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생각에 의문을 갖게 하는 지점이 많았던 소설이다. 한편, 도스토옙스키가 ‘페트라솁스키 서클’에 연루되어서 겪은 극적 경험, 사형수와 유형수로 겪은 고통은 이 작품에도 역시 짙게 배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 평생을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 생각된다.
1869년 네차예프가 자행한 살인사건으로부터 소재를 얻고 작품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는 니힐리스트이며 유럽의 인터내셔널, 바쿠닌 등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가 있었고, 모스크바에 비밀결사를 조직했던 인물이다. 1860년대 러시아에서 니힐리스트는 모든 사상, 의미, 권위 도덕 등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급진주의자이다. 그들 학생 운동은 폭력을 동반했다. 이들의 폭력적인 성향은 『백치』에서도 그려진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백치』에서도 그랬지만 이 작품에서도 서구로부터 들어온 사상 뿐 아니라 새로운 세대의 다양한 ‘사상’, ‘주의’에 대해 부정적 입장에서 비판하는 태도를 취한다. 서구의 사상이 혼란스럽게 러시아 사회를 무질서하게 만들고 무너뜨리고 있다고 말한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윗세대들(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한 시기)의 서구사상(자유주의)을 여과없이 들여오고 그들의 삶이 부조리하고 위선적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서구로부터 들어온 불온한 사상들에 대항해서 러시아의 정신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 학자이자 시인인 스쩨빤 뜨로피모비치 베르호벤스끼와 같은 사람들이 구세대의 대표적 인물이다.
페테르부르크 근처 지방 소도시 스쩨빤 뜨로피모비치의 개인 연구실(바르바라의 집)에 모여든 젊은이들은 독자에게 수상한 분위기를 전한다. 화자는 스쩨빤 뜨로피모비치의 집 모임은 소문과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소문은 그들 모임이 “자유사상과 방종, 무신론의 온상”이라고 굳어졌다. 그러나 화자는 소문과 같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모임은 “매우 순수하고 온건하며, 순 러시아식의 유쾌하고 자유로운 잡담을 나누었을 뿐이다.”(1권 제1장 9. 52p) 학자연하고 사상가인 양 하는 스쩨빤 뜨로피모비치의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 때문에 모인 모임이었다. 소문은 스쩨빤 뜨로피모비치를 긴장하게 하고 극도의 흥분과 공포 속에 몰아넣는다. 이런 증상들은 도스토옙스키의 트라우마와 관계있다. 또한 국가, 계급, 개인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내포하는 경계와 폐쇄를 나타낸다.
소설 전체에서 중반이 지날 때까지 인물 탐색과 소도시의 사람들의 관계에 존재하는 갈등과 원망, 분노, 지배 같은 것들로 연결되어 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스쩨빤 뜨로피로비치의 모임에 참석하던 리뿌찐, 비르긴스끼, 시갈료프, 키릴로프, 샤토프 등은 스따브로긴과 뾰뜨르 스쩨빠노비치 베르호벤스키의 귀환과 함께 그들이 이 소도시로 모여든 목적이 드러난다. 그들은 자유주의 관리, 건축가, 학생이고 슬라브주의자, 인신사상 신봉자, 무신론적 실존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이다. 이들을 소개할 때 그들의 사상이 어떠한가를 먼저 언급하는 것은 사상이 범람하던 시기에 사상이 중요하게 여겨지던 풍조가 있었음을 알게 된다. 자유주의나 계몽주의에 이어 공산주의가 유럽을 휩쓸던 시대였다.
“당시는 특별한 시대였다. 무언가 새롭고 이전의 평온과 전혀 다른 아주 이상하지만 스끄보레시니끼에서조차 감지되는 어떤 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러 가지 소문이 들려왔다. 구체적인 사실들은 대체로 어느 정도 알려졌으나, 이 사실들 외에 어떤 사상들이, 그것도 엄청나게 많은 사상들이 그에 수반되어 나타났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사상들은 뒤죽박죽이어서 어디에 적용시킬 수도 없었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1권 제1장 5. 32p)
리뿌찐, 비르긴스끼, 시갈료프, 럄쉰, 똘까첸꼬로 이루어진 5인조는 뾰뜨르 스쩨빠노비치 베르호벤스키가 조직한 비밀결사이다. 러시아 내 각 지방과 유럽 전역에도 이런 비밀결사들이 존재하고 배후에는 더 큰 조직이 있다고 알고 있지만 그들은 그 실체를 본적도 다른 조직을 만나본 적도 없다. 이들은 스따브로긴의 외국에서 만나 영향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그에게서 사상적 영향을 받은 자들에게 스따브로긴은 정신적 지주이고 우상이다. 그 영향력을 뾰뜨르 베르호벤스키가 이용하고 그들을 지배한다. 니콜라이 프세볼로도비치 스따브로긴(Nikolai Vsevolodovich Stavrogin)은 소설의 중심인물이고, 모든 관계의 한 가운데 있지만, 그런 그에게서 지독한 허무를 보게 된다.
천재적이지만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갖고 있는 스따브로긴은 자기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말해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욕망과 쾌락을 쫓는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두 가지 의지 선과 악의 팽팽한 대립을 느끼지만 그는 범죄와 쾌락을 선택한다. 첫 번째 범죄에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경험한 쾌락은 그에겐 놀라운 것이었고 이후 같은 선택을 반복하게 된다. 여기서 스따브로긴은 그가 추구하듯 자유로운가를 질문해본다. 두 의지가 싸우고 있다는 사실에서부터 그가 자유롭지 않음이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매번 같은 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에서도 마찬가지 결론에 이른다. 습관이나 경향성은 이미 자유롭지 않은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서구의 사상에 물든 사람들은 그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폭력과 살인 그리고 믿는 바를 실행하기 위해 자살을 한다. 과연 그들이 믿고 있는 것처럼 자유의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는가 질문한다면 내 대답은 부정적이다. 그들은 스따브로긴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고, 뾰뜨르 베르호벤스키의 정신적 지배를 받고 있다. 그들의 사상과 행위 끝에는 허무와 공허만 있다.
