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시부야 밤거리를 걸으며 집에 돌아가는데 온갖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말도 못하는 나라에 와서 이 고생일까? -p.126
처음 싱가폴에 들어와서 앞으로 살아가야 할 집을 구하면서, 발품을 팔아 집을 보러 다니고 또 집 주인들과 얘기를 하면서, 드디어 살고 싶은 집을 찾아 계약을 결정하면서, 그리고 계약서를 작성하면서, 내가 했던 생각이 바로 김미소가 한 생각이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말도 못하는 나라에 와서 이 고생일까?
김미소는 한국에서 나고 자랐으나 아버지가 베트남 여성과 재혼하는 바람에 베트남어를 하는 새엄마를 언니라고 부르며 따라야 했고, 한국어를 하지 못하는 언니를 데리고 병원을 간다거나 복잡한 행정절차를 밟는데 통역하러 가면서 언니를 도왔다. 이 일화에서 나는 '수키 김'의 [통역사]가 떠올랐다. 이민 가족에서 어린 아이가 영어를 습득해 영어에 서투른 부모를 대신해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 통역사가 되는 일. 아직 어려서 세상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려워 잘 알지 못하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해야만 했던 상황들을, 수키 김이 자기 책에서 언급했더랬다. 그 때도 아 정말 그렇겠구나, 그런 일이 생기겠어, 했는데, 김미소 역시 그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김미소는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과정을 졸업하고 미국에 가 공부를 하면서 미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면서 학위도 딴다. 그러나 취업하며 계속 거주하는 것이 어려워 일본으로 가 영어 교수가 된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면서 일본에 가서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김미소가 한다. 일본에 도착했을 당시의 김미소는 일본어를 잘하지 못했다. 그러니 처음에 적응하기가 어려웠고, 그 때 감정이 북받쳐 올라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말도 못하는 나라에 와서 이 고생일까' 라는 생각을 한거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말도 못하는 나라에 와서 이 고생일까?
계약을 마치고, 내가 계약하면서 들었던 것들이 뭐였더라 되새기고, 그 과정이 너무 지치고 힘들어 주저앉아서, 내가 도대체 왜 여기에 와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을까, 몇 번이나 생각했는데, 그 때마다 거듭 나는 내가 원해서 한 일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내가 오고 싶어서 왔다. 내가 언젠가는 영어 공부를 하러 영어권 나라에 가고 싶다고, 언젠가는 외국 살이를 해보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해서 떠나온 길이었다.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은 힘든 마음을 부여잡고 쌀을 사러 나갔고 밥을 해먹었다.
김미소는 열심히 일어를 공부한다. 영어를 가르치는 교수이고 한국어와 영어에 모두 능숙하지만 일본어는 아직 서투른 사람이었다. 김미소는 일본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그러니까 자기가 할 수 있는 언어에 하나를 더함으로써 언어와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언어는 단순히 언어를 배우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는 것, '다른 문화와 충돌하고 서로의 문화에 균열을 내며 세계를 넓혀가는 일(p,77)' 이라고 말한다. 당연하다. 그런데, 단순히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김미소는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우리 각 개인이 놓인 환경이 얼마나 다른지를 인지한다.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그 사람은 한국에 일하러 왔는가, 공부하러 왔는가, 결혼하러 왔는가. 그 때마다 그들이 받아들게될 한국어 교재에 쓰여진 말들은 서로 다른 말들이다. 한국어라는 외국어를 배우는 입장에서도 격차가 생기는거다. 한국어를 하지 못하는 채로 한국으로 결혼하러 와서 어린 아이에게 의지하며 병원을 다녀야 했던 그 젊은 베트남 여성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그러니까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외국어를 공부한다, 다른 나라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보이는 것과 알게 되는 것은, 내가 상상했던 것 혹은 기대했던 것 이상이다.
나는 영어를 공부하러 왔다.
