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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식성 귀차니스트의 책읽기
  • 타니오스의 바위
  • 아민 말루프
  • 16,020원 (10%890)
  • 2024-02-13
  • : 351

  아민 말루프의 책 3번째

이렇게 적는 이유는 이 작가가 벌써 나에게 올해의 작가로 낙점받았기 때문이다. 번역된 소설 2권 <동방의 항구>와 <초대받지 않은 형제들>을 지금 앞에 두고 있는데 이걸 지금 읽어야 하나, 더 아껴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민 말루프의 책 중에서 <타니오스의 바위> 이 책이 정점이 아닐까라고 짐작해보는데 그건 남은 책 2개를 다 읽고 얘기하자.


  <레오 아프리카누스>에서 레콩퀴스타시대 스페인과 아프리카, 이집트, 오스만 제국, 로마를 횡단한 주인공이 등장했고, <사마르칸트>에서는 11세기 중앙아시아가 배경이었다. 이번 <타니오스의 바위>는 19세기 중반 작가의 고향 레바논이다. 물론 작가는 수도인 베이루트 출신이고, 이 소설의 배경은 레바논 동쪽의 산악지대이지만 서울이 고향이든 태백이 고향이든 결국 내 나라 내 고향 아니겠는가? 그래서인지 앞의 어떤 작품들보다 몰입감이 뛰어난 작품이다. 레오 아프리키누스나 사마르칸트가 여행하는 기분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면, 이 책은 여행자 모드가 아니라 그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감정에 이입해서 읽게 된다.


  책 날개에 나오는 소개에서 보다시피 작가인 아민 말루프는 레바논 출신이다.오랜 옛날 역사책에서 배운 바로는 지중해 해상무역을 장악했던 페니키아가 있던 곳이고, 한 때 중동의 파리로 불리며 아름다움과 번영을 구가하던 나라다. 그러나 1975년에서 1990년까지 레바논 내전을 겪으면서 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참혹한 내전을 피해 망명을 떠나야 했던 나라이고 작가인 아민 말루프 역시 그 시절 프랑스로 망명했다. 땅넓이는  남한과 거의 같고, 인구는 5백만어림이다. 그런데 그 5백만 중에 100만이 자기 땅을 떠났다. 그 내전이 얼마나 참혹했을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타의에 의해 자기 땅에서 살 수 없게 된 사람에게 나는 왜 내 고향, 내 땅에서 쫓겨나 지금 여기로 떠나왔나는 결코 떼놓을 수 없는 질문일거다. 보통 사람들이 원하는건 그저 여기 내 땅에 나와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과 내 가족, 내 친구, 내 이웃들과 웃으며 아웅다웅하며 사는게 아닐까? 어딜 떠나든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


  아마도 작가에게 이 이야기는 쓰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였을거라 짐작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것일까? 무엇을 잘못했을까? 대답을 찾고 싶지 않았을까? 


 이야기는 19세기 중반은 레바논 산악지대에서 시작한다. 이 곳에는 타니오스의 바위라 불리는 왕좌처럼 견고하게 생긴 바위가 있다. 타니오스 키크라는 사람 아니 19살 소년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바위다. 산악지대 한 마을에서 전해오는 전설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첫 장부터 호기심을 자극한다. 타니오스의 개인사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스포일러를 피할 수 없으니 그 이야기는 책을 읽을 사람을 위해 남겨두기로 하겠다. 다만 그 바위의 전설에서 시작하는 작가의 이야기가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그리고 왜 이 바위가 전설로 남게 되었는지를 이야기의 끝까지 읽지 않으면 너무나 궁금한 그 이야기의 진실을 알 수 없으므로 결코 독자는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다는 이야기만 해두자.


