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정치적이거나 사회적 사안에 공적인 발언을 하는 것은 조심스럽고 민감한 일이다. 자칫 논란에 휩싸이거나 공격을 받게 된다. 어느 입장을 취하든 상대편 진영에서는 비판할 거리가 된다. 모든 정치적 사안에 대해 작가가 자신의 입장을 표명할 의무는 없다. 작품으로서 이야기해도 충분하다. 작품으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폭력이나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게 과연 정치만의 문제일까?
오에 겐자부로는 대표적인 반전주의자다. 어떤 명분의 폭력도 혐오한다. 일본의 패전 후 학교에서 도망쳐 숲속으로 들어가 혼자 나무와 교감했던 소년은 얼마 전까지 숭배하라 가르쳤던 천황이 일으킨 전쟁과 그 패배, 동네에 들어온 미군 지프 차를 화해시킬 수 없었다. 열병을 앓고 죽음 직전까지 갔던 오에가 자신이 죽어도 다시 또 낳아주겠다는 어머니와 대화하는 장면은 소설보다 더 감동적이다. 오에는 이 책에서 소년 시절의 이야기들 속에 십대 아이들을 상대로 한 경어체로 자신이 깨닫게 된 삶의 지혜들을 들려준다. 겸허하고 자애로운 노교사가 교실에 십대 아이들을 불러모아 쉽고 아름다운 말로 강의를 하는 듯한 책이다. 거만하지 않고 교조적이지 않고 따분하지 않다. 특히 자살 충동을 느끼는 십대 아이들에게 지금 이 순간을 넘길 수 있는 힘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은 그 어느 조언보다 와닿는다. 어른이 읽어도 좋지만, 중고생 아이들에게 선물하기 좋은 책이다.
이탈리아의 이론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대중적인 과학서를 추천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가다. 문학적 표현력과 과학적 사고의 절묘한 균형 지점을 찾아내는 데 그 어떤 작가보다 특화된 작가가 아닌가 싶다. 호수의 다리를 걷다 물고기를 통해 의식의 본질과 주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자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전쟁과 패권 갈등으로 얼룩진 현 세계 정세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사물의 실재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일종의 관계를 통한 과정이라는 이야기와 앎의 주체가 '세계의 일부'로 우리 또한 그 '부분의 부분'에 불과하다는 마지막 이야기는 다시 초입 장자의 인식의 주체와 수미상관으로 만난다.
오에 겐자부로도 카를로 로벨리도 서로 만난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책을 통해 손을 잡는다. 이 세상의 중심은 내가 아니고, 그 어떤 폭력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우리는 세계의 일부일 뿐이며 인식의 전능한 주체가 아니라 단지 이 생을 잠시잠깐 경험하기 위해 세상에 나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이야기다. 관계 그 자체가 실재이면 그 어떤 형태의 폭력도 타인에 대한 위해가 된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연민할 수 있는 힘 그 자체가 실재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