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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호가니 책상

언제부터 우리는 ‘햇빛’과 ‘햇볕’과 ‘햇살’을 구분하여 말하기 시작했을까. 빛과 볕과 살로 변주되는 그 말들은 미세하지만 분명 다른 질감을 지닌 듯하다. ‘햇빛’이 시각적인 이미지를 강하게 지닌다면 ‘햇볕’은 촉각을 환기하며 감각의 주체에게 보다 가까이 있고 ‘햇살’에 이르면 통각이라고 할, 보다 종합적인 어떤 몸섞임의 상태에 가까워진다. 햇빛이 아직 대상화된 거리 속에 있다면 햇살은 피부와 혀에 감기고 마침내 무언가 부드러운 살점을 나의 내부로 밀어 넣는 듯한 교합의 친밀감 속에 있다. 계절로 치자면 봄과 가을에 그것은 햇볕에 가깝고 여름의 그것은 햇빛에 가깝고 늦가을부터 겨울을 지나 초봄에 이르는 그것은 햇살에 가까운 듯하다. 봄가을에 촉각으로 먼저 느끼는 그것은 햇볕이라는 말이 지닌 적당한 따뜻함을 즐기게 한다. 여름날의 햇빛은 그 앞에 살갗을 봉헌하기가 쉽지 않은, 일단은 피해야 할 거리를 유지하기 십상이고, 쌀쌀하거나 몹시 시려운 겨울날을 지나면서 햇살을 그 살의 거처인 양지로 나를 불러들인다. 겨울에 나는 창가나 마당가로 햇살을 찾아다니고 햇살과의 통음을 즐긴다. 겨울 햇살은 내 속에 숨어있던 적극적인 소통의 열망을 드러내게 한다. -p118-


<시와 사막의 햇빛>


햇빛은 공간 속에서 빛난다. 시각에 공간이 더해져야 그 빛이 비로소 선명해지고 배가 된다. 고립무원의 공간만이 햇빛을 받아들일 수 있다. 바다나 사막 혹은 도시의 빌딩 위 피사체가 햇빛과 하늘과 대상으로 명확히 구분이 이루어져야 한다. 한 조각 구름마저도 배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작열하듯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쏟아져 내려와야 한다. 발 제껴 피할 수 있는 공간이 한 치도 허용되지 않는 그 곳만이 햇빛을 안을 수 있다.


<옥수수 마르는 마당의 햇볕>


햇볕은 시간의 궤와 축을 같이 한다. 눈이 녹기 시작한 골목길 흙 담벼락에 드리워져 하루 종일 시간의 궤적을 그리며 벽을 어루만진다. 일출부터 일몰까지 햇볕의 모든 색감을 담는다. 흙의 모든 질감을 어루만지며 젖은 공간이 말라가듯 그렇게 서서히 스며들어 품어 든다. 은은하게 품고 은은하게 퍼져 나온다. 햇볕이 어루만진 자리는 온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아늑함을 품는다.   


<고향 창가의 햇살>


햇살은 사물과의 실랑이 속에 살며시 드리워진다. 베란다에 걸린 빨래 사이를 헤집고 들어와 기어코 방바닥 한 뼘의 공간에 누워 버린다. 누워서도 흔들린다. 때론 힘에 겨워 커튼에 슬며시 드리워져도 좋다. 그런 날은 바람에 실려와도 좋다. 흔들림 만으로도 얼마나 먼 길을 달려왔는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눈꺼풀 위 한 뼘의 공간에 자리한 햇살의 어른거림은 때론 말라서 매미 날개처럼 바스락 거린다. 두 손 저어 보내기 전까지 햇살은 그렇게 실랑이 하다 문득 떠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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