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 보면 사람들에겐 조금 우스운 구석들이 있다. 심각하고 진지한 사람일수록 보이지 않는 뒷모습에는 허둥대는 옷깃이 비죽하게 나온다. 미처 닫지 못했어요, 보다는 닫았는데 옷자락이 문틈에 끼였어요, 가 더 웃음 터지게 한다. 재밌는 사람이 재담을 늘어놓는 것보다 재미없는 사람이 헛발질하는 게 더 우스운 법이니까.
이기호의 소설에는 심각하게 인생을 생각하려는데 자꾸만 헛스윙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백수니까 나름 인생이 고달픈데... 아르바이트도 짤려 사고나 칠까 하는데... 푼돈을 벌 요량에 좀도둑질이나 해보려는데... 어떻게든 주먹 센 놈들과 맞닥뜨리지 않으려는데... 결국 의도와는 다르게 자꾸만 구렁텅이로 떨어진다. 비극도 비극 나름, 구렁텅이도 가오 잡고 떨어지면 좋으련만 이건 영 인생 우스워지는 구렁텅이일 뿐이다.
그런데 그걸 지켜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게 되는 지점이 꽤 절묘하다. 웃음을 쥐어짜려는 코미디와 웃음을 못 참고 새나가게 하는 코미디가 있는 것처럼, 그 사이에서 부유하는 희극은 절묘해야 한다. 소설에서 웃음을 유도하려면 제대로 짚어줘야 품위가 떨어지지 않는다. 이기호의 소설은 링 위에서 촐싹거리며 치고박고 쇼를 하다가 풀죽어 돌아서는 권투 선수를 떠올리게 한다. 링 위에서 폴짝폴짝 뛸 때는 우습고, 땡 소리에 돌아 들어가는 뒷모습에는 삶의 비감함에 젖는다.
이 사람, 어쩌다가 이런 시추에이션을 만들어냈을까, 자못 궁금하고 부러운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엉뚱하고 발랄한데다 비감하기까지 삶의 희비극을 두루 잡아내는 그는, 아마도 소설과 닮았을 것이다. (짐짓 근엄한 표정을 한 꺼풀 들어내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생각들이 여러 겹으로 훌렁 일어날지 몰라. 사실 나는 그가 진지한 사람인지 재밌는 사람인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이런 소릴 한다.) 어쨌거나 그는 자기 안의 것을 몇 겹으로 분리하여 풀어낼 줄 안다. 또 그 분리작업은 별안간 소설가의 존재이유를 흔드는 데에도 한몫을 한다. 글쓰기와 노동이 별개인가? 소설에도 성질이 우량한 것과 불량한 것으로 나뉘는가? 그는 하나의 휴지를 두 겹으로 나누어 이야기하고, 나는 두 겹으로 읽어 하나의 휴지를 이해한다. 그가 어느 한쪽에 손을 번쩍 들어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문학의 고상함과 단란주점의 유치함을 나란히 놓는 재주. 아니, 이렇게 써보니 이것도 뒤바꿔놓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의 유치함과 단란주점의 고상함, 혹은 문학의 형이하학과 단란주점의 형이상학을 주물럭거리며 빚어내는 재주. 그러니 쇳덩어리일 뿐인 국기게양대를 사랑할 수도 있으며, 죄책감으로 죽어가는 할머니의 환영 속에 덤벙거리며 뛰어들 수도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차가운 국기게양대를 끌어안고 내 체온으로 끌어올려 저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묵직한 철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세상의 그 무엇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당연 사랑하고 또 용서할 수 있다는 말.
그러니 당신, 걱정하지 마시라.
갈팡질팡하다가 주저앉을 수도 있는 법.
땅밑으로 꺼져들어가듯이 주저앉았다가 슬그머니 일어설 수도 있는 법.
정 없으면 흙이라도 파먹지,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당신만의 지지고 볶는 요리법이 있지 않은가.
(어쩐지 배째라, 는 느낌이 든다면, 혹은 온갖 미묘한 맛들을 주먹밥으로 뭉뚱그렸다, 는 의혹이 든다면, 리뷰가 가오도 못 잡고 구렁텅이에 굴러떨어진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