  레바논 지역은 19세기 중반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는다. 다만 레바논 동쪽의 산악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서 먹을 건 별로 없으면서 복속시키는 데는 공만 많이 들어가는 지역이라 오스만 제국의 보호를 인정하면 지역 토호들의 독립적인 지배를 인정하는 수준의 보호령 정도 되는 지역이다. 타니오스가 태어난 마을은 겨우 300여가구 정도의 작은 크파리야브다라는 마을로 지역 토호인 샤리크가 다스리는 지역이다. 샤리크는 지배자로서는 꽤 괜찮은 사람이고, 마을 사람들은 그를 존경한다. 그렇다고 그가 이상적인 통치자라는 것은 아니다. 여자를 너무 좋아해 은밀하게 마을 여자들을 범하고, 사람들은 은밀하게 행해지는 그 행위에 대해 그저 눈감고 모르는 척하며 그래도 마을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게 노력하는걸로 만족하는 것이다. 샤리크가 마을을 통치하는 방식이나 마을 사람들이 샤리크에 대해 품고있는 마음들의 표현이 너무 그럴듯해 아마도 실제로 이 시대 마을들의 모습이 이렇지 않았을까싶기도 했다. 


  샤리크에 대해 인상적인 대목 중 하나가 마을의 어린 소녀가 마을 사제의 아들과 약혼을 했는데, 이놈의 자식이 도시로 공부를 하러 가더니 로마 카톨릭 사제에게 흠뻑 빠져서 결혼을 하지 않고 로마에 가서 성직자가 되겠다는거다.(이 동네는 카톨릭의 일파로 편입된 마론 기독교를 믿는데, 이 기독교는 성직을 세습하고, 결혼을 한다.) 어린 소녀가 샤리크에게 와서 약혼자를 설득해줄것을 요구하자, 샤리크는 마을의 사제를 불러 말한다. "내가 이슬람으로 개종을 하고 싶었는데, 마을 사제인 너의 얼굴을 봐서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너의 아들이 로마로 간다니 참으로 다행이다. 너 죽고 나면 우리 마을엔 더 이상 사제가 없으니 내가 이슬람으로 개종해도 되겠다"라고 폭탄을 날려버리는거다. 놀란 사제는 아들을 불러들이고 원래의 약혼자인 어린 소녀와 결혼을 시키는 것이다.


  책 속 아주 짧은 에피소드인데 샤리크라는 토호가 마을을 다스리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어쨌든 마을은 평화롭다는 것이다. 위기가 있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살아간다. 옆마을인 이슬람교 사람들과도 평화롭게 지내고 감정 때문에 유치한 복수를 하기도 하지만 나쁘지 않다. 물론 자신의 출생에 대해 고민하는 사춘기 타니오스의 고민도 있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뒤집히지는 않는다. 


  이런 마을이 뒤집히는 것은 결국 외세의 개입이다. 오스만 제국으로 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이집트는 프랑스와 손잡고 레바논 산악지역을 장악하고자 한다. 이 지역이 이집트가 영향력을 높이는데 길목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대를 파견하고 지역 토호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온갖 음모들이 진행된다. 지역 토호들은 누구나가 살아남기 위해서 어딘가를 선택해야 되고 그 선택들은 정보가 없는 이들에게는 그저 우연에 의해서, 또는 당장의 힘의 우위에 의해서 결정될 뿐이다. 마을이 무너지는 과정과 외세가 밀려오고 간섭이 심화되는 과정, 그리고 샤리크의 지배가 무너지는 과정은 한 시대가 끝나는 장엄한 슬픔을 보여준다. 한 마을의 무너짐에서 레바논 지역 전체의 무너짐이 오버랩되는 것이다. 그리고 잠시 영웅이 될 수 있을거라 믿었던 19살 소년이 무엇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바위에서 사라지는 모습은 거대한 상징으로 다가온다. 


 20세기에 레바논을 떠났던 사람들이 고향을 떠날 때 바로 그 타니오스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또한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전쟁에 휘말린 사람들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 수 없었던 그 마음을 독자는 이 한 마을의 몰락에서 고스란히 느끼게 되는 것이다. 역사책은 이런 사건들을 잔인하게도 몇 줄의 기록으로 남길 뿐이지만, 그 속에 살아갔던 사람들에게는 쉬운 것은 하나도 없었고, 할 수 있는 것도 전혀 없었던 거대한 슬픔의 기록을 모든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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