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관계가 망가지는가. 행복이 인간관계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다만 그 관계를 유지, 개선하는 방법을 모를 뿐이다. 각자의 욕망과 태도가 관계를 결정한다. 부모, 형제자매, 친구, 연인은 물론 사회적 관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처방전은 동서양을 망라한 고전의 화두다. 정치와 경제, 전쟁과 평화, 행복과 미래가 모두 관계망 안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타인’을 향한 기대와 요구, 인간에 대한 예의, 관계 형성의 의지 등 다양한 이유로 관계는 유지, 발전되거나 무너지고 단절된다.
이와 유사한 정치체제가 바로 민주주의다. 다수의 뜻이 하나로 모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개인을 무시하거나 집단 착각에 빠진 상태 등을 예외로 한다면 ‘국론 분열’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5천만 대한민국 사람의 생각이 ‘통일’된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 사회를 좀먹는 태도는 분열이 아니라 절멸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 너는 틀렸고 나만 옳다는 맹목, 그때는 틀렸고 지금은 맞다는 착각, 누가 되든 너만 아니면 된다는 증오, 특정인과 상대 진영을 향한 혐오가 폭력과 제노사이드를 탄생시킨 역사를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우리는 왜?
조슈아 컬랜칙은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Democracy in Retreat』에 설명했지만,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민주주의가 어떻게 무너지는지How Democracies Die 분석했다. 2018년 출간된 미국 이야기다. 당연히 그 중심에는 ‘트럼프’가 놓여 있다. 양당 체제가 굳건하고 국가의 기원과 출발부터 다르니 미국을 반면교사로 삼는 건 매우 곤란하지만, 헌법 기능이 작동하지 않거나 무시당하는 현실을 톺아보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망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들이 미국 민주주의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비공식적 규범은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라고 짚어낸다. 모든 성공적인 민주주의는 비공식적인 규범에 의존한다는 지적에는 모든 실패한 민주주의는 비공식적인 규범을 무시하는 데 있다고 읽을 수 있다.
1973년 피노체트 육군 참모총장이 아옌데 대통령 정부를 전복시킨 군사 쿠데타의 사례를 설명하면서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방법과 절차에 대한 살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역사적 교훈을 얻기 위해서다. 이것은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진보와 보수의 힘겨루기도 아니다. 상식과 이성으로 결정한 비공식적 규범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들은 이것을 연성 가드레일이라고 표현했다. 서로 다른 생각들이 부딪칠 때 최소한의 완충 장치가 법률이다. 사회적 규범을 어기는 자들도 형법과 민법으로 어느 정도 제재가 가능하지 않은가.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다. 그런데 이제 그 법을 가지고 논다. 판사, 검사, 변호사 출신 국회의원들의 정치적 이해관계는 말할 것도 없지만 종교와 결합한 경제적 이해관계까지 곁들여져 ‘설마’가 등장했다. 전설에나 등장하는 ‘해태’상이 놓여있는 광화문에 서로 다른 생각이 아니라 반지성과 무지가 넘친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향한 목소리들일까.
법과 정치는 범위와 기준이 다르다. 연성 가드레일이 무너진 자리에 들어선 각자의 법률 해석은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있다. 사회적 대타협과 합의가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계급적 이익에 충실하든가 아니면 민주주의의 기본 절차에는 충실해야 한다는 ‘기본’은 지켜야하는 게 아닌가. 그걸 마음대로 해석, 조정 가능하다는 오만과 만용이 민주주의를 망가지게 한다. 물론지지 정당과 무관하게 어디에나 있는 그런 자들에게 표를 주는 주권자의 책임이 가장 크다는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데 부끄러움의 원인이 놓여 있다. 대한민국은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게 돼 있다는 시니컬한 조언은 아주 오래 전 알렉시스 토크빌이 한 말이 아니라는 팩트체크 기사도 있으니 출처보다 그 말의 진의에 고개가 절로 숙여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