그들은 왜 폭력적이 될 수밖에 없을까? 그들은 결말은 왜 허무일까? 모든 사상이 다 그렇지는 않을텐데, 폭동과 살인, 자살, 공허가 두드러진다. 왜 도스토옙스키는 이렇게 그리고 있는 것일까? 나는 19세기 러시아에서 원인을 찾는다. 계급의 벽이 높은 사회다. 사상이 뿌리내리고 꽃피우기에는 그 경계가 장애가 된다. 사회주의가 사상으로 자연스럽게 확산되기에 그들에게는 프롤레타리아가 없다는 작중 인물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지식인들의 모임 밖으로 나갈 개방된 출구가 없었다. 방화나 폭동이 사상을 확산시키는 에너지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는 생각이다.
에필로그에 푸시킨의 시와 누가복음 8장 37-38절을 인용하면서 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어느 정도는 밝히고 있다. 그는 푸시킨의 시로 성경을 풀어, 악령들이 파괴적인 사상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폰 렘쁘께는 ‘자레치예’의 화재 현장에서 "모든 것이 방화다! 이것은 허무주의다! 만약 무언가 타오르고 있다면, 그것은 허무주의다!"(3권 100p)라고 외친다. 허무주의라고 번역된 러시아어 Нигилизм(Nigilizm)은 라틴어 Nihil(무, 아무것도 없음)에서 온 것이다. 19세기 러시아 급진 세대의 적극적이고 파괴적인 정치·사회 운동. 종교, 도덕, 국가 권위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하고 이를 철저히 파괴하려 한 유물론적 행동주의다. 허무주의는 폭력성을 띄는 무정부주의를 향한다. 렘쁘께의 외침은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이며, 사상에 대한 작가의 주관이다.
살해 현장에서 소리를 지르며 광기를 보이는 비르긴스끼와 럄신이 뒤엉키는 장면은 이 소설에서 절정을 이룬다. 비르긴스끼의 절규와 럄신의 발작은 도스토옙스키가 묘사한 급진주의 사상의 민낯이다. 한편, 맡겨진 일(범죄)을 무심하게 해내는 에르껠의 모습은 극적 대비를 이룬다. 범죄와 인간의 본성을 소름끼치도록 그리는 도스토옙스키의 탁월함을 확인하는 장면이다. 이 살해에 연루된 인물들은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코프,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드미뜨리, 스메르자코프를 떠올리게 한다.
파괴와 혁명을 논하던 지식인과 소시민들은 살해 현장에서는 나약한 존재임을 드러낸다. 살해, 자살, 도주로 그들의 조직은 와해된다. 그들의 사상이 실패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결여된 것은 무엇일까? 사상이란 결국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이고, 그것은 인간의 욕망으로 연결된다. 인간의 욕망을 무시한 사상이란 공허한 말들에 불과하고, 그것을 무시한 사상의 실행은 폭력이다. 생명을 해하고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상은 공허하기만 하다. 도스토옙스키가 19세기 러시아에 들어온 급진적 사상에 대해 비판적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들의 신앙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게는 그것도 모호하게 보일 뿐이다.
스쩨빤 뜨로피보비치 베르호벤스키는 죽기 전 유언과 같은 말에서 “러시아에 위대한 사상과 위대한 의지가 필요하며, 그것이 악령과 모든 불결함, 혐오스러운 것들을 몰아낼 것”(3권 제7장 2. 327p)이라고 한다. 그 자신 또한 책임에서 피할 수 없고 그 선두에 선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스쩨빤 베르호벤스키의 고백과 병행하며 대비를 이루는 것이 스따브로긴의 고백서이다. 그는 과거의 범죄와 이후 연속된 자신의 범죄를 고백하는 글을 세상에 발표하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참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파괴적인 행위일 뿐이다. 악령은 그의 내면에 있다. 스쩨빤 뜨로피모비치가 사상을 ‘악령’으로 보는 것과 비교된다.
이렇게 정치적인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소설은 경향소설로 끝을 맺는다. 모든 사상, 이념이 다 폭력적이고 한 사회를 혼란으로 몰아넣는 것은 아니지만 거대한 사상의 물결이 큰 변혁을 가져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 앞에서 우리는 꿈을 꾸기도 하지만, 불안하고 공포를 느끼기도 한다. 세상은 엄청난 급변하고 있고, AI 시대를 맞아 희망과 불안이 뒤섞인 정서가 우리를 엄습한다. 이런 세상을 어떤 사유로 바라보아야 하며, 인류가 새롭게 해야 할 사상과 끝까지 지켜야할 가치는 무엇인가를 질문 받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구세대의 이념은 증오와 혐오를 상속하고, 생명을 조롱하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을 양산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겪는 현재의 혼란은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를 잃어버린 증상은 아닌지! 도스토옙스키의 표현대로 말한다면 우리 시대의 ‘악령’은 무엇일까?
나는 자유의지로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하는 생각, 선택, 행동들은 자유 의지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인간은 전적인 자유의지 상태에 있을 수 있을까? 나는 어떤 영역에서 자유롭지 못하는가? 무엇의 지배를 받고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위해 자유로운 선택을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이런 질문들을 해보게 된다.
