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2시
"다산아 노올자~", "엄다산!", "엄.다.사안,"
누가 부르나, 음 정우녀석 또 왔나보네.
아 시끄러워. 언제까지 부를래?, 지치지도 않냐 동네 챙피해서 원, 저 놈이 도대체 몇 분째야 영 신경 쓰이는 걸... 산이 외가 갔다 임마, 적당히 부르고 그냥 가라.
추운 거리에서 정우는 산이를 찾고 오랜만에 홀로 차를 마시는 나는 오롯한 여유를 지키기 위해 정우야 빨리가라, 속주문을 왼다.
참, 정우가 지난번엔 저러다가 대문 앞에서 엉엉 울었다지, 오늘도 우는 거 아닌가 몰라, 나가봐야하나. 에이, 금방 가겠지 뭐,
이제 좀 조용하네. 꼬마가 안 됐어 주말인데 돌봐주는 사람이 없나?
어어 저 녀석 봐라, 조용하다 했더니... 혼 좀 나야겠어, 어디까지 들어오나 보자.
"누구야!"
은밀한 방법으로 대문을 따고 마당을 질러 열려있는 현관에까지 들어온 침입자에게 고함을 질렀다. 소리는 밀폐된 실내의 대류를 타고 사방으로 퍼지다 침입자의 귀로 흘러들어 갔으리라. 기척이 멈춘다. 대답은 없었다. 허나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내가 원한 것은 정우의 목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침입자는 보이지 않는 곳, 미지에서의 고함소리에 놀라 멈춘 듯 했고 일층과 이층, 도둑과 주인은 서로 숨을 죽인다.
만나러 갈 시간이다.
"흠!" 헛기침을 하곤 차자리에서 일어나 아랫층 계단으로 향했다. 어린 꼬마가 혹 놀라진 않았을까? 아냐, 혼 날만 해. 일 층으로 내려가는 짧은 시간, 비겁한 천둥에 놀랐을 어린 침입자를 용서해주마, 마음을 먹는다. 보이지 않는 포승으로 결박된 꼬마 칩입자는 어린 두 눈을 꿈뻑거리며 관대한 처분을 바라며 심판자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이제 계단을 돌면 정우가 보일 것이다. 스스로의 관용에 만족스러움을 느끼며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없는 칩입자에게 묻는다.
"누구냐니까,"
"실례합니다. 다산이 친군데요"
실례,실례라고! 일곱 살 꼬마가 몰래 들어와선 실례한다고? 저 녀석이 일곱 살 맞나. 도둑 고양이 같은 녀석, 이 집의 주인은 나고 너는 무단 침입을 했다. 이 집에서 지금 당당할 수 있는 권리는 오직 나에게 있는 것이란 말이다. 건방진 놈. 대문 따는 건 어떻게 알아낸건지...보마마나 산이가 알려줬겠지. 산이에게도 분명히 말을 해야겠어,
이윽고 그 녀석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이르러 나는 침입자 꼬마에게 다시 성난 소리를 냈다.
"누군데 허락도 없이 남의 집에 들어오느냐,"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유리창을 등지고 있는 내 얼굴이 안 보일 게 분명한데 그 정우란 녀석은 고개를 빳빳이 치키고 가만히 내 얼굴을 살피며,
"다산이 친군데요. 다산이가 없어서 들어왔어요." 라고 자못 침착하게 대답을 한다. 예상했던 상황이 아니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다산이 친구면 친구지 왜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들어왔냐고 묻고 있다."
간댕이가 붓다 못해 배 밖으로 튀어나온 꼬마라는 건 진즉 알고 있었지만 이 상황에서도 내 얼굴, 어쩌면 표정을 읽으려는 정우를 보자 이번엔 진짜로 부아가 치밀었다. 더이상의 화는 계획에 없는 것이었다, '화'는 의지의 감정이 아니다. 그러니까 진짜 화가 나려는 참이었다. 이를 어째, 상대는 일곱살 어린애, 게다가 내 아들이 초등학교에서 사귄 첫번째 친구였다.
진정하자 진정, 어른 답게... 아니아니 어른이니까...,
실례를 사과의 의미로 말한 것이라면, 정우로서는 더이상 할 말이 없는 것이었다. 나는 아이에게 같은 질문만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상황을 정리하는 수 밖에 없었다..
"다산이는 외가에 갔으니 다음에 놀러오거라", " 인사하고 가야지! 다시 들어와", " 주인 없는 집에 함부러 들어오면 혼나는 거다."
인사를 하기 위해 되들어 온 정우가 꾸벅 고개를 숙이다 생각났다는 듯, 손안의 작은 상자를 내미며 "이거 레고인데요 산이랑 같이 가지고 놀려고 샀어요, 안녕히계세요."
