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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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책장
  • 담배 한 개비의 시간
  • 문진영
  • 12,600원 (10%700)
  • 2010-03-12
  • : 572

 주인공 남자가, 자신을 관찰하는 전지적 작가의 목소리를 어느날 갑자기 듣게 되면서 겪는 곤경 

을  그린 영화 <Stranger than fiction>에는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그 목소리가 말하는 것이 일종 

의 스토리라고 여긴 주인공이 문학 전공 교수를 찾아가 상담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그 교수는 주 

인공이 듣는 목소리가 어떤 작가인지 알아내고자 일종의 테스트 문항을 만들어내는데, 그렇게해 

서 작가를 알아낼 수 있다면 목소리가 말하는 스토리의 성격도 미리 알아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 

문이다.  

 자, 우리도 한 번 이같은 테스트를 해보자. 

 Q. 백수급 편의점 알바생.                                               
    A. 박민규? 틀렸다. 

 Q. 반지하방이나 옥탑방에 살고 있다.                             
    A. 김애란? 땡. 

 Q. 뭔가 나서기만 하면 비가 오는 날들의 이야기.                
    A. 부코스키, 아니 한재호? 노. 

 Q. 쿨한 유머같은 이야기들. 뼈가 있는 듯도 하지만 싸이 미니홈피들을 랜덤타기 하다가 어디선가 본듯한 대화들. 인물의 갑작스런 죽음.       

    A. 뭐야 이거, 번역소설이었어? 하루키? 

 
 아니, 아니다. 다 틀렸다. 사실은 문진영. 3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자이다.  

어떤 작품에 어떤 상을 주어야하는지에 대한 기준의 옳고 그름은 던져두자. 그저 위의 테스트 문 

항을 신뢰한다면, 우리의 소설계는 또 한 명의 개성없는 소설가를 탄생시켰다는 말로 충분하니까. 

'88만원 세대'라는 말을 비롯하여, 어떤 한 세대를 부르는 명칭들에는 그 궁극적인 목적이 숨겨져  

있다. 그 명칭이 궁극적으로는 그 세대를 부를 수 있는 효용의 가치를 잃고 다른 명칭을 등장시킬  

수밖에 없는 운동성을 그 세대에 부여하는 것이 그것이다. 결국 '88만원 세대'는 "88만원"이 어떤  

한 "세대"의 가치관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는 자극이 되고자 했을 것이다. 그때 '88'이라는 자리에  

그 어떤 숫자이든 또 다른 숫자들이 대체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따라서 '88만원 세대'라는 명찰에는, 어차피 100만원도 안되는 돈을 받느니 그냥 대학 휴학하고  

편의점 알바를 하라는 뜻이 있거나, "쐐-한 표정"을 지으며 "그냥 습관"처럼 살라는 뜻이 들어있 

는 것이 아닐게다. 그런데도 최근 쏟아지는 우리의 젊은 소설들에서는 왜 그 이상의 세계는 없는  

걸까? 왜 88만원 세대라는 명칭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 들이는 걸까? "울 필요가 없다"는 극히 개 

인적이고도 개인적인 자각이면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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