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의미가 없다는 걸 확인하는 의미
  •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 우치다 다쓰루
  • 13,500원 (10%750)
  • 2018-02-28
  • : 1,153


“목표나 계획을 세우지 않고 살기 시작한 지가 꽤 오래된 것 같다”라는 말을 한심하게 듣는 게 아니라 죽을 자리를 미리 골라내고 있는 사람 혹은 이미 죽은 채로 지내고 있다는 말처럼 들을 수도 있다는 게 신기했다. 아닌데. 그런 거 아닌데. 읽기 전에는 알 수 없고 살기 전에는 역시 알 수 없고 만나기 전에는 알 수 없다. 타인은 나를 모른다. 나는 당신을 모른다. 나도 나를 모르고. 


​저는 미래라는 시간성을 의식적으로 폐기해 보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막연히 어딘가에 있을 미래의 나에 대한 환상은 가지고 있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하지 못했다. 내가 정말 그런가 하고 스스로를 더듬어야 했기 때문이다. 잘 제련된 ‘개인’을 마주할 때 오는 의심. 당신과 다르게 저는 다가오는 말들을 잘 튕겨내지 못하는 축에 속하는 사람예요. 그걸 두고 봤을 뿐. 


​읽고 있는 순간이 가장 좋다. 읽기에는 목적이 없다. 읽다 만나는 개념들을 활용해서 상처를 가둔다. 구체적으로 느끼기 싫으니까. 내가 고안해낸 방식이 가장 윤리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좀 들떴던 적 있다. 나만의 고상한 이 우월감. 그마저도 상대화시키고 나니까 좀 허탈하다. 소설을 잘 안 읽어요. 부럽거든요. 삶을 느끼는 사람들이 쓴 것이. 블록처럼 말들을 뭉쳐서 쌓아둔 세계는 평균화된 고통들로 안온하다. 원한다면 꺼내 먹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 뭉쳐 던져서 쌓아 놓기만 했다. 그러는 것에 급급했다. 거기에 만족했다. 실은 가장 원하지 않았던 것같다. 알지 않기 위해 알려했다. 


​내가 좋아하는 순간이 나를 사위어가는 존재로 만들지도 모르겠다는 의식을 하게 되어서 어떤 끈을 잇기 위해서 이 안온한 유막 같은 세계에 구멍을 바람을 내기로 하였다. 틈으로 세상이 많이 밀려올까 봐 걱정스럽다. 그래서 읽지 않다가. 다시 또 읽기로 맘을 고쳐먹으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읽듯 하듯 살아보면 될 것 같다. 내가 무엇을 살고 있는지 모르는 채로 산다.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상정하지 않으면, 혹은 내가 되어야 하는 나를 기획하지 않으면. 내가 마주치는 모든 것이 내가 만나고 싶었던 것이 되는데. 마치 이 대화를 나누기 위해 우리가 살아온 것처럼. 그것은 마주침 이후의 곱씹음으로만 획득된다. 적립된다. 음미된다. 


그러니 이 삶을 소화할 시간들을 내게 달라. 나는 적잖은 자신이 있다. 죽고 싶나요. 아니오. 죽어있었던 건 아닌가요. 아니오. 지금을 정말로 살아보기 위해서 내일을 포기하려고 내가 노력했다고요. 살 줄을 모르는 몸으로 고안해 볼 수 있는 가장 심각한 도전였다고 그게. 

이런 책을 사고 싶다는 수요가 책을 사기 이전에 미리 설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모르는 채 읽어야 할 책을 찾습니다. 따라서 책과 만난 순간에야 ‘아, 난 이 책을 읽고 싶었어!’하고 사후적이고 소급적으로 욕망이 형성됩니다. ‘줄곧 이 책을 찾고 있었던 자신의 이미지’가 그 책과 만남으로써 선명해지는 것입니다.-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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