 아니라, '이야기를 암살'한다는 저자의 기획이 "암살이라는 스캔들"이란 제목에 담겨 있는 것이다.

 

2. 프레카리아트, 21세기 불안정한 청춘의 노동(아마미야 가린, 김미정 역, 미진북스) 

   

프레카리아트, 이 말은 예전에 읽은 아마미야 가린의 전작 <성난 서울>(꾸리에, 2009)에서 처음 알았다. 나는 그 책을 우익 록밴드 보컬로부터 좌익 문화운동가로 '전향'한 한 일본인 젊은 여성의 이념적 편력과 문화적 실천이 궁금해서 읽었었다. 사실 아직도 그녀가 누구인지는 잘 가늠되지 않는다. 다만 얻은 것은 있었다. 눈에 띠는 요란한 의상을 입은 채로, 닥치는대로 '현장'에 나타나고, 뭔가를 외치거나 쓰면서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나는 그녀가, 책상에 앉아 오직 '머리'로만 읽거나 상상하는 내게, '눈'과 '머리'의 한계로 보지 못한 뭔가를 알려줬다. 한국에 88만원 세대가 있는 것처럼, 일본에는 '로스트 제네레이션'이 있고, 이탈리아에는 '1000유로 세대', 그리스에는 '600유로 세대'가 있다는 것. 그러니까 이건 그야말로 '만국의 (청년)노동자'의 문제라는 것. 그리고 이러한 삶의 조건을 타개하기 위해, 그들은 끊임 없이 '글로벌적'으로 뭔가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 '스쾃(squat)'같은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도 그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프레카리아트, 프리터, 청년실업자, 88만원 세대, 잉여... 등등 비정규적인 삶의 '양식'을 가진 이들을 부르는 이 서로 겹치는 명칭들의 다양함은, 어쩌면 '실재'함에도 불구하고 '유령'처럼 존재하는 이들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청년(비정규)노동자는 엄연히 전일적인 시장지배 체제가 낳은 구조적 실재다. 이들은 정말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떤 '기획'을 가지고 있나. 이 책은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기 위해 쓰였다.

 

3. 조선인극장 단성사 1907~1939(이순진, 한국영상자료원) 

 

 언젠가부터 식민지기 조선 영화를 찾아보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됐다. 식민지 조선에서 모던과 첨단의 상징으로 간주됐던 '영화'를, 21세기인 지금 본다는 것은 기묘한 체험이다. 과연 우리는 같은 텍스트를 보는 것일까. 식민지 조선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영화의 내용, 영화에 나타난 당대의 풍속,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의 모습 등을 상상하는 것 모두를 포함한다. 그들도 영화관을 나오면서 조금은 어색함을 느꼈을까? 그렇다면 그건 '영화'라는 미디어 자체의 낯섦 때문일까? 그들도 방금 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을까? 이 모든 '상상'이 단지 '공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걸, '단성사'는 말한다. 그런 상상을 더 해보라고 자꾸만 부추긴다. 과연 단성사라는 '장소'는, 거기 있는 것 그 자체만으로 이미 '환상의 영사기'다. 식민지 조선에서 '극장'은 그 자체로 꿈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치열한 문화정치의 현장이었다. 그곳은 제국과 자본의 굴레 속에서 힘겹게 구축된 '이등국민'의 '영화 산업'이 펼쳐진 '현장'이다. 거기에 활동사진과 무성영화 시절을 거쳐 자체적인 조선영화를 제작하게 되기까지의 지난했던 조선영화의 꿈이 모두 아로새겨져 있다. 저자가 '단성사'라는 "흘러간 이름"을 다시 소환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가 스크린 위에서만 펼쳐지는 빛의 작용이 아니라 그 뒤에서 벌어지는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현상이기도 하다"는 것. 온갖 부침을 겪으며 아직, 거기 있는 단성사를 읽자.  

 

4. 깔깔깔 희망의 버스 -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깔깔깔 기획단, 후마니타스) /  25일 -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울산공장 점거투쟁 기록(박점규, 레디앙)

 추천페이퍼에 '이런 책'들을 소개하는 건, 반드시 어떤 '신념' 때문만은 아니다. 공부하기 위해서다. 한국 노동자의 삶과 노동계급의 역사에 대한 기록 및 이론들을 다룬 몇 가지의 책들을 알고 읽게 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건 좀 기이한 체험이었다. 나는 왜 이전에 이런 책들을 알지 못했을까. 생각해보니, 한국 노동계급의 투쟁사를 나는 한번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초중고는 물론 대학교에서도, 그리고 미디어에서도 그런 책을 소개해 준 적이 거의 없었다. 지금까지 투쟁과 혁명을 '글로 배워야 했던' 나의 아비투스에 대해 약간의 난처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니 실은 오히려 '글로도 배울래야 배울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어떤 책들은 미디어에 과잉 노출되는데, 어떤 책들은 있는지조차 모른다. 온갖 것들이 다 상식과 교양의 대상이 되는 이 시대에, 유독 노동자에 관한 '앎'만은 철저히 은폐된다. '김진숙'과의 연대는커녕, '김진숙'이라는 존재를 알고 이해하는 데에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결코 간과해서는 안되는 노동자의 삶이 있고, 그것이 나와 무관하지 않으며, 나도 할 수 있고 해야 되는 일이 있다는 걸, 항상 너무 늦게 안다. 한진중공업 사태를 보도하(지 않)는 한국 미디어들을 보라. 늘 그랬지만, 한국 지배동맹의 가장 강력한 전략은 노동자들의 삶을 결코 가시화하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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