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레테 - 추억의 해독제
  • 도쿄 기담집
  • 무라카미 하루키
  • 11,700원 (10%650)
  • 2014-08-09
  • : 2,252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 책을 처음 접한 건 <상실의 시대>였다. 그 이후로 무라카미 하루키는 쳐다도 안 봤는데, <도쿄기담집>은 아니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책으로 인해 무라카미 하루키의 다른 책들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루키는 '불가사의하고 기묘하며 일어날 것 같지 않지만 일어날지도 모르는' 이야기들을 때론 유쾌하게 때론 무심하게 때론 씁쓸하게 조곤조곤 말한다. 하루키가 말한 대로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모두 고독하고 혼란스러우며 잊거나 잃어버린 듯한 느낌을 헤쳐가고 있다. 무미건조한 어투로 담담히 써 내려간 이야기는 한없이 우울한 이야기를 한층 비극적이게 한다. 반면에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아주 그럴싸하게 놀랍지 않냐는 어투로 말해서 나도 모르게 신기하단 생각이 들게 한다. 하루키는 뛰어난 이야기꾼이었다.


<우연여행자>는 어찌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다. 하지만 그 세 가지 우연은 세상이 이렇게 신비한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하루키가 메사추세츠에 머물던 무렵 들른 재즈 카페에서 신청하고 싶던 곡이 흘러나왔던 우연과 <10 to 4 at the 5 spot> LP판 구입과 관련한 우연은 아무것도 아닌 듯하지만 묘하게 낯설지만 익숙한 느낌을 줬다. 이 우연은 어쩌면 운명처럼 예정되어 있던 걸까하는 느낌 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피아노 조율사인 '그'의 이야기는 이 두 가지 우연에 더해 신비감을 더 증폭시켰다. 화요일 오전마다 서점 까페에서 책을 읽던 그는 찰스 디킨스의 <황폐한 집>을 읽고 있었다. 우연히도 똑같은 책을 읽던 그녀를 만났다. 그와 그녀는 가까워졌으나 더 친밀해지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녀의 사연을 듣고 그는 자신의 누나를 떠올렸다. 인연을 끊었던 누나와의 통화는 그의 삶을 바꿨다. 이는 마치 예전에 선한 행동이 은혜를 갚는 것마냥 찾아 온 가슴 한켠이 따스해지는 우연의 결과였다. 가장 밑바닥까지 홀로 내려가야지만 구원받을 수 있단 하루키의 말이 와닿았다.


<하나레이 해변>은 하와이의 하나레이 해변에서 상어에게 아들을 잃은 사치의 이야기이다. 사치는 자신의 아들이 상어에게 물려 익사했다는 연락을 받고 하와이로 떠난다. 사치의 상실은 치유되지 않았고 그녀는 아들의 기일마다 하와이의 하나레이 해변을 방문한다. 자유롭게 살았던 자신처럼 아들 역시 하와이로 서핑을 하러 왔다가 죽었다. 그의 영혼은 어디 있을까. 우연히 만난 키다리와 땅딸이에게 친절을 베푼 그녀는 그들에게서 기이한 이야기를 듣는다. 감정의 기복이 없어보이는 사치의 메마른 어투는 조금만 건드려도 피가 철철 흘러넘치는 상처를 덮고 있는 듯 했다. 사치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내려가야 할까. 


<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는 특이한 이야기였다. 계단에서 사라진 남편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은 '나'는 그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린다. 현대사회는 이상하다. 고립되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하면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할 장소를 찾기도 한다. 가족이란 공동체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책임감과 지루함에 짓눌려 사라지고 싶어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 계단은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는 통로인 것일까. 다른 곳의 거울보다 더 예쁘게 보인다는 그 거울은 보고 싶은 것을 보도록 해줄까.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은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비춰줄까. 내 주변에는 그런 '문'이 있을까. '나'는 그 문을 찾을 수 있을까.


<날마다 이동하는 콩팥 모양의 돌>은 꿈과 관련한 이야기이다. 액자식 소설이기도 하다. 소설가인 내가 쓰는 단편소설 속에서 여자는 능력 있는 의사지만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 왜 불륜일까. 그래서 그 돌은 질질 끌려다니는 그 불쾌하고 끈적거리는 불륜이 뿜어내는 감정을 끊어낼 때까지, 진정으로 원하는 무언가를 찾을 때까지 따라다닐까. 그리고 아버지의 주술적 속박에 걸린 준페이는 연애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일생에 중요한 여자가 세 명이라는 말에 그는 누구에게도 그 세 번을 주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지나고나서야 그 여자가 첫 번째였구나, 두 번째였구나 이럴 뿐. 장엄미사곡을 떠올리게 하는 기리에(나도 이 이름을 보자마자 모짜르트의 레퀴엠을 떠올렸다)는 신비로운 여자였다. 그녀 신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둘은 서로에게 푹 빠졌다. 함께 하는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그들은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다. 사라진 기리에를 기다리던 준페이는 마침내 콩팥 모양의 돌이 어디 있는지, 어디로 갈지 알게 되는 것 같다. 어쩌면 삶은 죽을 때나 되어서야 그 의미를 알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시나가와 원숭이>는 기이한 이야기이다. 괴이한 존재와 질투에 사로잡힌 인간의 감정과 관련된 이야기라고나 할까. 미즈키는 일 년전부터 자신의 이름을 종종 잊어버렸다. 시나가와 구청에서 운영하는 '마음의 고민 상담실'에 상담을 받으러 간 그녀는 마침내 그 이유를 알게 되는데... 사람은 과거에 사로잡힌 존재이면서 그 과거를 끊고 앞으로 나갈 수도 있는 존재다.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알고 지낸 마쓰나카 유코와 얽힌 이야기를 꺼내자 상담사인 사카키는 번뜩이는 통찰력과 다른 존재를 볼 수 있는 눈으로 미즈키의 과거를 벗겨준다. 세상은 인간만 사는 곳이 아닌 건 확실하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자신에게 도사리는 어둠은 상실을 겪으면서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누구나 홀로 그 어둠을 맞이해야만 한다. 어쩌면 그 어둠에 먹힐 수도 있겠지만 모두들 어떻게든 그 어둠을 받아들이고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