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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둥개 헌책방

요새는 좋아하는 작가가 쿤데라라고 하면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표를 내는 거라는 글을 어디선가 읽었다. 왠지 가슴이 아팠다. 대학 때 눈이 유난히 빛나는 한 학번 선배 언니가 생일선물로 사줬던 책이 세 번도 더 읽은 쿤데라의 불멸인데...


삼십이 넘어갈 때는 황당해서 기절할 것 같았다. 어영부영 보내니까 정말 삽십이 되는 날이 오는구나, 싶어서 표는 안 냈지만 그 때 충격도 많이 받았는데, 이제 삼십은 한 세기 전이고(!), 조금 있으면 사십이 될 테세. 


왜 이렇게 나이값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강박을 부리는 것일까? 누가 나이값 하라고 윽박지르는 사람이 주변에 있는 것도 아닌데 혼자서 유령을 불러대 놓고 스트레스를 받는 격이다.


얼굴 뒤에 - 최승자


얼굴 뒤에

나는 감춘다.

너의 고통과

너의 고통의 피맺힘에 관한

나의 지식을.


얼굴 뒤에

나는 감춘다.

내 자포자기의

내 패배주의의

그러나 무모한 힘을

그러나 무한한 근원을


정작 나이든 어르신네들은 아주 여유만만하건만은.

오십년 후에도 이를 갈고, 육십이 가까워져도 팔랑팔랑하며, 배부른 마음으로 이를 쑤시는 어르신네들 흉내 좀 내봐야겠다.


점심을 얻어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 천상병


점심을 얻어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 주기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 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에게 편지를 쓴다네.

참 우습다 - 최승자

작년 어느 날
길거리에 버려진 신문지에서
내 나이가 56세라는 것을 알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아파서
그냥 병(病)과 놀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내 나이만 세고 있었나 보다
그동안은 나늘 늘 사십대였다

참 우습다
내가 57세라니
나는 아직 아이처럼 팔랑거릴 수 있고
소녀처럼 포르르포르르 할 수 있는데
진짜 할머니 맹키로 흐르르흐르르 해야 한다니


인간성에 대한 반성문 2 - 권정생

도모꼬는 아홉 살
나는 여덟 살
2학년인 도모꼬가
1학년인 나한테
숙제를 해달라고 자주 찾아왔다.

어느 날 윗집 할머니가 웃으시면서
"도모꼬가 나중에 정생이한테
시집 가면 되겠네"
했다.

앞집 옆집 이웃 아주머니들이 모두 쳐다보는데서
도모꼬가 말했다.
"정생이는 얼굴이 못생겨서 싫어요."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도모꼬 생각만 나면
이가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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