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단 하나의 문장도 낭비하지 않는다. 마치 그 문장, 단어, 음절 하나하나를 벽돌처럼 쌓아 아름다운 성당을 세우듯 클레어 키건은 이야기를 짓는다. 무심코 주위를 한번 쓱 들러보고 하는 배경의 묘사 같은 것들도 결국 결론이 나고 나면 이야기에 중요한 하나의 단서였음을 깨닫게 될 때, 이 작가의 작품은 비로소 그 의미를 온몸으로 드러낸다. 지금까지 이런 소설들을 읽어본 적이 있었나? 하고 묻는다면 바로 떠오르는 작가가 그녀를 빼고는 없다.
표제작 <푸른 들판을 걷다>에 초반부터 묘사되는 결혼식의 정경은 평범하다. 결혼식을 진행하는 사제의 시선을 따라 마을 사람들의 한담과 신랑, 신부의 긴장된 모습과 그들의 부모들의 어수선함은 언제나 그러했던 것들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신부의 진주 목걸이가 끊어지고 그 진주알이 사제에게 굴러온 시점에서 이야기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방향을 튼다. 사제는 이 결혼식에서 소외된 사람이고 이 결혼식으로 고통받는 사람이었다. 그가 마을 사람들이 화제로 올릴 때는 무관심을 가장했던 중국 사람에게 가서 그의 손에 자신의 몸을 맡기고 "당신 문제 있어요."라는 말을 연거푸 들을 때 사제는 예감한다. 자신의 상처를 그가 읽었음을. 그리고 이제 그는 다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야 함을. 그건 체념이나 절망과는 다르다는 것을.
하느님은 어디 있지? 그가 물었고, 오늘 밤 하느님이 대답하고 있다. 사방에서 야생 커런트 덤불이 풍기는 짙은 냄새가 또렷하다. 양 한 마리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 푸른 들판을 가로지른다. 머리 위에서 별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하느님은 자연이다.
-클레어 키건 <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은 자신이 자라난 아일랜드 전원 풍경 묘사를 통해 내밀한 곳의 울림을 자아낸다. 아일랜드에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사람들이 양 한 마리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 푸른 들판을 가로지르는 모습을 상상함으로써 허락받지 못한 사랑을 한 사제의 내밀한 심리적 변화를 손에 만지듯 감지할 수 있는 그 지점을 알고 있다. 이제 사제에게는 한때 흔들렸던 평화가 돌아왔다. 상처의 웅덩이를 지나간 자리에 그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걸어가야 함을, 그리고 그 발걸음이 가지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읽는 이들은 저마다 나름의 방식으로 깨닫게 된다.
하루키가 선집에 실었던 <물가 가까이>에서 주인공은 겨우 스물한 살이다. 그의 아버지와 이혼한 후에 재력가와 재혼한 어머니는 아들의 생일을 맞아 호화 리조트에 그를 초대한다. 하버드에 다니는 의붓아들의 성취를 비웃고 빈정대는 계부와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어머니의 모습 앞에서 아직 어린 그가 안쓰럽다. 그는 어린 시절 이혼한 부모 대신에 가부장적 할아버지에 억압받으며 살아온 할머니의 손에 자란다. 할머니가 떠나고 난 후에도 단 하루도 할머니를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그는 바다를 보고 싶어했지만 그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아내를 바닷가에 홀로 남겨두고 떠나려 했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손녀가 아닌 손자가 자신이 처한 상황이 전부라 여기고 그 안에서 견뎌야 했던 할머니의 슬픔을 해원하듯 자유롭게 물속을 유영하는 장면은 한없이 먹먹하다. 받고 싶었던 사랑을 받을 수 없었던 청년에게 진짜 사랑과 돌봄을 줬던 할머니의 생의 비원을 실현이라도 하듯 익사 직전까지 헤엄치는 그의 이야기.
<삼림 관리원의 딸>은 도발적이고 귀엽고 또 한편 묵직한 울림이 있는 이야기다. MBTI로 극J로 보이는 디건은 가장 자신의 아내로 적합해 보이는 마사에게 매달려 결혼한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게 되면서 부부 사이는 냉랭해진다. 마사는 디건을, 디건은 마사를 사랑하지 않는다. 어느 날 장미 묘목을 팔러 온 남자를 맞은 마사는 그와의 사이에서 임신하여 막내 딸을 낳게 되고 디건은 일말의 의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 귀엽고 이상한 막내딸을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이는 척한다.
막내딸의 생일날 숲속에서 남의 리트리버를 몰래 가지고 와 생색을 내며 딸에게 선물로 줘버린다. 딸도 마사도 그 리트리버에 애착을 가지게 되고 어느 날, 그 주인이 나타나게 되는데..
발달장애를 가진 둘째 아들이 매사에 계산적인 아버지와 상처 입은 어머니를 관찰하고 내뱉는 이야기들이 촌철살인이다. 사회적 금기나 예의를 벗어던진 날것 그대로의 이야기들에는 위트와 말하여지지 않은 진실이 숨어있다. 모든 것을 잃게 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디건의 반응은 독자의 기대를 벗어난다. 차곡차곡 쌓아올린 가정의 어엿한 가장의 역할에 매달려 있던 그가 마침내 그 모든 것 뒤안에 숨겨져 있는 진짜를 발견하게 될까.
다시 처음의 작품 <작별 선물>로 돌아온다. 어느 날, 가족을 두고 뉴욕으로 떠나는 딸인 당신. "당신이 떠나면 어머니는 어떨까." 이 질문에서 자유로웠던 작별이 있었을까. 그러나 여기에는 이 가족이 소유하는 더 큰 비밀이 있다. 딸을 성추행했던 아버지, 그를 방관, 방조한 어머니, 여동생의 그런 상황을 눈치채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그 상황을 어떻게든 방지해 보려고 노력했던 오빠를 두고 떠나가게 되는 것이다. 남기고 가는 그것들의 추악함에는 남들이 기대하는 소박한 그리움이 없다. 여기에 클레어 키건만의 독특한 지문이 묻어난다. 아름다운 묘사의 간극 사이로 냉정하고 가혹한 현실이 비어져 나온다. 주인공은 고통받고 고민하고 표류하지만 결국 거기에서 씩씩하게 걸어나간다.
"바람이 강할수록 나무도 강해진다."
아름답고 허무한데 강인하다. 그녀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