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연정은 “이 세상에 불행이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 천국에 있다고 믿게 될 것이라.”라는 시몬 베유의 문장을 신에 비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우월성이 바로 고통이라고 해석한다. 그런가. 슬픔이 인생의 디폴트 값이라는 걸 포장한다고 해서 견뎌지는 건 아니다. 다만 나는, 아니 독자는 시 안에서 그걸 발견할 때마다, 아니 텍스트 안에 자기 고통과 슬픔을 언어의 감옥에 가둬버린다.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도 까마귀의 역설은 해결되지 않고 자기모순에 빠진 연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은 여전히 각자 해결할 문제다. 헛된 희망을 버려야 오솔길이라도 찾아 떠날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을까. 그러나 시는 현실 밖으로 뛰쳐나온 사람들을 위한 위로일 뿐이다. 시가 스스로 시가 되려면 사랑 대신 멸종으로 바꿔 읽어야 한다. 그러면 시시하지 않다.
까마귀의 역설*
인간 중에도 인류학자가 있듯 새들 사이에도 조류학자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어느 날 조류학 분야의 저명한 교수인 까마귀 R의 실종 소식이 보도되었다. 수색 결과 한 장의 편지가 발견되었으며 아래는 R이 남긴 편지의 전문이다.
친애하는 까마귀 여러분께
내가 오랫동안 주장해오고, 이 사회에서 하나의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이론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모든 까마귀는 검다’라는 주장입니다. 검은 깃털 색은 우리 까마귀종의 유구한 정체성을 형성했습니다. 그것은 주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에도 민망할 만큼 보편적인 진리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내 날갯죽지 깊숙한 곳에서 흰 깃털 한 올을 발견한 것이지요. 나는 거울 속의 내 모습을 의심했습니다. 내가 드디어 미친 것일까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우리 까마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동물 중 하나입니다. 인간들은 그것을 미러 테스트라고 부른다지요. 흰색 깃털은 선명했습니다. 나는 초조함에 사로잡혀 매일 아침 거울을 보고 날개를 확인했습니다. 날이 지날수록 흰 깃털은 늘어만 갔습니다.
‘모든 까마귀는 검다’라는 문장은 ‘모든 검지 않은 것은 까마귀가 아니다’라는 문장과 논리적으로 동일합니다. 흰 우유는 까마귀가 아니고, 흰 종이는 까마귀가 아니고, 흰 눈은 까마귀가 아니지요. 처음에는 깃털을 하나씩 뽑아보았습니다. 피부가 벌게지며 부어올랐죠. 고통스러웠습니다. 흰색 깃털은 주체할 수 없이 많아졌고 점점 나를 뒤덮는 흰 깃털들을 보며 고민했습니다. 흰색을 마주할 때마다 심장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이 깃털들이 내 몸 전체를 덮게 되는 날이 온다면…… 누군가가 내 흰색 깃털을 발견해버린다면……
물론 ‘모든 까마귀는 검다’라는 이론을 수정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론을 위해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바쳤습니다. 전 세계의 까마귀들을 보러 매일을 타지로 날아다녔고, 셀 수 없이 많은 동족의 시체를 해부해버렸죠. 그동안 저에게 지친 배우자와 자식들은 등을 돌렸고 나는 가정의 파탄을 명성과 맞바꾸었습니다. 유력한 정치가들도 나에게 자문을 구했죠. 이 이론을 포기하는 것은 나에 대한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그것을 완전히 증명했다고 믿습니다. 그 이론은 제 인생 그 자체이며, 나는 흰 까마귀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벌써 내 몸의 반절을 흰색이 덮어버렸습니다. 이제 더이상 깃털을 뽑는 방식으로 이 사실을 숨길 수 없습니다. 깃털을 뽑은 자리에서 난 피를 닦는 일에도 이젠 지쳤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나는 까마귀가 아니다.
이제 나를 까마귀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나는 분류될 수 없는 하나의 이상한 생물입니다. 여러분도 흰 까마귀를 발견하고 상식을 수정하는 불쾌한 일을 겪기를 원하지 않으실 겁니다. 따라서 저는 눈이 가득한 북쪽으로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완전히 하얘진다면………… 그곳에서는 아무도 저를 찾을 수 없겠지요. 거울에 비친 나는 투명해질 것입니다. 미러 테스트도 소용이 없도록 말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저의 이론을 수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까마귀가 아니고 따라서 여전히 모든 까마귀는 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이젠 정체를 알 수 없는 R이
* 이 시는 철학자 카를 구스타프 헴이 가설의 귀납적 입증에 관해 제시한 '까마귀 역설'과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이 남겼다고 알려진 "새에게 조류학이 유용한 만큼 과학자들에게 과학철학이 유용하다"라는 발언의 영향 아래에서 씌어졌다. 실제로 파인먼이 이러한 발언을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철학적 좀비’는 철학자 데이비드 차머스가 1990년대에 제기했던 사고실험이다. 심리철학 분야에서 이론적 아이디어로 제시한 이 말은 외면적으로는 보통 사람과 똑같이 행동하지만 내면적인 경험이나 의식이 없는 인간이라는 설정. 현대인을 향한 조롱과 비난이 아니다. 물론 유선혜가 자기 시를 읽는 독자를 향해 날린 어퍼컷도 아니다. 그래도 두근대는 가슴팍, 조금 빠른 심박수, 조급한 박동이 없는 나와 너는?
빈맥
아이들은 놀이터가
철거될 예정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네를 탄다 숨이 찬다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친구들과 사진을 찍고
교복의 색이 다른 중학교로 흩어지면서
사인펜으로 쓴 롤링 페이퍼를 만지작거리고
동물은 인간보다 수명이 짧다는 걸
자기 전마다 생각하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아이들
두근대는 가슴팍을 식히며
이별이라는 단어를
이해해본 적이 없다는 듯이
끝을 상상하는 능력을 모두 잃은
사랑을 시작하는 심장은
조금 빠른 심박수를 가졌다
나쁘다는 것도 모르고 아름답다는 것도 모르고
그저 소방차가 줄지어 달린다는 사실에
신이 나는 것처럼
성당의 양초를 쓰러뜨리고 간 사람을
하늘에서 쫓겨난 천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할아버지의 병실 의자에 앉아서
귤껍질을 까며 미래를 조잘거리는 아이는
어른이 된 자신을 보지 못하는 그의 병명을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고
사랑을 시작하는 심장은
졸업식에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나타난
혈관이 튀어나온 손등을 제멋대로 상상한다
죄다 끝나버린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조급한 박동으로 뛰어나가고
넘어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