내가 영어를 공부하려는 까닭은 영어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영어로 더 말을 잘하기 위해서이다. 간단히 여행 다니는 것은 사실 더 영어를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다. 어떤게 물이고 어떤게 밥인줄만 알면 여행다니는 것쯤은 문제도 아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건 그 이상이다. 이곳에 공부하러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왜 영어를 공부하길 원하냐고 물었고 그 때마다 내 대답은 같았다. 영어로 읽기 위해서 영어로 쓰기 위해서 였다. 내가 한국어를 할 줄 알아서 한국어 책을 읽는 것은 무척 나에게 중요하고 유용하며 또 즐거운 일인데, 만약 다른 언어 하나가 추가되어 내가 읽을 수 있는게 더 많아진다면, 세상은 또 얼마나 확장될까. 게다가 내가 만나는 사람도 한국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이 더해진다면, 또 내 시야는 얼마나 넒어질까. 나는 다른 사람들의 생활과 일상이 궁금하고 그에 대해서 듣고 싶다. 나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다. 내가 책을 읽는 이유, 사람들과 대화하는 모든 이유는 내가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아서이다. 그래서 수단으로써 영어를 배우고 싶었다. 도구로써 영어를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영어를 공부하려다 보니, 그렇게 영어로 소통하려다 보니,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보였다.
나에게 외국어인 영어를 하기 위해서, 영어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가 상대의 친절에 기대야 했다. 집을 계약할 때 내가 다소 어려워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으면 집주인도 그리고 중개인도 천천히 다시 설명을 해주었다. 만약 그들이 나의 느린 속도에 짜증을 냈다면 이 계약은 어떻게 됐을지 나도 알 수 없다. 나는 낯선 나라에 와서 서툴게 낯선 나라 말을 하면서 살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나는 그들에게 친절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외국어로 말하기 위해서는 상대에게 집중해야 했다. 모국어는 내가 집중하지 않아도 들린다. 우리는 종종 까페에서, 지하철에서, 길거리에서 의도치 않게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듣게 되는 일이 있다. 그냥 그 말이 와서 들리는거다. 내게 도착한다. 내가 억지로 듣는게 아니어도 그게 가능하다. 그러나 아직 영어에 서툰 나는, 내가 듣고자 마음 먹고 집중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의 말이 와 닿지 않는다. 그래서 영어사용자와 소통하기 위해서 나는 상대에게 온전히 집중해야 했다. 상대의 눈을 계속 바라봐야 했고, 혹여라도 내가 놓치거나 오해하는 일이 있을까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이렇게 대화하다보니 상대는 나에게 호감을 품기가 쉬울 것 같다는 생각도 그 때 들었다. 사람은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에 대해 호감을 가지지 않나. 내 말 잘 들어주는 사람, 이라면서 그 사람을 또 만나고 싶어하지 않나. 그런데 외국어로 대화할 때의 나는, 누구보다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건 내가 그런 사람이 되고자 의도한게 아니고,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이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외국인과 얘기 하기 위해서 나는, 온 신경을 그에게 쏟아야 했다. 호감을 주고 또 받기가 굉장히 유리해지는 상황이 아닌가.
글쓰기 수업에서도 마찬가지. 외국어로 글을 쓰기 위해서는 내가 아직 서툴기 때문에 내가 말하고자 하는 문장을 그대로 써낼 수가 없다. 자, 이런 문장을 쓰자, 라고 했다가도 막상 쓰려고 하면 단어나 문장을 어떻게 조합해야 할지 몰라서 조합이 가능한 문장으로 바꾸곤 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크게 변하지 않지만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내 문체나 혹은 문장은 한국어로 쓰는 것과 많이 달라져있다. 나는 이런 경험으로 인해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로 쓴 소설을 떠올렸다. 줌파 라히리는 여전히 줌파 라히리이고 그녀의 소설은 변함없이 좋지만, 그러나 영어로 썼던 소설이 더 좋았던 것은, 또 이탈리아어로 쓴 작품에 유독 외국인의 시선이 많이 들어간 것은, 아마도 이런 작용이 그녀에게도 일어났기 때문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게 된거다.
