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촌 레이첼>의 마지막은 내게는 전율이었다. 1951년의 작가가 21세기의 나를 질타하는 느낌이었다. 세월이 흘러도 사람에 대한 편견을 그대로 가지고 혹시 이 여자가 살인범이 아닐까 의심하는 너는 뭐냐고, 너는 이미 젊은 과부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이 소설 속 주인공을 보고 있었지 않냐고.... 통념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편견, 폭력적 시선에 대해 나에게 묻고 있었다. 그 순간 대프니 듀 모리에는 내 인생의 작가가 되었다.
그런 내게도 이 소설을 들 때는 약간의 머뭇거림은 있었다. 장편을 잘 쓰는 작가가 단편도 잘 쓰는 건 아니니 혹시라도 실망해서 내 인생의 작가에 시들해지면 어쩌나 하는 뭐 쓸 데 없는 걱정을 했었다는 말이다. 결론은 그가 쓴 글은 장편도 단편도 모두 같다는 것이다. 뻔히 주어진 주제, 예상 가능한 상황, 그럼에도 마지막의 전율로 나아가는 이야기의 힘은 역시 대프니 듀 모리에라 감탄하게 만든다.
작고 소담한 그리고 평화로워 보이는 표지와는 다르게 이 작은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공포다.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 펼쳐지지만 결국 하나의 주제 - 인간이 느끼는 가장 큰 공포는 무엇인가로 귀결된다.
새 떼를 보며 그들의 평화를 이야기하고 나도 하늘을 날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하는게 인간이다. 그런 새떼가 마치 누군가에 이끌린 듯이 엄청난 무리가 되어 인간 세상을 공격할 때 우리 지구의 정복자라 자만하던 인간들이 할 수 있는게 있기나 할까? 지금의 우리의 평화는 그저 새들이, 동물들이, 아니면 주변 이웃들이 나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대책 없는 낙관에 근거한 건 아닐까? 너무도 디테일하게 묘사되는 새들의 공격과 인간의 대응을 읽으면 아마도 실제로도 그러하리라 하게 된다.
산책 후 집으로 돌아갔더니 낯선 이들이 집을 차지하고 있고, 집의 가구도 구조도 모든 것이 바뀌었다. 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나의 신분을 증명해 줄 이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 왜 아무도 나를 모르지? 내 집은 어디에? 기숙 학교에 다니는 내 딸은 또 어디에? "침착해야 해. 심장이 이렇게 미친 듯이 뛰면 안돼. 당장이라도 목구멍에서 울음이 치솟을 것 같지만 그러면 안 돼."라고 자신을 다독이지만 출구는 없다. 모두가 친절한 얼굴과 친절한 말로 나를 모른다고 한다. 마지막은 슬펐다. 계속 왜? 어떡해야 하지?를 끝도 없이 되뇌이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헤매고 있을 앨리스 부인의 모습 때문에.... 그런 결말은 원치 않지만 우리의 끝을 우리는 모르는 거니까.
마지막 작품은 시력 이상으로 수술을 하고 푸른 렌즈를 끼게 된 부인의 이야기다. 3개의 이야기 중 그나마 어쩌면 코믹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수술 후 몇 달 만에 푸른 렌즈를 끼고 본 세상은 이게 무슨 말이야? 나를 제외한 모든 인간이 동물 머리를 하고 있다. 그나마 강아지는 낫다. 그토록 친절하게 나를 보살펴주던 의사와 간호사와 남편 모두가 무섭고 교활하고 언제든지 나를 공격할 거 같은 뱀과 독수리 등등의 머리를 하고 있다니..... 주인공의 공포가 느껴지지만 그래도 꽤 코믹한 상황 아닌가?
3가지의 단편이 모두 나를 뺀 주변이 나를 공격할 때 내가 느낄 공포를 이야기하고 있고, 예측 가능한 얘기를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독자를 끌어들이는 작가의 필력은 대단해서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게 한다. 어쩌면 한 편의 이야기를 다 읽을 때까지 내가 숨을 쉬었는지 돌아봐야 하는.....올해는 나쓰메 소세키의 책을 다 읽어야지 하는 결심을 했는데, 이러면 또 대프니 듀 모리에의 책을 먼저 다 읽어야 하나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