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듣는 <윤고은의 EBS 북카페>에서 화요일마다 방송하는 '무리하는 시인들'에서는 김소연, 김상혁 시인이 나와 그 주에 인상 깊게 읽은 시를 낭송하고 그 감상평을 전해준다. 나는 시집을 즐겨 읽는 편이 아니고 시를 써본 적도 거의 없어서 사실 이 코너를 애정하게 될 줄 몰랐다. 우연히 듣게 된 방송에서 김소연 시인이 낭송해주는 시는 흡사 음악처럼 귀를 울렸다. 시어 하나하나, 그 시어 사이로 끼어드는 의도된 공백까지 시인이 읽어주는 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들렸다. 걷다가 '헉'하고 한번씩 멈추게 될 만큼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시는 사람의 목소리로 읽어주는 행위까지 덧붙여져야 비로소 완성되는 장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이었다.
아침에 유치원에 간 아들이
저녁에 서른다섯 살이 돼서 돌아왔다
늦었네 하고 말했더니
벽에 걸린 뻐꾸기 시계를 그리운 듯이 올려다보면서
아들은 어른의 목소리로 응, 하며 대답했다
-요쓰모토 야스히로 <세계중년회의> 다녀오겠습니다! 중
김소연 시인의 목소리로 이 시의 이 대목을 듣는데 뭔가 가슴에서 툭 하고 떨어지는 감동이 있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정말 그런 순간이 온다. 아침에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엄마와 종일 붙어있겠다고 발버둥 치던 아이가 어느새 성인이 되어 내 앞에 서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떠난다. 떠났다 돌아올 것이다. 그리움을 가지고.
시란 이런 것이구나.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흘려보낸 것들을 눈앞에 보이듯 생생하게 소환하고, 또 그것을 누군가의 목소리로 듣게 되는 순간 그리운 그 시간들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왜 시를 쓰고 시를 읽고 시를 낭송하는지 알게 되는 시집이다.
그리고 나는 내 친구 동생의 추도식에 참여하고 나서야 그의 아버지가 이 가슴 저미는 시를 썼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완벽했던 여름...... 가족 중 누구 하나도 죽어가지 않았던 그 여름을 기억한다."
-제임스 우드 <인생에 가장 가까운 것>
한창인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쓴 추도사는 하나의 시다. 인생은 프로이트가 이야기하는 "사후성"으로서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은 결국 저자 제임스 우드가 문학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의 종지부다. 돌이켜보고 돌아봐야만 이해할 수 있는 비로소 성립하는 숱한 상실과 작별로 점철된 애달픈 이야기. 문학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저자의 망향의 그리움과 상실의 필연성을 오롯이 담아낸 짧지만 아름다운 강의록이다.
AI가 마치 모든 것들을 점령할 것처럼 수선을 떨고 어수선한 시대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시를 쓰고 읽고, 소설을 쓰고 읽고 하는 이유는 뭘까. 내가 태어나 살고 죽었다 다시 살아나 내 삶을 이야기할 수 없으니 그런 게 아닐까? 아마도 그게 인생에 가장 가까운 것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