이런 것들을 깨닫는 것이 즐거웠다. 단순히 외국어를 학습하고 익히는게 아니라 거기에 대해 부가적인 다른 사고까지 가능해지는 걸 깨달으니 외국어를 공부하는게 너무 좋다. 사방 천지 외국어가 가득한 곳에서 나만 혼자 한국어로 생각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사실 외롭다기 보다는 신난다. 나는 이곳에서 외국인이다. 한국 책을 꺼내놓고 술을 마시고 있다보면 외국인이 말을 건다. 나는 여전히 서툰 영어로 대답하지만, 그러나 상대방은 나의 말을 이해하고 나와 대화한다. 여기에도 역시 영어생활자가 아니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과 태도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김미소의 책은 한마디로 이런 생각들의 기록이다. 한국에서 한국어로 생활하다가 베트남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만나 함께 살게 되고, 미국으로 건너가 영어 생활자가 되어 영어로 돈을 벌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어를 배우면서 또 영어를 가르치는 일들을 겪으면서, 언어가, 외국어가 우리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에 따른 사색과 통찰들이 이 책 안에 있다. 거기에는 확장된 사고에 대한 긍정적인 열림이 있고 또 거기에는 결코 좁혀지지 않는 사회계층의 격차가 있다. 이런 기록을 읽는 것은 얼마나 짜릿한지! 외국에서 생활해보지 않았다면 그리고 외국어로 생활해보지 않았다면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들을 이 책을 읽다보면 알 수 있다. 이런거 너무 즐겁지 않나. 내가 경험하지 못했지만 경험해본 사람이 알려주는 통찰들. 이런거 책으로 알게 된다는거 너무 신나지 않나.
언어 공부에 관심이 있는 사람, 생각하기 좋아하는 사람, 무엇보다 사람에 대해 관심있는 사람,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공부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은 정말이지 도움이 될것이다. 내 세계가 확장되는 데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지만, 이 책을 읽는 것도 그중 하나가 될 것이다. 나는 이 책이 그렇게나 좋았다.
외국어 학습은 책속의 지식을 단순히 뇌 안으로 가져오는 작업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내는 과정이라는 걸요. 언어는 나와 세게를 관계 맺어줍니다. - P7
미국인)선배는 송도와 안산의 세계화를 극명히 대조해서 이야기했다. 국제 비즈니스 센터 및 여러 해외 대학교의 캠퍼스를 끌어당기는 송도, 세계 각지의 외국인 노동자를 끌어당기는 안산. 송도의 세계화는 해외 법인, 해외 대학교의 국내 캠퍼스, 유학생, 국제업무지구 등의 화려한 이름으로 대표된다. 반면 안산의 세계화는 외국인 노동자, 공장, 저임금 같은 단어와 연결된다. 세계화는 양극단에서 진행되고, 그 둘은 만나지 않는다.- P13
아이는 아이의 방식으로 자라야 하지만 가끔 성인의 생활 세계에 빨려 들어가기도 한다. 이민자 가정의 경우 부모보다 아이가 현지 언어에 더 능숙한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 아이가 집의 통역사가 되는데, 이를 ‘언어 중개인(language broker)‘ 이라고 한다. 아이가 현지 언어를 더 잘할 수는 있어도 법, 보험, 계약, 의료 등의 분야에 쓰이는 어른의 언어는 잘 알지 못한다. 언어 중개인이 된 아이는 둘 다에 억지로라도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겨우 중학생 정도의 아이가 가족의 명운을 건 통역사가 되는 셈이다.- P15
