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땅에 특별한 애착이 없는 나이지만, 모국어가 내 육체적 욕망의 한 부분을 그렇게나 크게 차지하고 있을줄은 몰랐다. 한국을 떠나온지 3개월여 쯤. 나는 거의 미칠듯 모국어로 된 책을 읽고 싶었고, 그러다가 우연히 내 손에 들어온 다른 사람(그것도 생판 모르는 사람)의 책을 뻔뻔하게 돌려주지 않은 채 아껴가며 조금씩 조금씩 읽었다. 그 책이 <여행의 기술>이었고, 그렇게 알게 된 알랭 드 보통은 책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때의 분위기상 내게 약간은 큰 의미로 다가왔다.
그러다가 귀국 후 맞은 바쁘고도 지겨운 일상속에서 알랭 드 보통은 어느새 잊혀지고 말았었다. 그런데, 얼마 후 내 생일에 가까운 후배가 <행복의 건축>을 선물했고 그렇게 다시 알랭 드 보통은 필연인 듯 다가왔다. 모국어로 쓰인 것이라면 감동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독자로서의 불리한(?) 조건을 벗고 만난 알랭 드 보통은 더욱 놀라웠다. 에세이 방식으로서의 글쓰기를 위해 다양하게 수집한 자료들의 방대함에도 놀랐고, 그 자료들을 일목요연하게 배치한 능력에도 놀랐으며, 그 자료들을 하나로 꿰어 한 권의 책으로 만들고야 마는 예술적 감각과 통찰력에도 놀랐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그의 다른 책들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야 말았다. 소위 "가벼움"을 표방한 퓨전 식의 그 어떤 장르도 거부하는 내게 알랭 드 보통은 그 금기를 조금은 넘어도 괜찮지 않냐고 말을 건넨 최초의 작가인 셈이다.
세 번째. 삼고초려라는 말도 있듯 어떤 대상을 알기에 충분한 시간으로 비유되는 숫자. 이번엔 거의 신간인 <공항에서 일주일을>을 직접 구입해서 알랭 드 보통을 만났다. 물론, 일말의 불안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씩 생겨나고 있던 작가에 대한 믿음과 공항에 대한 막연하다고 할 정도의 설렘을 가진 난 어느새 책을 사고 말았는데....
<공항에서 일주일을>은 자본이 어떻게 예술과 미적인 것을 탐구하는 인간의 사고능력을 지배하고 망가뜨릴 수 있는지를 시험하고 보여주는 끔찍한 책이다. 오죽했으면, "정말 이 책을 작가가 출간하려 했을까, 혹시 그냥 히드로 공항의 무료 홍보 책자로 발간된 것을 작가의 인기에 영합해서 출판사가(난 처음 들어보는 출판사다.) 무리하게 판권을 산 뒤 국내 출판을 강행?"이란 생각까지 했을까. 그러나 이건... 진짜.. 책이다. 아마존에서도 팔리고 있고, 작가의 홈페이지에도 버젓이 있더라... 흠...
7쪽에 달하는 다소 장황한 집필에 대한 변명은 일단 접어두자. 또, 자신의 "고용주"인 브리티시에어라인 사장을 만난 부분의 "용비어천가"도 정말정말 힘들지만 또 접어두자. (사실 그러고나면 책 내용이 얼마 남지도 않지만...) 일주일동안 히드로 공항의 터미널 No.5에서 작가가 한 일이라고는, 소피텔 호텔의 클럽 샌드위치를 작살낸 것, 애프터 버너라는 칵테일을 처 마신 것, 자판기에서 애새끼들마냥 과일맛 하드를 사 처먹은 것, VIP 라운지 식당에서 브리오슈를 바닥에 깐 포르치니 버섯 한 접시를 배불리 처먹고 시계풀 열매 셔벗과 초콜릿 케이크 한 조각까지 시켜 먹은 것 뿐이다. 아, 하나 일같은 일을 했긴 했다. 공항에서 헤어지는 어떤 연인을 보고 사진기자와 "병력"을 나누어 탑승 게이트 너머까지 뒤쫒아 간 일.
작가는, 공항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사연들을 때깔나고 담아보고도 싶었겠지만 자본이 제한한 장소와 시기 앞에서 작가가 가지고 있었던(가지고 있었던 거 맞는거죠?) 예리함은 그 공간을 결코 벗어나지 못하고 맴돌기만 하고 만다.
기내식을 만드는 공간을 보고나서 "(기내식을 먹는) 누구도 그 음식을 만든 리투아니아 출신의 스물여섯 살 난 루타는 떠올리지도, 그녀에게 감사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한 작가는 실상 스스로가 그런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VIP라운지에서 "<월스트리트 저널>을 읽는 운동복 차림의 스물일곱 살짜리 기업가와 욕실을 돌아다니며 국제적 박테리아 군체를 닦아내는 일을 하는 필리핀 청솝의 지위 사이의 상대적 관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중요한 일이라고 말한 작가는 애써 그 관계를 외면하고 있다.
결국, 주급을 받고 써야 할 것을 써야만 했던 알랭 드 보통은 자신의 고용주를 만난 시간 즉, "노동조합 대표를 만나는 시간과 에어버스 대표를 만나는 시간" 그 사이에 어정쩡하게 끼어 버린 채 두 손을 들고 있다.
이 책을 사면서 <불안>을 같이 샀다. 이거 읽어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