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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어린.
내가없는 이 안  2006/12/01 13:47

이름 모를 선인장을 하나 가꾸고 있다, 고 시작하려니 왠지 불성실한 사람 같다. 어느 작가는 이름 모를 꽃이 어쩌고, 하지 말랬다. 제대로 알고 쓰라는 말일 텐데, 이름 모를 꽃도 나름 낭만적(!)이지 않을까. 알지도 못하면서 기분만 내는 이름 모를 꽃, 은 설득력이 없겠지만, 여하튼 집에서 물 주고 키우는 선인장 이름을 모른다. 잎 하나 똑 떼어준 걸 집에서 노는 화분에 꽂았더니 저 혼자서 장성해진 터라.

이 선인장은 잎에서 잎이 나오는 방식으로 제 몸을 불린다. 그렇게 마냥 길어지는 줄 알았는데 며칠 전 작은 잎이 아니라 작은 봉오리가 고개를 내밀었다. 이놈이 뭐가 될까, 싶어서 매일같이 들여다보았다. 아닌게아니라, 정말 봉오리였다. 분홍빛 봉오리가 봉긋해지더니 몸매도 날렵하게 쭉쭉 길어졌다. 날이 갈수록 궁금증이 더했다. 관객이 빈 손으로야 볼 수 없어 때 되면 아차차 물! 하고 부어주고 아차차 햇빛 나네! 하고 옮겨주었다. 무심한 주인이 간만에 방정을 떤다 싶을 만큼 정성을 들였다.

마침내 뾰족해진 봉오리가 하나씩 잎을 열었다. 잎은 파도타기를 제대로 연습한 응원단처럼 열렸다. 자기제어능력이 도드라진 녀석이었다. 어느 잎 하나 서두르지 않고, 하나씩 차례로 열렸다. 어느 날 암술과 수술을 다 드러내고 이제 됐수, 하는 듯 화려해진 자태는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잘했어, 이름 모를 선인장!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하나씩 잎을 접고 서서히 시들어갔다. 이제 끝났구나, 하는 마음으로 다가갔더니 뜻밖에도 연둣빛이 만연하다. 잎에서 잎이 나서 맨 끝에 태어난 잎이 오동통하게 살이 쪄 있다. 어린 잎. 이유도 없이 가슴이 뜨듯해졌다.

어제 아이가 피아노 앞에서 끙끙거렸다. 제목은, 아기 코끼리의 걸음마. 왼손은 스타카토, 오른손은 이음줄과 스타카토가 뒤섞였다. 왼손과 오른손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여야 하고, 그나마 오른손은 박자마저 속을 썩인다. 붓점이 하나 붙는 바람에 나머지 팔분음표와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이런 악보는 듣는 사람은 재밌고 연주하는 사람은 골탕을 먹는다. 붓점이 연이어서 붙었다면 리듬을 탈 수 있지만 딱 한 번만 붙으면 춤을 추다가 시치미를 떼고 모른 척해야 하는 연주가 된다. 아이가 해낼 수 있을까.

아이가 작정을 한 듯이 연습을 했다. 서툰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널을 뛰었다. 제목마저도 아기 코끼리의 걸음마! 아이의 작은 어깨가 아기 코끼리의 부드러운 등허리처럼 보였다. 나는 끙끙거리는 어깨를 쓰다듬어주었다. 어린 코끼리 같은 어린 아이.

어린 것은 왜 예쁠까. 내가 더는 어린 것이 아니라서일 수도 있겠다. 아님 모든 살아있는 것의 어린 것은 생태적으로 예쁘기 때문일 수도. 아닌가? 12월 첫날이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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