그러나 읽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흑발 (베트남)언니는 어디가 내과고 어디가 약국인지도 알지 못했다. 언니의 눈이 되고 귀가 되고 입이 되었다. 물론 나도 베트남어를 한마디도 못했지만 어디를 가야 하는지는 알았고,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는 알았다. 초등학생 아이 손에 의지해 병원에 가야 하는 이십 대 외국인의 심정은 어땠을지. - P16
양극단의 세계화는 언어 교육에서도 그대로 일어난다. 결혼 이주여성은 다문화가정센터나 주민센터를 통해 한국어 교실에 등록한다. 보통 무료로 수업을 듣거나 아주 적은 돈을 낸다. 여기서 쓰는 교재는 주로 "여보, 양말은 어디에 있어요?" "서랍 안에 있어요"처럼 남편을 내조하기 위한 내용을 다룬다(여성가족부, 2005). 반면 유학생들은 대학의 한국어학당을 다닌다. 등록금은 백만 원 내외다. 여기에서 쓰는 교재는 한국 젊은 세대의 연애, 케잍팝, ‘힙‘한 관광지 등을 다룬다. 이 둘의 간격은 쉬이 좁혀지지 않는다. 그나마 결혼이주여성은 비자 문제가 해결된 이들이지만, 체류 신분이 불안정한 사람들은 한국어 교실에 가는 것조차 쉽지 않다. 이 간극은 좁혀지지 않고 격차는 계속 벌어진다. 세계화는 끝과 끝에서 일어나고, 언어 간의 간격도 어짜면 그렇게 계속 멀어지는지도 모른다.- P20
교육부는 2006년에 처음으로 다문화가정 자녀 교육지원 대책을 마련했고, 다문화가정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었다. "우리와 다른 민족.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가정을 통칭"(교육인적자원부, 2006)한다고.
도대체 ‘우리‘가 누구지? - P21
국경 하나만 넘으면 이 친구가 경험할 수 있는게 정반대로 바뀔 수 있구나. 이 친구가 갖고 있는 정체성, 언어 자원, 문화 자본이 환영받을 수 있는 곳이 지구본에 그어진 선을 조금만 넘으면 존재했다. 나는 왜 그 생각을 못했지. 한국의 틀에만 갇혀서 생각했던 내가 바보였다. 이주, 디아스포라, 코스모폴리타니즘 등 머릿속에만 둥둥 떠다니던 개념이 눈앞에 뚜벅뚜벅 살아나왔다.- P27
현재형 can 은 대화 시점과 가깝고, 과거형 could는 대화 시점과 멀다. 이 시간적 거리를 활용하여 can은 좀 더 친밀한 사람에게, could는 낯선 사람에게 정중하게 말할 때 쓰인다(Larsen-Freeman & Celce-Murcia, 2015). 조동사의 현재와 과거는 단순한 문법 형태가 아니라, 심리적 거리와 관련이 있다.- P58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과 불편함이 결코 계속되지 않는다는 걸, 오히려 이럴 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물색해 보며 성장하게 된다는 걸 선생님과의 대화를 통해 배웠다. - P59
격의 없는 사이라면 이렇게 소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1년 365일중 363일은 아침을 챙겨먹고, 스타벅스에 앉아 하염없이 보내는 시간을 사랑하고, 어릴 적 천사소녀 네티가 긴 머리를 묶고 요술봉을 휘두르는 게 너무 멋져 보여서 두발 제한이 있던 중학생 이후로는 쭉 긴 머리를 고수하고 있으며, 주변 모든 것을 분홍색으로 깔맞춤하는 버릇이 있고, 최근에는 귀여운 접착 메모지를 모으는 취미가 생겼다.- P62
이중언어자는 언어에 따라서 성격이 바뀌는 게 아니라, 각 언어의 문화에 맞는 행동양식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Chen & Bond, 2010). 한국어로 대부분의 생활을 하는 한국인이라면 일, 생활, 가족, 여가 등 모든 관계가 한국어를 매개로 만들어져 있으니 자연스럽게 상황에 알맞은 언어를 구사한다.
