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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가의 다락방

다수에 속하지 않는 것은 두렵다. 주류에서 배제되는 일은 서럽다. 인종, 직업, 연령. 심지어 어느 연령에 따른 사회적 기대를 충족시키는 일도 그러하다. 졸업, 취업, 결혼, 출산. 산다는 일은 어쩌면 이런 사회적 압력과 기준에 억지로 나를 순응시키고 맞추거나 거부하는 일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거기에 부합해도 벗어나도 매일은 투쟁이다. 그것은 나의 내면이 아닌 외부에서 오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생명과 나름의 주관을 지닌 내가 그런 것에 매순간 들어맞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 틈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스트레스가 자아내는 고립감은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때로는 무비판적으로 맹목적으로 단지 거기에 그런 기준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걸 정답이라 믿어버리기도 한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자신의 길을 가기보다는 군중을 따르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랜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의 뇌에는 무리를 추종하는 습성이 생존 전략의 하나로 녹아들었다.

-<'나'라는 착각> 그레고리 번스















그게 일종의 진화론적 생존 전략이라는 발견은 놀랍다. 즉 인류는 다수의 선택에 기대어 생존해 왔기에 군중논리에 휘말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독자적인 노선은 위험하다. 모두가 따르는 무리의 규칙, 기대를 벗어날 때 생존에는 위기가 온다. 그 무리에서 제거되거나 배제되는 걸 기꺼이 감수할 만한 용기를 지녀야 한다. 설사 그런 용기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 결행의 순간은 어렵다. 
















아사이 료의 <정욕>에서의 욕망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그 정욕이 아닌, 바른 욕망이란 무엇인가?에 도발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정욕이다. 등교 거부를 하고 유튜버가 된 초등학생, 이성의 인기를 독차지하며 정작 그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운 대학생, 식품 영업부와 침구 전문점에서 일하는 중등 동창들이 만나는 지점은 사람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특이한 페티시즘이다. 사회에서 흔히 연상하는  이성애 대신 그들이 집착하는 욕망의 대상은 그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소외시킨다. 다수에 설 수 없는 욕망의 접점에서 그들이 소통하게 되고 연대로 나아가는 이야기다. <정욕>은 분명 힘이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작가의 힘은 이야기의 서사력 자체에 있지 메시지에 있지 않다.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가 반드시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비틀린 욕망조차 소수자이기에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위험한 사고의 불균형이 언뜻 노출되는 지점이 있다. 사회적 약자는 욕망으로서 분류되는 기준 안에 있지 않다. 그 욕망조차 타고나는 것이라 항변한다면 이 세상 모든  도덕률이 설 지점을 잃는다.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과 읽게 만드는 흡인력에 작가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에 대한 숙성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의문이 더해진다. 어떤 이야기는 그런 면에서 위험하다. 이야기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저도 모르게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스며져 나와야 한다. 서사가 메시지의 방편이 될 때 그건 때로 칼이 된다. 작가는 시종일관 인물들의 이야기에 간섭한다. 이 간섭조차 때로는 작가 자신이 경계했던 일종의 배제가 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삶 속에서 모두가 분투한다. 그걸 존중하는 건 당연하다. 다수의 논리를 강요하는 것도 때로 잔인한 폭력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나의 독특한 욕망이 타인의 몸을 매개로 하는 관계성에서 실현될 때 그것은 어떤 한계와 한도를 상정한 상태에서 기능하여야 한다. 상호 합의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상대가 독자적으로 성숙한 판단을 내릴 여건이었는지에 대한 고려도 함께 하여야 한다. 


다수는 절대선이 아니다. 소수도 절대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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