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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티나무가 자라는 산
오늘 밑줄

이런 상황은 우리의 노력으로 ‘교정할 수 없다. 이런 취약성의 근원은 ‘나‘의 형성에 앞서 있기 때문에 그 근원을 발견할 수도 없다. 처음부터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의존해 벌거숭이 상태로 놓이게 되는 이런 존재의 조건은 그에 대해 똑 부러지게 논쟁을 벌일 수도 없는 어떤 것이다. 우리는 알 수 없는 세계, 의존적인 세계에 접어들었고, 어느 정도는그런 상태로 남아 있다. 자율성의 관점을 가져와 이런 상황에 대해 반박하려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한다면 위험하지는 않아도 바보스러울 것이다. 물론 몇몇 사람에게는 이런 원초적 장면primary scene이 유아기 삶을 후원하고 성장시키는 특별하고 사랑스럽고 수용적이며 따뜻한 관계 조직이 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이 장면은 유- P44
기나 폭력 혹은 기아의 장면이다. 이들은 무의미, 야만성, 부양 불능에 양도된 신체다. 하지만 이 장면의 가치가 어떠하든, 유아가 필연적 의존성을 형성한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아 있고 이 필연적 의존성을 우리는 완전히 극복할 수 없다. 몸은 여전히 어디론가 양도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삶의 억압을 이해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바로 이런 근원적 취약성primary vulnerability의 상황, 우리가 타인과의 접촉에 양도되는 상황을 피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거기에 어떤 타인도 없고 우리 삶을 지원해줄 그 무엇도 없다고 해도, 아니 그런 것들이 없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억압에 대항하려면 각각의 삶이 차별적인 지원을 받고 유지된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고, 인간의 신체적 취약성이 전 세계로 분포되는 방식이 서로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삶은 엄청난 보호를 받을 것이고, 그 삶의 고결성에 대한 주장을 저버리는 것만으로 전쟁이라는 무력을 작동시킬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또 다른 삶은 정신없이 빠르게 전개되는 그런 지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고 심지어 ‘슬퍼할 만‘하다는 자격조차 갖지 못할 것이다.-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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