꼬마는 총총 계단을 내려서 대문을 쾅 닫고는 잠시 망설이더니 골목을 돌아 한길로 나가 금새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정우... 정우녀석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절대 기죽지 않는 괴물 같은 놈에게 애써 의연한 척, 어른 흉내를 내었더니 기운이 빠진다.
애초에 상대가 되질 않는 걸 알면서도 하, 괘씸하고 약이 올라 혼 한번 내주려는 나의 시도는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천방지축 정우, 거리의 아이, 힘이 없을 뿐 세상이 두렵지 않은 도시의 고양이.
눈치 빠른 정우가 다산이 아빠 따위 무서워 할 리 없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에이 씨, 뭐 이런 날이 있지.
#정우
쳇, 집에 있으면서 대답도 안하고 가만히 있을 건 뭐람, 이상한 아저씨라니까... 저런 사람이 다산이 아빠라니 불쌍한 다산이, 다산이처럼 착한 아이에게도 불행은 있는건가? 역시 하나님은 공평하셔, 그건 그렇고, 이거 생각할수록 분한 걸. 그것봐 누군가 있을 줄 알았다니깐, 아저씨 말고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할머니, 고모, 다산이 집 식구들 다 좋은데 저 아저씬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다산이 아빠만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어, 오늘은 정말 재수가 없는 날이지 뭐야. 이제 어디가서 뭐 하고 놀지.
그나저나 다산이는 외가에 자주가네, 다산이 외할아버지는 좋은 차도 타고 다니고 부자 같던데 매번 새로운 장난감을 사주는 걸 보면 부자인 게 분명해. 다산이는 좋겠다. 아 다시 생각하니 좀 불공평 한 거 같아. 쳇,,
배가 고픈 걸, 누나가 시키는 대로 짜장면이나 사 먹을 걸 그랬나? 이 장난감으로 다산이랑 놀고 밥은 다산이네서 해결하려던 계획은 물 건너 갔고, 어쩌면 좋을까. 도저히 배가 고파 안되겠어 장난감도 갖고 싶지만 오늘은 도로 물러야지. 쳇, 문방구 아저씨 얼굴을 또 봐야 하다니...... 오늘은 정말.
#다산
"산아 대문 여는 방법 친구들 한테 함부러 알려주면 안되는 거야, 아무도 없는데 산이 친구가 몰래 들어왔어, 오늘."
"정우?"
"산아, 식구들끼리만 아는 건 친구한테도 함부로 알려주면 안 돼, 정우 걔가 말이지 허락도 없이 집에 막 들어오지 뭐야, 마침 아빠가 집에 있어서 알게 됐는데 좀 걱정스럽더라. 정우 이 동네 친구들이랑 같이 돌아다니는데 아무도 없는 집에 친구들 다 데리고 들어 오면 안 되잖아."
낮에 정우가 우리 집에 들어왔다가 아빠한테 걸려서 혼이 난 모양이구나, 정우한테 외가 간다고 미리 말을 할 걸 미안해서 어쩌지... 아빠는 왜 정우를 미워하는 걸까, 정우도 참, 왜 허락 없이 들어온거야.
"...... 산아~ 아빠 말 듣고 있니? 아빠가 정우한테 다음에 놀러오라고 말했어. 그런데 대문 여는 방법은..."
"나 아냐, 나 아니라구. 다야가 알려준 거야!"
"......"
#아내와의 대화
자기야, 낮에 차 마시고 있는데 정우가 놀러왔었어. 다산아 놀자, 놀자, 부르는데 피곤하고 귀찮고... 제 풀에 지쳐 가려거니 없는 척 가만히 있었지. 근데 이놈이 대문을 따고 들어오지 뭐야, 현관이 열려있었는지 집 안까지 들어와서 기웃거리길래 따끔하게 혼내줬지, 근데 그녀석 기가 얼마나 센지 내가 다 떨리더라고...
알아, 안무서워 한다는 거. 근데 이번엔 좀 무섭지 않았을까?
전혀라고!, 아냐 이번엔 진짜 무서웠다니까. 에이, 정우 그녀석 왜 이렇게 신경 쓰이는 거야. 근데 산이는 정우 좋아해? 그렇겠지, 친구... 좋지 친구. 정우 그애 공부는 좀 잘하나, 그치 아직 일학년인데...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거지,
근데 글세, 산이가 그러는데 다야가 대문 여는 걸 알려줬다더라고 괜히 산이한테 잔소리를 했지 뭐야. 엄다야 이녀석 누굴 닮았는지, 뭐? 자기는 알고 있었다고, 아냐 걱정은 무슨, 정우를 의심하는게 아니라... 그래도 조심하자는 말이지.
뭐! 다야가 정우를 좋아한다고? 그럴리가, 진짜라구? 아니 여섯 살짜리가 무슨, 하하 귀엽긴 한데.. 정우는 싫어!, 정우는 안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