성인이 된 이후 영어를 매개로 만들어가는 관계는 다르다. 일단 상대가 한국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을 테니 한국식 상하관계에 서 벗어날 수 있고, 좀 더 자유롭게 관계를 맺어갈 수 있다.- P66
내가 갖고 있는 성격이 언어에 따라 바뀌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 언어와 함께 정체성을 빚어나가는 것이다.- P67
영어를 배운다는 건 전 세계인과 소통할 수 있는 도구를 익히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문화와 충돌하고 서로의 문화에 균열을 내며 세계를 넓혀가는 일이기도 하다. - P77
"오늘 원래 3시에 보기로 했는데 못 봐서 잔넨(유감) ㅠㅠ" 해외에서 한국인과 대화하거나, 해외에 오래 산 한국인과 대화하다 보면 이런 말투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언어 간의 경계를 몇 번 뛰어넘었는지 의식조차 못 하기도 한다. 이렇게 여러 코드를 섞어 말하는 걸 ‘코드믹싱(code-mixing)‘이라고 부른다. - P82
혼자서 시부야 밤거리를 걸으며 집에 돌아가는데 온갖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말도 못하는 나라에 와서 이 고생일까? - P126
아무도 나에게 일본어를 배우라고 강요하지도 않았고, 학교에서 언제까지 일본어 능력 증명서를 내라고 요구한 것도 아니었고, 일본어를 못한다고 비자가 끊기는 것도 아니었다. - P127
되어야 하는 자신을 쫓다 보니 되고 싶은 자신을 탐색할 시간도 없었다.- P129
중간언어는 모국어도 제2언어도 아닌, 그 사이에서 발전하고 있는 언어다. 그러나 오래 쓰지 않거나, 공부를 멈추거나, 쓰고 있던 표현만 쓰게 되면 발전이 점점 둔화되어 멈춰버리는데, 이때 언어가 화석화되었다고 말한다. - P141
학습자는 언어 A에서 언어 B로 이행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언어와 의사소통 자원 간의 경계를 넘어서 자신의 의사소통 능력을 확장시켜 가는 사람이다.- P143
언어는 더하기가 아니라 곱하기다. 하나의 언어를 배운다고 단지 하나의 언어만을 할 수 있는게 아니라, 지금까지 갖고 있던 다른 언어 및 의사소통 자원과 엮어 더 많은 걸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을 ‘초언어하기(translanguaging)‘ 라고 부른다. - P143
언어 학습의 경험은 학습자가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르다. 누군가가 자신처럼 하면 영어를 잘 할 수 있다고 말하거나 자신처럼 하면 다언어자가 될 수 있다고 설파한다면,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와 내가 서 있는 자리를 한 번쯤은 비교해보는게 좋다. 그 사람은 어느 언어를 하든, 어디를 가든 환영받는 사람인가? 아니, 적어도 차별받지 않는 사람인가? 그 사람이 언어 학습에 쓸 수 있는 자원은 어떤 게 있나? 그렇다면 내 경우는 어떤가? 나는 이 언어를 배워서 생활할 때 차별받지 않는 환경에 있는가? 나는 어느 정도의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가? 단순히 선진국 백인 비장애인 남성이 가장 언어를 배우기 쉽다고 말하고 싶은게 아니라, 상대와 내가 서 있는 자리의 차이를 인식해야 상대의 조언과 경험이 나에게 어느 정도 가치가 있을지 가늠해 볼 수 있다는 뜻이다.- P149
내가 소수자의 위치에서 다수자의 언어를 말하며 다수자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면 자신을 계속 검열하게 되고 소심해진다. ‘마음을 고쳐먹어 봐야지!‘ 라고 다집해도 생각처럼 잘 되지 않는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니까. - P151
언어는 대상이 아니라 매개체라는 것, 이제 막 태어나는 내 외국어 자아에게 친절해지는 것, 언어는 스파르타로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와 새로운 세계 사이에서 관계를 이어주는 매게치다. 내 말랑말랑한 영어 자아는 채찍질이 필요한 게 아니라 따스한 양육이 필요하다.- P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