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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은 왜?
내가없는 이 안  2007/02/11 17:27

펀은 여덟 살된 여자아이다. 무녀리로 태어난 새끼돼지 윌버를 구해냈다. 윌버는 펀이 정성껏 먹여주는 우유로 살아났고 무럭무럭 자랐다. 펀은 윌버의 꿀꿀거리는 이야기마저 알아들었다. 윌버와 동물친구들, 심지어는 곤충친구의 대화마저 엿들을 수 있었다. 여덟 살의 사람에겐 그런 능력이 있다. 동물과 곤충, 혹은 식물과도 소통할 수 있는 능력.

그런데 펀은 윌버와 동물들의 대화에 무작정 끼여들지 않았다. 펀은 우리 앞에 꼼짝없이 앉아서 이야기를 들을 뿐이다. 펀은 왜 동물들과 함께 윌버 구하기 작전에 합류하지 않았을까.

펀이 우리 앞에 앉아 이야기에 섞여들었다면? 물론 템플턴 같은 비열하고 치졸한 쥐의 역할은 아예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템플턴은 오히려 거위알을 훔쳐가고 새끼거위를 물어죽이는 역할로만 떨어지게 되었을지도. 샬롯은 그처럼 눈부신 지혜를 짜낼 필요가 없었을지도. 윌버와 샬롯의 우정이 그렇게 탄탄하게 거미줄 치지 못했을지도.

나는 무척 궁금했다. 펀의 역할이 우리 밖에서 우리 안으로 들어왔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짜여지게 될까. 펀의 목소리가 왜 우리 안으로 뛰어들지 못했을까,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펀은 여덟 살이다. 여덟 살은 어쩌면 경계에 선 나이일지도 모른다. 동물의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그게 그리 신기한 일이 아닌 나이. 펀은 집으로 뛰어들어가 엄마에게 말하지 않았다. 나, 동물이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어요, 라고. 펀은 동물들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게 자연스럽다. 동물들이라 해서 자기 아래로 줄선 열등한 서열의 생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펀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즐거워할 뿐이다.

펀은 서서히 우리에서 멀어져갔다. 동물보다는 또래친구가 더 좋아졌다. 펀은 동물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지점으로 넘어간다.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펀은 그걸 깨닫지 못한다. 펀은 경계 이전과 이후가 어떻게 다른지 알지 못한다. 천천히 변해간다. 펀은 곧 열여덟 살이 되고 스물여덟 살이 될 것이다.

작가가 어떤 의도로 펀을 이야기의 주변에 세워놓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람과 동물의 구분이 의외로 이야기 속에서 명확하다. 감동적인 동화답지 않게 독특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여덟 살의 소녀가 동물들의 우리 밖에서 한 걸음씩 멀어져가는 것이 조금 서운했다. 윌버와 회색거미 샬롯의 자손들의 관계는 끝까지 끈끈하기 이를 데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리 서운한 일도 아닐 수 있다. 따지고 보면, 펀은 윌버를 구한 맨처음 주인공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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