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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살의를 분출하고픈 욕망이 여러 편의 소설에서 고개를 치든다. 남자는 배신을 당한 후 스스로 극복하려고 노력했고 누구보다도 성실히 살았다. 그는 배신의 아픔을 이겨냈을까. 겉으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그는 미움이 거대한 탑처럼 쌓여 병들어간다. 미움은 차곡차곡 쌓여가는 동안에도 그는 웃고 떠들 수 있지만, 가슴 속에서 그는 복수의 칼날을 갈고 닦는다.

작가는 갈고 닦은 복수의 칼날을 보여준다. 날은 반짝일 만큼 예리해졌다. 금세라도 사람의 가슴팎을 밀고 들어갈 수 있겠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미래의 문을 닫고 밀폐된 방에서 복수의 칼날을 갈고 또 갈아대는 사람들. 그들의 일상은 미움과 미움이 겹치고 겹쳐 한없이 얼룩져 있지만, 그렇다고 칼을 뽑아 휘두르지 않는다. 미움이 칼을 부르고, 칼이 피를 부르는 일이 없다. 일상은 그저 흐르고 흐를 뿐이다. 오히려 복수의 칼을 든 채로 멍하니 미움의 탑을 올려다본다. 내가 쌓은 탑이야, 작가가 중얼거리는 듯했다. 아니, 내가 흘리는 혼잣말인 듯해서 깜짝 놀랐다.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단편들은 뭔가 미진한 결말로 마침표를 찍은 듯 시원치 않았다. 아니, 마침표 없이 문을 열어두고 나간 듯한 결말들이다. 작가는 결정적인 마지막 행동 또는 마지막 실마리를 풀어내지 않고 손을 흔들며 나가버렸다.(어쩌면 작가가 추리기법을 소설에서 살리지 못하거나 혹은 살릴 마음이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복수의 칼을 쥐고 있다면 어떤 마지막 행동을 취할까. 작가는 뒤를 돌아다보지 않을까. 복수의 칼을 사람의 가슴팎이 아니라 미움의 탑에 꽂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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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표현이 무척 섬세하다. 미움과 살의가 사람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만들어지고 쌓여가는지 손으로 만져지는 듯했다. 미움이 쌓이는 과정은, 먼지 같이 흩날리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돌돌 뭉쳐내는 것이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혹 바다 같은 게 아닐까. 그 위에 뗏목이 덜렁거리며 떠다니다가 시간의 흐름에 흔들려 떠내려오는 것. 뗏목 위에는 틈틈이 건져올리는 미움의 파편들이 있다. 쌓이고 쌓여 뗏목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거워지는 순간. 작가가 잡아내는 건 뗏목이 떠내려오다가 가라앉기 바로 직전의 순간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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